오늘의 성인(7월31일)

2014. 7. 30. 오전 7:20:29

글자

♡7월 31일 오늘의 성인♡
===============


성 네오트(Neot)

축일 7월 31일 

네오트 성인은 영국 잉글랜드(England) 남서부
콘월 지방에서 공경을 받는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글라스톤버리의 수도자로 살다가 콘월에서
은수생활을 하였다.
그는 생존시에도 이미 성인으로 공경받았으며,
그의 유해는 아이네스베리(Eynesbury)의 수도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는 앨프레드(Alfred) 대왕과 가까운 사이였다.


================================


성 데모크리토(Democritus)

성 세쿤두스(Secundus)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

축일 7월 31일 

성 데모크리투스(또는 데모크리토)와
성 세쿤두스(Secundus) 그리고 성 디오니시우스
(Dionysius)는 프리지아(Phrygia, 고대 소아시아
중서부 지역) 혹은 아프리카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알려진 다른 것은 없다.


================================


성 요한 콜롬비니(John Colombini)

축일 7월 31일 

이탈리아의 시에나(Siena) 출신인
요한 콜롬비니(Joannes Colombini)는 사업에 성공한
사람으로 비아지야 체레티니와 결혼하였다.
그는 어느 성인전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자신의
생활양식을 완전히 바꾸고, 자신의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희사하였으며 자기 집을 병원으로
꾸몄다. 아내를 위하여 약간의 배려를 해 준 뒤
그는 절대 가난과 회개를 실천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병원에서 병들고 가난한 이를 전적으로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는 부유한 집안들이 그를 존경하며 추종자들로
몰려들게 되자 시에나에서 잠적해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다녔다.

이리하여 그의 수많은 제자들은 예수 성명에 대한
특별한 신심 때문에 ‘예수아티’(Gesuati)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프라티첼리의 오류를 보전하는
임무를 위하여 조사할 때부터 교황 우르바누스 5세
(Urbanus V)는 예수아티를 수도회로 인정하였고,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환자들을 돌보는 평수사회인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사도적 성직회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얼마 후 요한은 볼세나 호수에서 병을 얻어
시에나로 돌아오는 길에 운명하였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에
의해 시복되었다.
 

================================


성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Justin de Jacobis)

축일 7월 31일 

성 유스티누스 데 야코비스(Justinus de Jacobis,
또는 유스티노)는 산 펠레에서 17명의 자녀 가운데
14번째 아들로 태어나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티오피아 선교단(빈첸시오회)의 일원으로
1839년에 에티오피아에 도착하였다.
2명의 동료 사제와 함께 그는 서서히 그 지방의
문화를 익히며 주민들의 친구도 되고 종도 되면서
온갖 장애들을 극복하며 선교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 선교활동은 주민들의 무지와 중상모략으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래를 위하여 방인 사제 양성에
주력하여 3명의 방인 사제를 배출하고 자신은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주 대중적인 선교를
실시하였다.

1853년경 에티오피아의 교세는 20명의 방인 사제와
5천명의 신자가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곤다르(Gondar)에서 체포되어 7개월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추방되었다. 그 후 그는 재차 입국에
성공하였으나 또 다시 감옥에 갇혔고,
프랑스군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지만 1860년 7월 19일
열병에 걸려 10일 만에 선종하였다.
그는 에티오피아 교회의 재건자이다.


================================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Ignatius)

축일 7월 31일 

성 이냐시오는
1491년에 에스파냐 기푸스코아(Guipuzcoa) 지방의
아스페이티아(Azpeitia)읍 위쪽의 로욜라 성에서
아버지 벨트랑 아녜스 데 오네스 이 로욜라와
어머니 마리아 사엔스 데 리코나 이 발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이니고이다.
그는 1506년에 당시 귀족 집안의 관습대로 에스파냐의
왕실 재무상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의 집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때부터 자신이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명예를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머리와 옷 등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며 허영과 사치를 일삼았다.
벨라스케스가 사망한 후인 1517년에 이냐시오는
군에 입대하였다.

1521년 나바라(Navarra)의 팜플로나(Pamplona)에서
프랑스군과의 교전 중에 다리 부상을 입고
그의 생애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성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그를 치료해 주었고,
로욜라의 가족들에게 후송해 주었다.
부상으로 인한 치료를 마치고 회복기에 접어들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는 평소 즐기던
낭만적인 기사 이야기를 실은 책을 읽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성 안에 그러한 책은 없었고,
대신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책을 읽어 가면서
기사로서의 공상들이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반면,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내면적인 체험을 할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 환시에서 그는 크나큰 위안을
받았고 지난날의 생활 전체, 특히 육을 따르던
행실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회심의 길로 들어섰다.
회심 후 로욜라를 떠난 이냐시오는
1522년 3월 25일 몬세라트(Monserrat) 산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Manresa) 마을 근처의
동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평화를 얻으려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하였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영성수련”(Exercitia Spiritualis)은 바로
이 시기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와
보속을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523년 2월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예루살렘 순례 후 1524년 3월에 바르셀로나
(Barcelona)로 되돌아왔다.
회심 이후 약 11년 간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526년에는 알칼라 대학, 1527년 살라망카
(Salamanca)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1528년
여름에 파리(Paris)로 학교를 옮겼다.
그곳에서 1535년 3월 14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1535년 봄 에스파냐로
돌아가 요양하였다.

이냐시오의 연학 시기는 수많은 시련도 있었지만
동시에 동료들을 규합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을 파리에서 만났다.
즉 사보아 출신인 파브르(P. Faber),
나바라(Navarra) 출신인 사베리오(F. Xaverius),
에스파냐 사람인 라이네스(J. Laynez)와
살메론(A. Salmeron)과 보바디야(N. Bobadilla),
포르투갈인 로드리게스(S. Rodriguez) 등이다.

이들은 이냐시오처럼 외적 고행, 구걸, 단식, 맨달로
다니기 등으로 단련하였다. 1534년 8월 15일
그들은 몽마르트르(Montmartre)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가난과 정결 그리고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하였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고향으로 돌아온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1537년 1월 베네치아
(Venezia)에서 9명의 동료들과 모였으나,
당시 터키와의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7년 겨울 이냐시오는 동료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Rome)로 갔다.
로마 근교의 라스토르타(La Storta)라는 마을의
경당에서 이냐시오는 환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부께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자리에 있게
해주시는 환시를 보았는데,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
(예수의 동반자라는 뜻)라 불렀으며,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사실 그때까지 장상, 규칙,
전통 없이 열심히 생활하던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1540년 9월 27일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의 교서를 통해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 4월 이냐시오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 22일에 그와 동료들은 로마의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서원을 하였다.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나갔고, 수도원과 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전 유럽에 세웠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과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다.
이냐시오는 1555년 여름 로마에서 열병에 걸려
7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622년 3월 12일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그는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

그는 삼위일체,그리스도,성체성사 등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기초위에서 영성
생활을 했다. 그의 영성 생활은 예수회의
좌우명인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속에
표현되어 있다. 순명은 가장 으뜸가는
미덕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으며, 예수회
회원들의 활동성과 능률은 바로 순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증해 주었다.
모든 행동은 교회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로마 교황에 대한 조건없는 순명에 따라
인도되었다. 따라서 모든 예수회 회원들은
세가지 서원에 이어 교황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들을 어떠한 곳에 보내든지 그곳으로
간다는 네 번째 서약을 한다.

설명 ;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에서
교회의 문에 자기 논문들을 붙였다.
그로부터 17년 후에 이냐시오는 가톨릭
종교 개혁을 위한 너무도 훌륭한 역할을
수행할 수도회를 설립했다.
개신교도들에게 그는 용서할 수 없는 적이었다.
그러나 교회 일치 운동의 근원은
그의 말 속에서 발견된다.
"만일 어떤 이단자들이 박애와 그리스도교적
중용의 본보기를 보여 준다면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정통파의 진리를 드러내는 데
깊은 배려를 해야만 한다. 그들의 잘못에
대해 어떤 종류의 경멸도 나타내서는 안되며,
혹독한 말도 해서는 안된다."
현대 교회 일치 운동에 공헌한 가장 위대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은 예수회 회원인
베어 추기경이었다.

인용 ; 그는 참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기도를 권장했다.
"주님,받아 주소서. 내 모든 자유를,
내 기억을, 내 이성을, 내의지의 모든 것을.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주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주께 돌려드립니다. 청하오니
마음껏 써 주소서. 오로지 주님의 사랑과
은총만을 주소서. 그것으로 저는 충분합니다."

   
================================


성 제르마노(Germanus)

축일 7월 31일 
 
성 게르마누스(또는 제르마노)는 378년경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에 있는
오세르의 좋은 가문에서 출생하여 갈리아(Gallia)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후 로마(Rome)에 가서 법학을
공부하여 로마 시의 변호사가 되었다.
황제 호노리우스로부터 갈리아 지역을 다스리는
6명의 고위 관리 중 하나로 임명받아
지방 장관으로 재직하였다.
내적 회개를 체험한 게르마누스는
관직에서 물러나 사제가 되었다.

오세르의 주교였던 아마토르(Amator)가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그가 사망하자
즉시 선출되어 418년 7월 7일 주교품을 받았다.
이때 그는
자신의 부인(로마에서 결혼한 에우스타키아)과
헤어져 엄격한 고행을 택하여 수도자로 생활하였다.
그는 투르(Tours)의 마르티누스(Martinus)와
더불어 갈리아에 공동체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 당시 영국에는 이단인 펠라기우스주의가 퍼져
교회가 동요하고 있었다.
영국 주교들의 도움을 요청하자
교황 코일레스티누스 1세(Coelestinus I)는
429년 게르마누스에게 영국으로 가도록 지시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영국으로 가는 도중 후에
성녀가 된 어린 시절의 게노베파(Genovefa)를 만나
신앙 성숙을 위해 노력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는 영국의 이단들을 평정하고, 영국 군대로 하여금
픽트족과 색슨족의 연합 공격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승리는 ‘알렐루야 승리’라고 기록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성 알바누스(Albanus) 무덤
앞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승리의 기쁨을
하느님께 돌렸다.
그는 448년 7월 31일 라벤나(Ravenna)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게르마누스는 여러 세기 동안
투르의 마르티누스 다음으로 가장 사랑받고
공경을 받는 프랑스 성인이다.
말과 행동과 기적의 능력이 뛰어난 성인으로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그를 일컬어
‘갈리아의 기적의 게르마누스’라고 불렀다.


================================


성 칼리메리오(Calimerius)

축일 7월 31일 

그리스 태생의 성 칼리메리우스(또는 칼리메리오)는
교황 성 텔레스포루스(Telesphorus, 1월 5일)에 의해
이탈리아 로마(Rome)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밀라노의 주교가 되어 북이탈리아
포(Po) 강 주변 계곡을 복음화하였다.
그는 콤모두스 황제 때 깊은 우물에 거꾸로 던져져
순교하였다. 그의 유해는 그가 사목하던
밀라노 성당 제단 아래 묻혔다.

 
================================


성 파비오(Fabius)

축일  7월 31일 

성 파비우스(또는 파비오)는
로마의 군인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통치 동안에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 연안
모리타니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우상의 상징물을 지참하는 것을 거부하고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



성 피르모(Firmus)

축일  7월 31일 

히포(Hippo)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는
성 피르무스(또는 피르모)가 그의 이름 때문에
굳건한(firm) 것이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
굳건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신자들의 은신처를 누설하지 않고
가장 끔찍한 고문을 견디어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찬사로 인해
바로니우스(Baronius)는 성 피르무스에 대한
현존하는 전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순교록에 그의 이름을 삽입하였다.


================================


성녀 헬레나(Helen)

축일 7월 31일 

성녀 헬레나(Helena)는 스웨덴의 귀족
베스터괴틀랜드(Vastergotland) 집안 출신으로
남편과 사별하면서부터 가난한 사람과 수도자를
돕는 일에 재산과 시간을 모두 바쳤다.
그러나 그녀는 로마(Rome)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친척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때문에 그녀를 순교자로 공경하는 지방도 있다.
그녀는 1164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
(Alexander 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성가/축일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