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8월1일)

2014. 8. 1. 오전 6:29:47

글자

♡8월 1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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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니고데모, 예수의 제자(1세기경)

축일 : 8월 1일

예루살렘 유대인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고,
산헤드린의 맴버였던 그는 어느날 밤에 예수를
몰래 찾아왔다. 그는 예수를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선생님"으로 인정하며, 영생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
세례에 대하여 담화하였다.
(요한 3장 1절 이하). 또한 그는 예수를 두고
논란을 일삼는 바리사이파와 대제관들에게 대하여
예수를 두둔하는 말을 하였다(요한 7: 50~52).
또한 그는 예수님 시신에 바르기 위해 몰약에
참향을 섞은 것을 많이 가져왔으며, 아리마태의 요셉과
더불어 예수님을 새 무덤에 모셨다 (요한 19:39~42).
신약에서는 직접 언급한 바는 없으나 그도 역시
예수의 제자가 되었으리라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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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Petrus),

성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또는 도미시아노),

성 루푸스(Rufus),

성 메난데르(Menander),

성 키릴루스(Cyrillus)

성녀 아퀼라(Aquila)

축일 8월 1일 

성 베드로(Petrus),
성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또는 도미시아노),
성 루푸스(Rufus), 성 메난데르(Menander),
성 키릴루스(Cyrillus)와 성녀 아퀼라(Aquila)는
소아시아 지방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에 대한 다른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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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레온시오(Leontius)

성 알렉산데르(Alexander),

성 아티우스(Attius)

6명의 동료들

축일 8월 1일 

성 레온티우스(또는 레온시오),
성 알렉산데르(Alexander),
성 아티우스(Attius)와 다른 6명의 동료들은
소아시아 팜필리아(Pamphylia) 지방 베르게(Perga)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동안에
이교 여신의 신상을 파괴한 이유로
플라비아누스의 명령에 의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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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보누스(Bonus)

성 파우스투스(Faustus),

성 마우로(Maurus)

12명의 그리스도인들

축일 8월 1일 

성 보누스(Bonus) 신부, 성 파우스투스(Faustus),
성 마우루스(또는 마우로)를 비롯한 12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이탈리아의 로마(Rome)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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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로(Verus)

축일 8월 1일 

성 베루스(또는 베로)는 프랑스 비엔의 주교로서
314년에 아리스(Aries) 시노드에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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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피데스(신덕)(Fides),

성녀 스페스(망덕)(Spes)

성녀 카리타스(애덕)(Caritas)

축일 8월 1일 

하느님의 지혜인 피데스(Fides), 스페스 그리고
카리타스(Caritas) 공경을 설명하는 동방의
한 은유에 따르면, 이들은 로마(Rome)의 과부
성녀 소피아(Sophia, 9월 30일)의 세 딸의
실제 이름이라고 한다.
이 딸들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순교하였다는 것이다(로마의 순교록).
순교 당시 피데스(신덕)는 12세로서 매를
심히 맞았으나 큰 상처를 입지 않자,
끓는 물을 부었고 그래도 별 효과가 없자
참수하였다.
그리고 스페스(망덕)는 10세였고,
카리타스(애덕)는 9세였는데, 용광로에 집어넣어도
죽지를 않아서 목을 베었다.
또 그들의 어머니 성녀 소피아(지혜)는그들의
무덤에서 기도하다가 3일 후에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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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알메다(Almedha)

축일 8월 1일 

웨일스(Wales) 브레콘의 성녀 알메다는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늘 기도와 고행 중에
살았는데, 그녀의 가족들이 어느 젊은 왕자와
결혼시키려고 강압하자 하는 수 없이 란디우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여기서 그녀는 주민들의 냉대를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레크펜으로 가서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등 갖은 고생을 다 하던 중
슬위치 텀프라는 곳의 나무속에 피신처를
마련하였다.
그녀는 여기에 움막을 짓고 은수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얼마 후 그녀를 찾아 나선 왕자가
그녀의 움막에 나타났다.
그녀는 언덕으로 도망을 가다가 붙잡혀 그의 칼을
맞고 순교하였다. 알레다(Aled)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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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퐁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Alphonsus Mary de Liguori)

축일 8월 1일 

성 알폰수스 마리아 데 리구오리
(Alfonsus Maria de Liguori)는 1696년 9월 27일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 근교 마리아넬라
(Marianella)에서 주세페(Giuseppe de Liguori)와
안나 카발리에리(Anna Cavalieri) 사이의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나폴리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다.
아버지 주세페는 나폴리 공국의 해군이었으며
어머니는 트로야(Troja)의 카발리에리 주교의
동생으로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였던 알폰수스는 불과 16세
나이로 나폴리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아
변호사가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변호사로 일하면서 결코
패소하지 않는 변호사로 널리 알려졌다.
1723년 토스카나(Toscana) 대공과 어떤 공작 사이에
큰 돈일 걸린 소송이 벌어졌는데, 이 소송에
참여했던 알폰소는 어떤 중요한 문서를 잘못
해석하고 서명한 사실로 패소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변호사로서의 자격이
상실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며 기도하던 중
1723년 8월 28일 불치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찾아갔다가 신비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알폰수스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1726년 12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2년 정도 나폴리 근방을 돌며 선교사로
봉직하였고, 1729년에는 나폴리의 중국
신학원에서 활동했다.

1730년 친구인 토마스 팔코이아(Thomas Falcoia)가
스칼라(Scala) 지방에 있는 카스텔라마레 교구의
주교가 되자, 알폰수스는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스칼라에서 수녀들의 피정을 지도할 때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를 만났고, 새로운 수도회에
대한 그녀의 환시를 확신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팔코이아 주교가 로마(Rome)에서 경험한 환시와
일치하였다.
그래서 1731년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가 환시에서
받은 규칙을 따라 여자 구속주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스칼라로 이주하여 팔코이아 주교,
파가노 신부와 다른 몇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남자 구속주회(Redemptoris)를 설립하였다.

이 회는 공동생활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주님의 말씀 전파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성직 수도회였다.
본부는 스칼라 수녀회의 숙박소를 이용하였으며
명예원장으로 팔코이아 주교를 모셨다.
그런데 초창기에 중대한 알력이 일어나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가 떠나가서 포치아에 따로
수도원을 설립하고, 또 1733년에는
쿠르시오(Curtius)라는 수도자 한 명만 남고
모든 회원들이 다른 회를 설립하여 떠났다.

하지만 알폰수스는 흔들리지 않고 회를 지키면서
다른 회원들을 맞아 1734년에
빌라 데글리 스키아비에서 두 번째 창립을
맞이하였다. 그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수도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마침내 구속주회는 1749년 2월 25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며, 같은 해에 열린 총회에서 수도회
종신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다음 해에 여자 구속주회도 교황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그런데 왕권주의를 내세워 수도회들을
적대시하던 왕과 타누치(Tanucci) 후작 때문에
나폴리 왕국의 인가를 받지 못하였다.
1752년 왕은 교황령과 시칠리아(Sicilia)만을
사목 활동 영역으로 한정한다는 조건으로 인가를
해주었다.

이 기간 동안 알폰수스는 인근 지역을 다니면서
설교 사도직을 열렬히 수행하였으며 저술 활동에도
매진하였다.
그러던 중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는
1762년 6월 20일 산타 아가타 데이 고티
(Santa Agata dei Goti)라는 나폴리의 한 작은
교구장 주교로 알폰수스를 임명하였다.
그는 이 교구를 돌보는 13년 동안 성직자, 수도원
그리고 전 교구의 혁신을 계획하였으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자선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열정적 활동으로 중병을 얻었고,
또 죽을 때까지 괴롭혀온 류머티즘으로 마비될 때도
많았기 때문에 1776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의
허락을 받고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주교직을 사임한 후에도 그는 구속주회의 정립과
운영을 위해 주력하였다.
하지만 나폴리 왕국의 당국자들 때문에 많은
괴로움을 겪었다.

예수회가 박해를 받은 이후 구속주회도 위험에
처하자, 알폰소는 중개자를 내세워 당국자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왕이 승인한 규칙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가 수도회를 인가한 교서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므로 늘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교회와 나폴리 왕국 사이의 갈등 상황에서 교황령
외의 지역에 있던 공동체들이 알폰수스의 관할권을
벗어나게 됨으로써 회는 두 계열로 분열되었다.
알폰수스는 둘로 분열된 수도회가 다시 합쳐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1787년 8월 1일 살레르노
(Salerno)에서 사망하였다.

구속주회는 알폰수스가 사망한 직후 다시 하나로
재건되어 발전하였다.
알폰수스는 윤리, 신학, 수학에 관한 놀라운
저서들을 남겼다.
특히 그의 윤리신학은 얀세니즘(Jansenism)과
반성직주의를 극복하면서 올바른 윤리관을 정립한
저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의 신심서에서 가장 돋보이는 책은
“마리아의 영광”이다.
그는 1816년 9월 15일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871년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그 후 1839년 5월 26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
(Gregorius XV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50년 4월 26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고해사제들과 윤리 신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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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가 언명하였듯이
윤리 신학은 성서로써 더욱 더 철두
철미해져야 하며, 돈독한 그리스도교적 사명의
존귀함을 드러내고 온 인류에게 자비를 베풀
의무를 보여 주어야 한다.1950년, 비오 12세가
윤리 신학의 수호자로 선포한 알퐁소는
그 성명에 기뻐했을 것이다. 그는 생전에
얀센파의 엄격함에 맞서 윤리 신학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그가 죽은 후 1세기 동안 60회나 간행된 그의
윤리 신학서는 사제와 고해자들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만일
어떤 율법주의와 최소 한도주의가 윤리 신학에 슬며시
끼어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관용과 온건을 지닌
알퐁소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나폴리 대학에서 그는 16세의 나이에 만장 일치로
민법과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곧
사도직 활동을 위해 법률 활동을 포기했다.
사제로 임명되어 신자들의 고해를 들으면서,
그리스도인들의 단체를 만들어 교구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는 1732년, 레뎀토리스트 수도회를 설립했다.
이 수도히는 공동생활을 하는 사제와 수사들로
이루어져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헌신하고,
주로 시골 농부들을 위해 대중 선교 활동을 한다.
얼마 후 그는 한 사람의 평수사를 제외하고는
그의 모든 첫 동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는데
이것은 장차 일어날 일의 한 징조였다. 그러나
그 수도회는 해체되지 않은 채 계속되어
17년 후에는 비록 문제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알퐁소의 위대한 사목적 개혁은 성직자와
고해 성사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 당시 성직자와 고해 성사 제도에,
현란한 미사여구 대신에 단순함을, 얀센파의
엄격주의 대신에 친절함을 가져온 개혁이었다.
26년간 교구 전지역에서 설교하고,
나폴리 왕국을 두루 여행했다는 것과 함께
그는 작가로서도 열정을 불태웠다. 그는 주교가
되는 것을 사양하고자 무척 애를 썼으나
66세에 주교가 되었으며,그 후 즉시 교구내에
철저한 개혁을 단행했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가장 큰 슬픔을 맛보았다.
그것은 예수회의 해산후에도 자랑스럽게
계속되어 온 레뎀토리스트회가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회칙을 인정받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알퐁소는 그들이 공동 재산을 가지지 않는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한 국가 관리가
레뎀토리스트회의 고위 장상과 공모하여
회칙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늙은 데다가
다리까지 저는 보기 훙한 모습의 알퐁소는
자기가 배신당했다는 것도 모르고 그 문서에
서명했다. 그때에 교황은 교황령에 있는
레뎀토리스트회 회원들을 교황 관할권내에
두는 한편 나폴리에 있는 사람들애 대한
알퐁소의 권한을 박탈하였다.
레뎀토리스트회의 지부들이 통합된것은
알퐁소가 죽은 후였다.

71세에 그는 불치의 병인 류머티즘에 걸려
목이 구부러지는 고통을 당했다.
목을 조금 바로 하게는 되었지만 목이 굽어
있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그의 턱이
가슴을 눌러 상처가 날정도였다.
그는 마지막 고통의 18개월을 망설임,
공포,모든 미덕과 신앙 계율에 위배되는
유혹에 시달렸으며, 틈틈이 무아경에
빠졌을 때만 빛과 위안을 얻었다.

알퐁소는 뛰어난 윤리 신학자로 잘 알려진
사람이지만 또한 교회 신학과 교리 신학
부문에서도 훌륭한 저서를 남겼다.
그의 '마리아의 영광'은 걸작 중의 하나이며,
'축복받은 성찬에의 초대'는 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40판이나 간행되었다.

설명 ; 성알퐁소는 추상적인 것보다
구체적인 것을 더 잘 다룬 실제적인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일생은, 그리스도교적
삶이 문제와 고통, 오해와 실패가
소용돌이치는 것임을 인정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으로
'실제적인'본보기이다. 그는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해 줄곧 친밀감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인이 된 것이다.

인용 ; 한번은 알퐁소의 설교가 끝난 후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잊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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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텔볼도(Ethelwold)

축일 8월 1일 

영국 잉글랜드(England) 윈체스터 출신인
성 에텔볼두스(Ethelwoldus, 또는 에텔볼도)는
성 알페기우스(Alphegius)로부터 서품되었고,
944년에 성 둔스타누스(Dunstanus)의 지도하에
글래스턴베리(Glastonbury) 수도원의 베네딕토
회원이 되었다.
후일 그는 버크셔(Berkshire)의 애빙던(Abingdon)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성 둔스타누스와
성 오스왈두스(Oswaldus)와 더불어 잉글랜드에
수도원을 재건한 주요 인물로 꼽힌다.
또한 그는 963년에 윈체스터의 주교로 축성되어
주교좌의 규율을 정비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으며,
교구 내에서 수많은 수도원을 재건함으로써
‘수도자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공경을 받는다.
또한 그는 여러 편의 신학 논문을 저술하였고,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규칙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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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유스티노(Justin)

축일 8월 1일 

어린 아이였던 성 유스티누스(Justinus, 또는 유스티노)는
프랑스 파리(Paris) 교구의 루브르(Louvre)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아마도 보베(Beauvais)의 성 유스티누스와
동일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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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웰본(Thomas Welbourne)

성 윌리엄 브라운(William Brown)

축일 8월 1일 

토마스 웰본과 윌리엄 브라운(William Brown)에 대한
기록은 극히 미미하다.
성 토마스 웰본은 영국 잉글랜드(England) 요크셔의
허턴 부셸(Hutton Bushel) 태생의 교사로서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고, 윌리엄 브라운은 노샘프턴셔
(Northamptonshire) 출신이다.
이들은 가톨릭 신자라는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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