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7월30일)

2014. 7. 30. 오전 7:18:59

글자

♡7월 30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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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막시마(Maxima)

성녀 도나틸라(Donatilla)

성녀 세쿤다(Secunda)

축일 7월 30일 

성녀 막시마(Maxima)와 성녀 도나틸라 그리고
성녀 세쿤다(Secunda)는 막시미누스 황제 때에
북아프리카의 테부르바(Tebourba)에서 순교하였다.
성녀 세쿤다는 겨우 12살의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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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레오폴도 만딕(Leopold Mandic)

축일 7월 30일 

1866년 5월 12일 달마티아(Dalmatia)의
카스텔누오보에서 태어난 성 레오폴두스 만딕
(Leopoldus Mandic, 또는 레오폴도)은 매우 작은 키에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겸손함, 침착함, 하느님의
현존 앞에 자신의 전부를 내놓을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지녔었다.
그는 우디네(Udine)의 카푸친회에 입회하여 1884년
수련기를 보내고, 이탈리아의 파도바(Padova)와
베네치아(Venezia)에서 수학한 후 1890년 사제품을
받으며 레오폴두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동유럽에서 선교를 하고자 했던 그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베네치아 지방에서 소임을 받았으며
파도바에서 40년 동안 살게 되었다.
인종과 종교가 다른 지역에서 성장한 그는 교회의
완벽한 일치로의 재건을 꿈꾸고 노력했다.
유명한 아르스(Ars)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Joannes Maria Vianney)처럼 성 레오폴두스의 특별한
은사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었다. 자신을
‘새장에 갇힌 새’로 표현했듯이 그는 고해신부와
영적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1962년 성 레오폴두스의 복자품에 관련된 결의문에서
라라오나(Larraona)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분의 일상은 이러했다. 아침 일찍 미사를 지낸 후
고해소에 하루 종일 앉아 고백을 들었다.
어떠한 불만도 없이 40년 동안 이 소임을 충실히 해냈다.”

그는 용서와 평화를 증진하는 중심이 되었고,
그의 삶은 화해의 성사(고해성사)의 중요성과
이 성사를 통해 지상 여정에서 얻게 되는 안식의
중요성에 대해 사제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다.
그의 시복 시성은 단기간에 추진되었다.
당시 교회법은 후보자가 복자품에 오르기 전에
50년이 경과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지만,
성 레오폴두스의 성덕이 너무도 명백해서 30년이 조금 지난
197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이어 1983년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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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피노(Rufinus)

축일 7월 30일 

성 루피누스(또는 루피노)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초기 순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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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드워드 포웰(Edward Powell)

성 리카르도 페터스톤(Richard Fetherstone)

축일 7월 30일 

에드워드 포웰(Edward Powell)은 웨일스(Wales) 출신으로
옥스퍼드의 오리얼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1506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523년 그는 루터를 반박하는 글을 썼는데,
이 글은 옥스퍼드 대학뿐만 아니라 솔즈베리(Salisbury)의
주교로부터 큰 칭찬을 받을 만큼 비중 있는 논문이었다.
이러한 그의 명성은 높았기 때문에 그는 국왕의 결혼
무효소송 문제에 있어서 카타리나 측의 법률가로 뽑혔다.
1529년에 열린 재판정에서 그는 왕에게 반박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였고 이를 책으로 펴냈다.
그의 놀라운 이론과 웅변은 헨리 8세 측의 미움을
샀으며, 1534년에 도체스터(Dorchester) 감옥에 갇혔다가
런던탑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거의 6년 동안이나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국왕의
수장령을 끝까지 반대하여 순교하였다.

리카르두스 페터스톤(Richardus Fetherstone,
또는 리카르도)의 생애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는 교구사제로서 케임브리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박식한 사제였다.
그의 뛰어난 신심과 학식 때문에 그는 메리 공주의
라틴어 가정교사가 되었다.
1529년에 열린 재판정에서 그도 역시 카타리나 왕비의
결혼은 정당하다는 편에 투표함으로써,
요한 피셔(John Fisher) 추기경과 에드워드 포웰 박사
및 다른 동료들과 함께 런던탑에 갇혔다가 순교하였다.
그는 1886년 레오 13세(Leo XIII) 교황이 시복한
영국 순교자 54명 중의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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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만네스(Mannes)

축일 7월 30일 

펠릭스 데 구즈만과 아자의 성녀 요안나(Joanna)의
맏이는 안토니우스(Antonius)이고, 둘째가 만네스
그리고 막내는 설교자회의 설립자인
성 도미니코(Dominicus)이다.
만네스는 칼라루에가에서 태어났고, 1170년에 도미니코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다.
그는 자기 동생인 도미니코의 사업에 관여하여
서원하였고, 도미니코에 의해 6명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그는 파리(Paris)로 가서 최초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 후 그는 프루일에서 수녀들을 지도하였다.
성 도미니코도 자기 형의 높은 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항상 관상생활을 하였고 또 마드리드 수녀들의
지도자로서는 최고 적임자였다.
그는 동생의 사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가미엘에 있는 성 베드로(Petrus)의 시토 성당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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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Peter)

축일 7월 30일 

베드로(Petrus)는 이탈리아 안코나(Ancona)의 마르카
지방인 모글리아노에서 태어나 페루자(Perugia)
대학에서 3년간 법률을 공부하였다.
1467년 그는 우연히 프란치스코회 사제인 도미니코
레오니사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았다.
그 후 프란치스코 회원이 된 베드로는
성 야고보 델라 마르카와 함께 설교단을 구성했는데,
그는 놀라운 설교력을 보임으로써 카메리노 공작의
자문역까지 맡았다.
성 베드로는 바라니, 마르슈 등지의 관구장을 역임했다.
그는 예수님의 성명을 수차례나 부르다가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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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크리솔로고(Peter Chrysologus)

축일 7월 30일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의 이몰라(Imola) 출신인
성 베드로 크리솔로구스(Petrus Chrysologus, 또는
베드로 크리솔로고)는 이몰라의 주교 코르넬리우스
(Cornelius)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부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교황 성 식스투스 3세(Sixtus III)에 의하여
라벤나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이 같은 엉뚱한 일은
교황이 환시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결과 베드로는 규율이 극도로 이완된 교구를
크게 일신하였음으로 교황의 환시는 증명되었다.

그는 자선활동으로 매우 유명하였고, 또 뛰어난
설교를 하였으므로 ‘크리솔로고’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설교에 감명을 받은 황녀 갈라 플라시디아는
그를 여러 방면으로 도왔다.
또한 그는 에우티케스(Eutyches)를 권고하여
콘스탄티노플 시노드(Synod of Constantinople)의
파문 결정에 대하여 자신을 변호하지 않게 하였으며,
오세르(Auxerre)의 성 게르마누스(Germanus)의
장례식을 집전하였다.
그는 1729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하여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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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압돈(Abdon)

성 센넨(Sennen)

축일 7월 30일 

성 압돈(Abdon)과 센넨 두 사람은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치하에서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했던 페르시아
사람들이다. 그들은 동료들을 위로 격려하였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모아 장례 지내는 등 힘든 일을
많이 하였다. 그들이 로마(Rome)로 압송되어 이방의
신 앞에 희생을 드리라는 명을 거절하다가 야수들의
밥이 되었다.
이 야수들은 사자나 곰이 아닌 바로 검투사들이었다.
로마의 신자들은 이 페르시아인들을 이방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에 이들의
유해를 티베르 강가 포르토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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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시몬(Simon)

축일 7월 30일 

폴란드의 크라쿠프(Krakow)에서 멀지 않는 리프닉차
출신인 시몬은 그 도시의 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453년에 성 요한 카피스트라노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그의 첫 제자가 되었다.
그래서 시몬은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어 그의 스승과
함께 설교하면서 활동하였다.
성 시몬은 프란치스코회 설교자들이 큰 활약을 하던
시기의 주요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성 베르나르디노와 함께 ‘예수 성명’
신심을 보급하는데 주력하였다.
크라쿠프에 페스트가 유행하여 큰 재난을 당할 때
그는 정열적으로 활동하다가 자신도 병에 걸려
운명하였다. 그는 1685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
(Innocent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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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르칸젤로(Archangelo)

축일 7월 30일 

시칠리아(Sicilia)의 플라첸티니 가(家) 후손인
아르칸젤루스(또는 아르칸젤로)는 어릴 때부터
신심이 두터웠으므로, 청년이 되었을 때부터
동굴에 살면서 은수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자주 그를 찾아와서 충고를 구하였지만,
그는 놀라운 인내심으로 그들을 따뜻이 영접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사람들이 가장 깊이 감명을
받은 것은 그의 겸손 때문이었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가 시칠리아의
모든 은수자에게 명하여 세속으로 나가든지 아니면
회수도자가 되라고 명했을 때, 그는 파르마(Parma)로
가서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다.
성 아르칸젤루스는 성 프란치스코의 초기 규칙을
받아들였고, 성 마태오 지를라니를 이어 알카모의
원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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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버라드 한스(Everard Hanse)

축일 7월 30일 

에버라드 한스는 영국 잉글랜드(England) 노샘프턴셔
(Northamptonshire)의 어느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에 선교사가
되어 가장 훌륭한 삶을 전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대중 설교자가 되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1579년에 프랑스의 랭스(Reims)로부터 영국 선교단으로
파견된 동생 윌리엄(William)의 개종과 호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나, 때마침 중병을 앓게 되었다.
그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늘이 그리고 그의 마음에는
이상한 두려움으로 가득하였다.
한편으로는 그의 동생이 보여주는 뛰어난 표양과 말이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기회를
만들어 마침내 스스로 굴복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가 영국 교회로부터 은전 받기를 거절함과 동시에
그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하였다.
그 후 그는 랭스에서 9개월 동안 공부하였는데,
특히 윤리신학에 뛰어난 적성을 보였다.
1581년 3월 25일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4월 24일에는
에반스 둑켓으로 추정되는 다른 사제와 함께 영국
선교사로 출발하였다.

그는 겨우 3개월 동안 선교활동을 하다가
가톨릭 사제임이 발각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난 뒤 동생에게 편지를 썼는데,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는 말이 가장 돋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부모를 기억하고, 자신이 빚진 돈을 갚아 주며
또 빌린 책을 돌려주라는 부탁이 있었고,
죽는 날을 기다리면서 그날은 ‘행복한 날’이라고
하였다. 그는 런던의 사형 집행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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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올라부스 스콧트코눙그
(Olavus Skottkonung, 또는 올라보)

축일 7월 30일 

정복자 에릭의 아들인 성 올라부스 스콧트코눙그
(Olavus Skottkonung, 또는 올라보)는 993년에 스웨덴의
왕위에 올랐고, 덴마크의 스벤(Svend) 왕과 에릭과
더불어 성 지그프리드(Sigfrid)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였다. 그 후 그는 스웨덴의 그리스도교화를 위하여
크게 활약하다가 이교 신들에 대한 희생 금지로 인한
폭동으로 인하여 스톡홀름(Stockholm)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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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소레트(John Soreth)

축일 7월 30일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 출신인 요한 소레트
(Joannes Soreth)는 16세 때에 카르멜 회원이 되었다.
사제로 서품된 후 그는 파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2년 후에는 프랑스 관구의 원장으로
활약하다가 1451년에 총장으로 피선되었다.
그 당시의 카르멜회는 일대 개혁이 필요했는데
그 주요 이유는 ‘서방 대이교’의 조짐 때문이었다.
그는 수도회의 개혁을 위하여 일생동안 헌신하였다.
또한 요한은 성녀 테레사(Teresia)의 선구자였다.
모든 개혁자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심지어는 착한
사람들로부터도 심한 반대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는 회칙과 회헌을 개정하고 잘 준수되는지를
엄격하게 지도하였으며, 또 카르멜 수녀회의
수도원 설립에도 큰 책임을 스스로 떠맡았다.

그의 개혁 의지는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성덕과 능력은 교황 칼리스투스 3세(Callistus III)를
감복시켜 그를 주교와 추기경으로 축성하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를 사양하고 자신의
임무만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카르멜 3회의 설립도 그의 공로이다.
1455년 죄에주에서 그는 3회원을 위한 짧은 회칙을
썼는데, 이것이 맨발의 카르멜 3회 회칙의 근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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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우르소(Ursus)

축일 7월 30일 

성 우르수스(또는 우르소)는 프랑스 오세르의
성 아마토르(Amator, 5월 1일) 성당의 은수자였다.
그는 그의 기도로써 도시를 화재에서 구한 후
75세의 나이에 오세르의 주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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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율리타(Julitta)

축일 7월 30일 

성녀 율리타는 소아시아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카이사레아에 살던 과부로 농토와 소 그리고 노예를
비롯하여 재산을 꽤 많이 소유하고 살았다.
과부이자 부유한 그녀를 탐하던 그 지방의 어느
권력자는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녀를
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고발하였다.
그녀는 제우스 신전에 희생물을 바치라는 명을 받고
거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재산은 어느 방문객에게 넘어갔다.
내 몸을 토막 내더라도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말은
할 수 없다. 만일 그대가 이 땅에서 나의 조그마한
몸과 재산을 빼앗는다면, 천국에서는 더 큰 것을
잃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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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타트윈(Tatwin)

축일 7월 30일 

잉글랜드 서부 우스터셔(Worcestershire)의
브레든(Bredon)의 수도자인 성 타트윈은
성 베다(Beda, 5월 25일)에 의해 놀랄 만큼
신중하고 헌신적이며 박식한 분으로 묘사되었다.
머시아(Mercia)의 왕 에텔발드(Ethelbald)의
추천장에 보면, 성 타트윈은 731년 성 베르트발드
(Berthwald, 1월 9일)를 계승해서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고 733년에 팔리움을 받았다.
그런 후 그는 링컨셔(Lincolnshire)와 서식스(Sussex)
서부 지역에 있는 도시의 주교들을 축성하였다.
또한 그는 다양한 주제에 관한 몇 권의 저서를 남겼다.

성 타트윈은 734년 7월 30일 사망하여 캔터베리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성당 수도원에
묻혔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그에 대한 공경이
받아들여졌다. 그의 유해는 1091년 성당의 확장
공사 때 이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성 베다가 묘사한 것처럼 그를
칭송하는 글이 올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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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벨(Thomas Abel)

축일 7월 30일 

토마스 아벨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 신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사제로 서품되었고, 헨리 8세의
아내 아라곤의 카타리나(Catharina of Aragun)의
전속 사제로 임명되었다.
헨리 8세와 카타리나의 결혼을 허가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의 칙서를 안전하게
보전해 주도록 요청하는 카타리나의 친서를 휴대하고
찰스 5세를 찾아간 그는, 왕비가 왕의 강압에 못 이겨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고 아무런
칙서도 없이 영국으로 돌아왔다.

헨리 8세는 그의 행동을 미심쩍게 여겨 그를
괴롭히다가 카타리나와 자신의 결혼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자신의 노력에 반대하는 토마스의
“움직일 수 없는 진리”(Invicta Veritas)가 간행되자
그를 체포하여 1532년 런던탑에 가두었다.
다음 해에 그는 석방되었지만 1533년 켄트(Kent)의
홀리 메이드 사건으로 재차 구금되었다.
6년간의 옥살이 끝에 그는 가출옥 허가를 받아
석방되었다. 그러나 곧 다시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되었다.

아벨은 왕의 수장령을 반대하는 국사범으로 낙인찍혀
1540년 7월 30일 에드워드 포웰(Edward Powell)과
리카르두스 페터스톤(Richard Fetherstone)과 함께
스미스필드(Smithfield)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그는 1886년 레오 13세(Leo XIII) 교황이 시복한
영국 순교자 54명 중의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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