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교회재건과 정해박해
제1절 목자없는 교회:교우촌의 형성과 확산
1. 교유촌의 형성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다른 지방으로 유랑하게 되면서 새로운 신앙공동체인 교우촌이 형성.
교우촌이 형성된 시기는 신해박해(1791년) 무렵으로 추정.
교우촌이 주로 형성된 지역은 충청도 서부, 전라도 북부, 경기도 남부의 산간 지역. 경상도(북부) 강원도(남부) 충청도(북부) 지역으로 교우촌이 확산.
신유박해를 계기로 천주교 신앙은 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감. 박해시대 천주교회가 이어지는 구체적 신앙의 현장이자 터전이 됨.
2. 교우촌의 확산과 변화
원주 배론 지역: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부터지만, 교회측 기록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부터. 옹기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배론 교우촌도 파괴. 장주기가 정착하면서 교우촌이 다시 형성됨. 1855년 메스트르 신분님이 성 요셉 신학교 설립하는 등 한국 교회사에 주요한 위치를 차지.
미리내:미리내는 충청도에서 피난해 온 신자들로 이루어짐. 일찍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던 지역이었기에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이곳으로 이장되는 일도 가능.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선교사들의 피신처로 한국말을 배우는 장소. 병인박해 무렵 한때 폐허가 되었지만 그뒤 재건되어 교세가 커짐.
청주 배티:1820~1830년대 무렵 교우촌 형성. 기해박해로 최경환 프란치스코가 순교한 뒤과 4남 최우정이 배티 인근 동골의 친척집에서 성장. 3남 최선정은 목천 서들골에 있는 백부 집에서 자람. 후에 최양업 신부가 1854년 동골, 1857년 불무골에 머물르면서 서한을 작성하기도 함.
연풍지역:신유박해 때 이곳의 신자 체로 유배당한 기록이 나옴.
전주교구가 관할하는 전라북도 지역은 교우촌이 가장 많이 형성된 곳(전라도 공소 563개중 473개가 전라북도에 집중) 1801년 이후 많은 신자들이 옮겨와 살았기 때문. 천호산 기슭에, 대둔산 기슭의 저구리… 등등
*교우촌의 분포는 책 참고하세요.
3. 교우촌의 분포
교우촌은 신유박해 이후 더욱 두드러지게 형성 됨.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에서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지형적으로는 더욱 깊고 험준한 산간지방으로 퍼져나갔다.
교우촌은 순교의 터전이요 그 지역 교회의 중심지였으며, 성직자들에게는 피난처였다.(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공소로 발전하고 본당으로 설정되기도 함)
4. 교우촌에서의 신앙생활
박해시대의 교우촌은 그 지역 신앙활동의 중심지였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그 어려운 고행길을 자처한 사람들인 만큼 교우촌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바탕이 된 것은
1. 교회 서적(성경을 읽고, 기도서와 한역서학서 등을 바탕으로 신앙을 이어 나감. 교회서적이야 말로 신앙의 터전이고 수단이 되었기에 고문 앞에서도 책이 있는 곳을 관가에 알리느니 순교를 택함)
2. 구전에 의한 교리의 학습과 실천(구전으로 교리를 학습하면서 신앙생활은 철저했지만 교리 이해는 미흡한 경향이 있음)
3. 성화와 성물(대표적인 성물로는 묵주와 십자고상이나 성모상)
4. 드문 경우지만 순교자의 자취를 간직하는 것(순교자의 유해나 두발이나 그들이 남기 서적이나 성물을 간직함으로써 순교자의 신심을 본받으려 노력하고 영혼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이어 나감)
5. 공동체(교우촌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지내는 가운데 유지 발전 할 수 있었다. 교우촌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서로 의지할 신자를 찾아서 들어간 곳)
신자들은 모든 것을 잃고 감시와 위협 속에서 귀양살이와도 같이 어려운 삶을 이어 갔지만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다.(조선의 가장 궁벽한 구석에 복음을 알리었던 것) 그들은 서로 위로하고, 도와가며 격려하여 신자의 본분을 새로이 열심으로 다시 지키게 되었다.
5. 교우촌의 일상생활
교우촌의 생활은 신앙만이 아니라 일상생활까지 대부분 회장이 중심이 되어 공동으로 이루어졌으며,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들을 위해 서로 도왔다.
숨어사는 형편이었기에 생활 형편은 가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재물을 노리는 사람들의 밀고와 약탈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핍박 때문에 간신히 마련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주하기도 하였다.
포졸의 습격을 피해 도망가기 위해 지금도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외진 곳에 자리하여 구체적인 자료나 기록을 찾기 어렵고, 신자들의 이동과 더불어 수많은 교우촌이 흔적조차 남지 않은채 사라져 버렸다.
생활이 이러하다보니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주로 하고, 옹기점, 숯막 운영이 생활 수단이 되었다.
천주학쟁이라면 옹기장이를 연상할 정도로 옹기점은 천주교 신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옹기점을 선택한 이유는 먼저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쉬웠고(옹기장이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직업) 신자들의 연락을 도모하기도 적합하고, 큰 밑천이 필요없고 이익이 많이 남는다는 이점에서 땅도 적고 상대적으로 노동력은 많은 교우촌에서 공동 노동을 통해 생업을 이어 갈 수 있는 비교적 수월했던 생활 수단이 옹기장사였다.
교우촌 생활을 통해 신자들에게는 공동체 정신이 피어났고,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힘을 모아야만 했기 때문에 새 신자 가족이 교우촌에 들어오면 그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었다. 신자들은 서로 혼인을 맺었고, 천주교 교리에 입각한 평등의식을 한층 실천하고 의식하게 되었다.
6. 교우촌과 회장(박해시대 막중한 역할을 수행)
‣교우촌의 회장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 천주교회를 이어 갈 수 있도록 발 벗고 나서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신자들을 보호하고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을 이끌어 나갔으며, 이들의 노력은 교회의 저변이 확대되고, 신앙의 바탕이 이어져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최초의 회장은 최인길(이승훈이 박해가 일어나자 회장 2명을 따로 임명 수세권(授洗權)을 부여 함)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후, 회장들은 목자 없는 교회를 이끌어 가면서 한편으로는 성직자 영입운동을 벌임.
‣회장의 역할(어려운 박해시기에 선교사를 돕거나 그들을 대신함)
1. 선교사의 협력자(공소 관리, 공소 순방시 성사 집전의 모든 준비와 진행을 처리)
2. 선교사와 신자 사이의 중개자(선교사들의 지시 사항이나 가르침을 신자들에게 전하고 지도함)
3. 신자들의 대표로서 여러 가지 서아에 대한 신자들의 요청을 선교사에게 알림
4. 성직자를 대신해 예절과 성사를 주관
5. 교리교사이자 교사.(교리를 가르치고 이를 위해 한글도 가르침)
6. 교회에서 운영하는 여러 사업의 실질적인 운영 책임자
‣회장규조(會長規)
신자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노력하고,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병든 사람을 보살피고, 갓난아이들에게 대세(代洗)를 주고, 지방의 경우 신부가 사목 순방을 하면 이와 관련된 모든 준비를하였고 평사시에는 신부를 대신하여 공소의 모든 일을 맡아 이끌었다.
‣선교사가 있을지라도 턱없이 부족한 시절에도 그 공백을 헌신적인 활동으로 이어가는 역할을 함.
‣박해시기를 버텨 낸 교우촌에서 척박한 환경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공동체가 유지 발전될 수 있는 바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