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07일 제2절 교회(敎會)의 재건(再建)과 성직자(聖職者) 청원(請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주문모 신부와 조선교회 지도층 인물들 순교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에서 1801년 신유박해 이르는 동안
조상제사금지문제(祖上祭祀禁止問題 )로 제사금지 까닭을 납득하지 못한
양반층 신자들이 대거 이탈하여
평민층 신자들과 일부 잔류 양반층 신자들이 교회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1. 신자들의 교회 재건
가. 박해 후 신입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의 길로 이끌어 줄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어 붕괴직전의 상태에서
살아남은 신자들이 서로 만나 서로 위로하고 순교장면이나
교훈적인 행적들을 구술하여 기억하기 시작하였다.
나. 감추어두었던 교리서나 성물들을 찾아내고 신자들의 의무를 지키기 시작하였다.
자기보다 더 궁핍한 신자들을 돕고 베풀고 과부와 고아들을 거두어 보호하였다.
교우들 사이에 우애가 깊었고 모든 재산이 공동으로 사용되었다.
학식이 좀 더 높은 신자들은 신입교우들에게 기도문과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다.
냉담한 교우들의 마음을 녹여 신앙으로 복귀시키고 교회서적을 베껴 배포하였다.
재건운동에 참여한 교회재건 1세대
신태보와 그의 사촌 이여진(요한), 권철신의 조카 권기인,
권기인의 친척 권노방, 홍낙민의 아들 홍우송, 조동섬 유스티노등이 있었다.
암묵기에 방황하던 신자들을 깨워 교회 재건운동을 일으킴
교회재건 2세대 1816년 말 이후 재건활동
정하상, 조숙 이경언, 유진길, 조신철 남이관
다. 신유박해 이후 정약용이 마음이 약해져 배교를 했었지만
배교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교회재건에 동참하였다는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 기록이 있으나
구체적인 활동상황이 알려지지 않았다.
라. 신자들은 각자의 영혼이 구원의 은총을 얻으려면, 지금 현재 겪는 온갖 종류의
어려움을 견대내는 힘과 위로를 얻으려면 반드시 성사를 받아야 하고
이 성사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성직자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 1811년의 성직자 영입 시도
1) 이여진의 활동
가. 이여진(?~1830). 순교자. 세례명은 요한.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이종사촌 신태보(申太甫)와 함께 입교,
주문모(周文謨) 신부 입국 후, 성사(聖事)를 받기 위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신부를 만나지 못해 매우 낙담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05년 한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되었으나 신태보가 관헌을 매수, 석방되었다.
그 뒤 정약용(丁若鏞), 홍낙민(洪樂敏)의 아들 홍우송, 신태보 등과
성직자영입운동(聖職者迎入運動)을 전개,
1811년에 이여진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사람(권기인?)과
1813년 두 차례에 걸쳐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편지를 갖고 북경을 왕래하였다.
나. 두통의 서한 - 교황에게 올리는 서한 - 10월 24일(양력 12월 9일)에 씀
, 북경주교에게 보고하는 것 - 11월 3일(양력 12월 18일) 작성
1811년 신미(辛未)년에 쓰여져 신미서한(辛未書翰)이라한다.
'신미년 서한' 으로도 불리는 '동국교우상북경주교서'는 1811년 11월 3일(양력 12월 18일) 제2차 성직자 영입운동에 참여하였던 이여진 요한, 조동섬 유스티노, 권기인 요한, 프란치스코 등에 의해 작성되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권 요한이 교우들을 대표하여 쓴 것으로 생각된다.
다블뤼 주교는 신미년의 편지를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권기인 요한이 썼다고들 말한다,
교황비오 7세에게 보낸 원본은 교황청 포교성성(인류복음화성) 의 고문서고에 보관
북경주교에게 보낸 서한은 필사본과 이탈리아어 번역본이 남아 있다.
다. 교황에게 보낸 서한 (성교종주 외외대성부 聖敎宗主 巍巍大聖父)
교황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면서, 조선교회의 시작과 박해에 대한 내용,
선교사를 입국시킬 수 있는 방법, 조선에 천주교를 공식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방법 기술
특히 책을 통해서 거룩한 교리를 배움(書籍開敎),
1) 첫째 신미년 백서는 초기 교회 암묵기에 조선교회 신자들이
주교와 교황과 하느님께 올린 신앙의 고백서
목자와 지도자를 잃은 죄를 자책하고 통회하며
신유박해 이후 목자를 잃고 겁에 질려 떠도는 참상을 소개하며
간절한 고백과 청원을 하고 있다.
2) 둘째 조선교회 신자들은 선교사의 도움도 세워 놓은
우리 교회에 대한 자아의식에 새롭게 눈을 떠서.
무너진 교회를 소생시키기 위한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깨우침으로 흩어져 있던 신자들이 새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결집될 수 있었고 낙담 무기력 황폐에서 벗어나 교회재건이라는
목표의식을 갖게 되었다.
성 교회가 온 천하에 전파되기는 하였지만
사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不由司鐸傳敎) 다만 책을 통하여 성교회의 도리를 찾아 구한 것
(只憑文書訪道)은 오직 우리나라뿐(唯有我東國)이옵니다. 2권 P.162
3) 밀사파견과 신미년 백서의 전달은 대박해로 단절되어 있던
세계교회와의 유일한 통로인 북경교회와의 연계를 다시 복원시켜
두려움과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갖게 되었고
박해와 순교행적을 대외에 알려 조선교회가 목자도 없이 살아 있음을
로마교황과 중국주재 선교사, 유럽 교계에 알릴 수 있었다.
또한 1817년 1월 4일 두 선교사의 조선을 향한 출발은 (173쪽)
선교사의 선발, 교육, 출국준비등이 6개월 이상 소요됨을 감안할 때
1816년 정하상 바오로의 요청에서가 아니라, 1811년 1813년 권기인 이여진의
두 차례 북경왕래와 백서 전달의 결과라 할 것이다.
4) 신미년 백서는 한국교회 신자들이 교황께 보낸 최초의 편지였다.
종래 북경교회만을 의식했던 우리나라에서 당시 조선 사대사상을
뛰어 넘어야 가능했던 탈 동방서한 이었다.
백서를 입안했고 작성했던 지도자들이, 조선교회의 자생적 탄생을 자각하고
교황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기로 한 이러한 지혜와 용단은 추후에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었고
후일 유진길등이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는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5) 이 시기에 단행된 백서작성과 북경왕래 등 일련의 교회 재건활동은
정하상 다음 세대들이 교회 재건사업을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놓은
선행당계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된다. 정하상 유진길 남이관 등이 수년 후에
유 파치피코, 모방 샤스땅, 엥베르 주교 등 서양 선교사들의 입국을
실현시키는데 교두보로서 중요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
이 선배들의 큰 역할이었다.
서한내용
조선정부에 공식적으로 천주교 선교를 요청하여 당당하고 합법적인 입국이 되도록 요청
교황님과 여러나라 임금님들이 우리나라 임금님께 선물을 푸짐하게 보내 주시고
예를 다하여 정중하게 편지를 써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성교회의 도리를 분명하게 설명하신 다음,
이 나라에 온 것이 결코 나라를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와 사랑으로
사람들을 교회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서한 후반부에 선교사 파견 요청
- 이 편지는 <동국교우상교황서>(보인대학본)에 수록되어 있는 네 편의 편지 가운데 두 번째로 수록된 편지로 가장 많은 분량으로 차지하고 있다. 북경 주교에게 보고한 이 편지에는 1801년의 신유박해 전말과 순교자 약전, 박해 이후의 교회 상황 등에 관한 10년 후의 기록을 담고 있다.
-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서 포르투갈어 역본(SC Cina vol .4, pp.320~335)과 이탈리아어 역본(SC Cina vol. 4, pp.336~354) 을 소장하고 있고, 대만 보인대학 신학원 도서관에 한문 전사본이 있다.
1811년 신미년 교황 성하에게 보낸 조선 교우의 서한(일명 신미년 백서)’과
1813년 두 번째 북경에 가는 밀사 이여진 요한
1824년 교황 성하에게 보낸 서한’
1835년 교황 성하에게 보낸 서한’
로마 교황성하(註: 그레고리오 16세)께 올리는 것이었는데「소주교를 첫 조선교구장으로 임명해주신 것을 감사드리면서 의심 없이 주교를 조선 땅에 모셔 들이겠다」는 다짐의 내용이었다. 강생 후 1천8백35년 1월 19일 북경 남당에서 죄인 유아오스딩, 조가롤로, 김방지거 등 백배상서
3. 시도의 결과
수자 사라이바(Souza-Saraiva) 주교는 중국인 통역들의 도움을 받아
한문으로 되어 있던 서한들을 모두 포르투갈어로 옮긴 다음,
한문 원본과 함께 교황청으로 발송
- 이 서한들은 1814년 8월 리스본 도착하였고 이어서 교황청으로 발송하였다.
교황께 올리는 서한은 유럽으로 건너가서 교황의 손에까지 전달되었다.
중국 교회 상황
1805년 청나라 황제 가경제(嘉慶帝) 통치하에 지도사건
북경의 서당에 있던 이탈리아 맨발의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
아데오다토 신부가 마카오로 보내는 편지 속에
산동성에서 하북성에 이르는 지도를 동봉하였는데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두 나라가 중국의 선교지역 분할에 관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자, 교황청에 해결을 요청하기 위해
보냈으나, 영국 군함에 보내는 것으로 오해한 가경제에 의해 박해를 받음.
로마교황청 상황
가. 1808년 나폴레옹이 로마와 교황청 점령
교황비오7세 나폴레옹 파문 교황령 포기 거부
나폴레옹이 교황납치 1812년 파리부근 퐁텐블로 성에 감금
1814년 반프랑스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하여 교황 비오7세 연금에서 풀려 귀환
나. 교황청에서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부의 마르키니 신부에게 선교사 파견 주선 명령
- 선교사 선발 실패, 유럽 정치적 상황 불안정으로 선교지원금 중단으로 실패
다. 1812년 혹은 1813년에 이여진이 임무를 맡아 북경으로 갔다.
북경교구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성직자 파견 무망
라. 이여진은 오직 개인적인 신앙생활에만 전념,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교우들을 권면하다가
1830년(달레신부 책) 경기도 양지(陽智)에서 사망하였다.
다블뤼 주교 비망기 필사본에 의하면 1833년 사망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의 기록 (가톨릭대사전)
(Mgr.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ee, vol. 4)에 의하면,
이여진은 죽기 전에 자신이 죽으면 가슴에 구멍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과연 사후, 가슴에 5개의 구멍이 생겼다고 한다.
170쪽 권기인의 사후 가슴에 5개의 구멍이 났다고 함
권기인은 1814년 3월에 47세로 사망
1815년 을해박해로 대구, 원주지역 신자들 탄압
3. 1824년의 성직자 영입 시도
1)정하상의 활동
가. 1816년 21세에 동지사 일행을 따라 북경행
남당 주교좌 성당 총대리 리베이로 누네스 신부 만남
나. 수자 사라이바 주교 (173쪽)
남경 출신의 플로리아노(43세)신부와 요한(29세) 신부 조선으로 파견결정
두 신부 1817년 1월 남경에서 조선을 향해 배를 탔으나
- 플로리아노 신부 국경지대에서 병사로 추정
요한 신부 조선에 연락방도 없어 포기
다. 1816년부터 1835년까지 19년동안 북경을 16차례 왕래했다는 기록
1816년 이후 북경으로 가는 사신 행차가 있을 때마다
거의 거르지 않고 따라가서 선교사 파견을 청원하였다.
2)유진길의 청원 서한
가 1823년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임
1824년 역관의 자격으로 사신 행차에 동행. 정하상과 함께 북경 방문
1826년 하급 마부 출신 조신철 가를로 합류
나. 1825년 유진길이 '조선교회의 암브로시오와 그 동료들'의 이름으로
교황께 직접 성직자 파견 요청하는 서한을 북경교구에 제출
- 조선대목구설정에 결정적인 역할
한문으로 쓰여진 이 편지는「마카오」로 보내져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교황성하께 올려졌다. 이 편지는 포교성성(現인류복음화성성) 직속 경리부차장 움삐에레스 신부가 번역하여「로마」로 발송했는데
마카오의 포교성성 대표부 책임자 움피에레스 신부 라틴어로 번역
(번역일자 1826 11 29)
서한내용 - 선교사 파견 청원
선교사입국방법 - 유럽의 선박 이용
조선의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단과 동행할 것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선교사 파견 방법 강구 요청
다. 움피에레스 신부와 라미오 신부의 첨부 내용
라미오 신부의 생각
요셉 신부와 빈첸시오 신부를 보내십시오. 중국인 신부라 들어가기 쉽고
시작 단계에서 더 빨리 갈 수 있습니다.
교황성하께서 이 착한 교우들을 위로하고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서한을
보내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조선교우들이 말하는 본당(북경교회)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배려하지 않는다면
다른 수도회를 보내겠다고 말입니다.
움피에레스 신부 의견
조선을 위해 전심할 수 있는 수도회가 필요합니다.
중국인 사제들에게 맡긴다면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프랑스 예수회 회원들이 조선을 맡으려 한다면
예수회 회원을 지목(知牧)으로 임명하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라. 이 편지(유진길 등이 직성하고 움피에레스 신부의 의견서 첨부된)가 로마에 도착하여
카펠라리 추기경은 1827년 9월 1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에 사제파견 요청
여러과정을 거쳐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카펠라리 추기경)에 의해
조선대목구 탄생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참고)
을해박해 (乙亥迫害)
1815년[乙亥年]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일어난 박해.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종결된 후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반포되었다. 이 척사윤음은 천주교 탄압의 법적 근거가 되어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교우들은 경상도와 강원도의 산골로 숨어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며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14년 전국에 기근이 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우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의 탐욕과 지방관의 자의(恣意)로 중앙의 지시도 없이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먼저 경상도에서는 1815년 부활 축일에 청송의 노래산(老萊山)에서 고성운(高聖云) · 고성대(高聖大) 형제 등 35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경주진영(慶州鎭營)으로 압송되었고, 이 중 19명은 배교, 2명은 옥사하여 14명이 다시 대구감영(大邱監營)으로 이송되었다. 같은 시기 진보(眞寶)의 머루산에서는 김시우(金時佑)를 포함한 33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안동진영(安東鎭營)에서 20명이 배교하고 나머지 13명이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영양(英陽)에서는 김종한(金宗漢), 김희성(金稀成) 등 6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구감영에는 33명의 교우가 갇히게 되어 경상감사 이존수(李存秀)는 조정에 제를 올려 이들의 처형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처형은 1년 6개월 후에야 결정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35명의 교우 중에 26명이 옥사, 병사하고 1916년 12월 16일(음 11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을 때는 고성운, 고성대, 김종한, 김희성, 김화춘, 최성열(崔性悅), 이시임(李時任) 등 7명의 교우들만 남아 있었다. 한편 강원도에서는 1815년초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원주감영(原州監營)에 갇혔으나 대개는 배교하교 석방되거나 유배되었고 김강이(金綱伊)만이 12월 5일(음 11월 5일) 옥사하였다. 을해박해는 이것으로 형식상 종결되었다. 그러나 경상도와 강원도에 새로 형성된 많은 교우촌들이 파괴되었고, 100여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30여명의 교우가 순교했을 뿐 아니라, 비록 체포되지 않았을지라도 많은 교우들이 재산을 약탈당하고 쫓겨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어 이 지역에서 교회는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