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례강학-18: 모방

2014. 8. 29. 오후 5: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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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모방 신부의 입국과 사목 활동

1) 모방 신부의 생애와 입국의 과정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은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서북부 지역인 노르망디 지방 칼바도스의 바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은 바시의 중심가에서 약2km 떨어져 있는 보티렐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모방의 아버지는 샤를 모방이었으며, 어머니는 카타리나 뒤슈맹이었다. 아버지는 농부이었고, 어머니는 모방이 14세 되던 1817년 사망하였고, 아버지는 모방이 순교한 3년 뒤인 1842년 사망하였다. 모방은 태어난 날 즉시 바시 성당에서 피에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린 시절을 보티렐에서 보낸 모방은 교구 성직자의 제안으로 고향을 떠나 비르에 가서 중등교육 과정인 콜레쥬에 입학하였다. 몇 년 후 중등교육을 이수한 모방은 바이외 교구에서 운영하던 대신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리하여 1827년 12월 22일 삭발례를 받았으며, 이듬해 5월 31일에 차부제품을 받았다. 1829년 6월 13일에 사제서품을 받았고, 곧 비르의 북서쪽에 위치한 인구 103명의 아주 작은 시골 마을 데제르의 보좌신부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이곳에 1년밖에 머무르지 않았는데, 선교의 소명을 느끼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주교의 허락을 받은 모방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를 요청하여, 1831년 11월 18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3개월 남짓 보내고,1832년 3월 5일 파리를 출발하였다. 동료 샤리에 신부와 함께 르 아브르 항구에 도착하여 3월 27일 배를 다고 마카오로 떠났다. 6개월 뒤 1832년 9월 11일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서 12월 20일까지 머물렀다. 그 곳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있던 중 이제 막 설립된 조선교회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자신의 양 떼를 돌보러 가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 1832년 12월 20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때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자신을 조선으로 데려가 달라 요청하여, 주교는 15개월 뒤 사천 대목구의 폰타나 주교로부터 긍정적 답신을 받았다.브뤼기에르 주교의 허락을 받은 모방은 복건 대목구의 흥화 사목구역에 머물다가 1833년 12월 4일 출발하여 1834년 4월 1일 북경에 도착하여, 다시 1834년 6월 8일 서만자로 길을 떠나 7월 초순 도착해서 10월 8일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와 합류하였다. 1835년 10월 7일에 조선으로 잠입을 눈앞에 두고 갑작스럽게 마가자라는 교우촌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사망하여, 라자로회 소속의 중국인 고 신부와 함께 주교의 장례를 치렀다. 뒤늦게 1836년 1월 12일 자정에 중국측 국경 지대인 이른바 ‘변문’을 출발한 그는 사흘 뒤 15일 조선의 수도 한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모방 신부가 조선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브뤼기에르 주교는 주교 자신이 입국하지 못하게 되면 북경교구로부터 독립된 조선 대목구 설정이라는 사건은 무효화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조선 대목구장에게 부여된 특별 권한을 이용하여 자신의 대리자 또는 후임자를 미리 정해 둔다면 대비책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먼저 모방 신부를 대목구장 직무대행으로 임명하여 조선 대목구장에게 부여된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위임한 바 있었다. 이 때문에 브뤼기에르 주교가 사망한 이후에라도 모방 신부가 조선으로 입국하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반포한 조선 대목구 설정은 결정적인 유효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모방 신부가 성공적으로 조선에 들어왔기에 이일은 해결되었다.

 

2) 조선 대목구의 현황 보고

선교사들은 자신의 부임지에 처음 도착하여 선교 지역의 전반적인 상황과 신자 현황을 파악하여 보고하게 된다. 모방 신부 역시 1836년 1월 15일 한양에 도착하여 유 파치피코 신부가 거처하던 집에서 조선 선교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여 조선 사회를 소개하는 글을 1836년 4월 4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들에게 서한으로 써 보냈다. 여기에는 조선의 소개와 조선의 지도와 더불어 종교적 상황에 관해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다섯 가지 우상 숭배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부처의 우상 숭배(불교), 둘째 공자 우상 숭배(유교), 셋째 노자 우상 숭배(도교), 넷째 야황(yahoang) 우상 숭배(확실히 알 수는 없다. 아마 무속, 산신제 같은 민간신앙으로 추측), 마지막으로 조상 숭배이다. 모방 신부가 가장 주목한 것은 역시 조상 제사 문제로, 이것은 이미 몇 세기 동안 ‘중국 의례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천주교 선교 단체들 사이에서 격렬하게 진행된 바 있다.

한편 입국 직후 조선교회의 상황인 교우촌 현황과 교우들의 숫자를 보고받은 모방 신부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활동할 조선의 언어를 배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자 하였다. 하지만 새로 서양인 신부가 조선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아는 신자들이 모두 성사를 받기 원했기 때문에 조선의 언어를 배울 만한 여유가 없었다. 모방 신부는 조선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나, 그래도 중국어와 한문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는 유 파치피코 신부가 한 것과 같이 통역을 통하여 고해성사를 주는 것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중국어나 한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들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통역을 통하기도 하였지만, 자신이 빨리 조선어를 습득하여 직접 고해성사를 베풀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1836년 12월까지 모방 신부는 서울, 경기도, 충청도등 16곳 내지 17곳의 교우촌을 방문하였다. 이 순시 중에 어른 213명, 아이 150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어른 110명과 아이 22명에게 보례를 베풀고, 630명 이상의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고, 85건의 혼인성사 집전, 8명 내지 9명에게 종부성사를 주었다. 그는 가능한 곳에는 회장을 세워 주일과 축일에 신자들을 모으고, 이 모임에서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고, 교리문답과 복음 성경과 성인 전기등을 몇 대목 읽은 다음, 대개는 마을에서 가장 능력 있고 학식 있는 신자인 회장이 낭독한 대목을 풀이 하였다.

모방 신부는 입국 초기부터 유 파치피코 신부와 갈등이 있었다. 북경에 있던 남경 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가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방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였고, 이 방해 책동에는 유 파치피코 신부도 어느정도 연루되어 있다고 보았다. 유 파치피코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조선으로 들어오기 어려우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뜻을 담은 편지를 보내고, 조선인 신자들을 선동하여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을 거절하도록 만들었다고 여겼다. 포교 성성 직할의 선교 단체인 파리 외방전교회와 동양 선교에서 우선권을 행사하던 포르투갈 선교사들 사이의 반목이 모방 신부와 유 파치피코 신부를 통해 재현된 것이다. 마침내 모방 신부는 유 파치피코 신부의 선교 방식과 행실을 문제 삼아 포교성성에 제소 하였고,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위임받은 총대리의 자격으로 유 파치피코 신부를 중국으로 1836년 연말에 돌려보냈다.

 

3) 신학생 선발과 해외 파견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첫해에 이룬 가장 중요한 공헌은 바로 장차 조선교회를 이끌어 갈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신학생들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파견한 것이다. 그는 1836년 조선 신학생들을 선발하였는데, 먼저 2월 6일 최양업이 도착하였고, 3월말에는 최방제가, 그리고 7월 11일에 김대건이 도착하였다. 정하상과 남이관이 추천한 최양업, 최방제와 달리, 김대건은 현재 경기도 용인시에 소재한 골배마실에 살면서 1836년 4월 인근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 후보로 선발 되었다. 이들은 한양에서 몇 달동안 간단한 라틴어를 모방 신부에게 배운 다음, 1836년 연말 유 파치피코 신부와 4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북경으로 갔다. 모방 신부의 명을 받고 중국으로 간 정하상과 조신철 등은 유 파치피코신부를 배웅하고 신학생들을 맡긴 후에 조선으로 돌아오다가 국경지대인 책문에서 또 한명의 선교사를 맞이하여 조선으로 안내 하였는데, 그가 바로 두 번째로 조선입국에 성공한 쟈크 오노레 샤스탕 신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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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회사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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