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례강학-11 : 6월 16일 강학(제4절 신유박해의 종식과 의미)

2014. 8. 29. 오후 5:24:33

글자

제4절 신유박해의 종식과 의미

 

1. 박해의 종식과 <토사교문>의 반포

주문모 신부 문제, 유항검 등의 대박청원 계획과 황사영의 백서 등으로 인해 천주교 신자들은 국가를 전복하려는 대역부도(大逆不道)한 반역자로 완전히 낙인찍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라는 한 가지 사건을 1년 내내 끌고 가면서, 국가의 운영에 커다란 차질을 빚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민심이 동요하므로 대왕대비와 정부측 인사들은 황사영의 백서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박해를 종결시키고자 하였다.(종묘에 고유(告由) 할 것을 독촉)

11월 27일 예조에서 천주교인들을 토벌한 사유를 종묘에 고하는 절차를 마련하였으나, 이미 사망한 채제공을 천주교 신자들의 우두머리로 몰아세운 문제를 처리해야 했기에 연기하고, 12월 22일 <토사반교문(討邪頒敎)을 반포하였다.

토사반교문 1791년 진산사건부터 황사영 백서 사건까지 모두 한 뿌리에서 시작된 것으로 규정, 이 사건에 모두가 체제공과 이가환이 중심이며, 처음에는 신교라고 거짓 핑계하여 남몰래 하늘까지 뒤덮는 재앙과 난리를 빚어냈고, 마지막에는 임금을 원수같이 보아 공공연히 임금을 모욕할 모략을 꾀했다고 단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유박해를 정부의 최고위층 인사와 수많은 사대 가문의 인재들이 포함된 고도로 조직화된 국가 전복 음모사건으로 규정하고 국가 존립의 최고 권위인 종묘에 고함으로써 자신들은 확고한 정통성을 갖고 천주교인들과 채제공 등은 만고의 역적으로 확정하였던 것이다.

이 의식의 거행을 끝으로 신유박해는 무수히 많은 피를 흘린 채 막을 내렸다.

 

2. 박해의 의미와 영향

1) 척사론의 확산과 근대화의 지연

새로이 정권을 잡은 노론은 천주교 탄압을 통해서 정치적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정국을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외척을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등장함으로써 정치ㆍ경제ㆍ사회적 모순이 쌓여만 가면서 조선을 점차 실질적인 국가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신유박해를 겪으면서 서양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척사론을 내세워 근대지향적인 실학의 확산을 꺾어 버림으로써 근대로의 진전을 더디게 하여 조선은 급변하는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채 일본의 식민지로 전략할 수밖에 없었다.

 

2) 천주교의 확산

신유박해는 조선교회에 가해진 최초의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로 교회를 거의 폐허화시켰고, 성직자가 없는 불완전한 교회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교인들도 유배를 당했거나 생명유지를 위해 산가벽지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어 거의 빈사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토사교문>의 반포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은 일단 멈추었으나, 천주교를 국가의 원수로 단정함으로써 앞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가할 수 있는 법적근거가 마련됨에 따라 교회를 재건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살아남은 신자들도 자신이 이제까지 살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신자가 늘어나면서 천주교는 보다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낳으면서 집단 거주지인 교우촌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천주교가 확산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천주교가 다시 자리 잡아 가는 과정에서 양반이 아닌 중인 이하 신분층이 교회를 이끌어 가기 시작하고, 신앙생활도 사회 참여라는 현실적 성격은 희미해지고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내세지향적 성격으로 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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