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황사영과 백서 사건
4. <백서>의 내용
- 細明紬(흰색 세명주==>가늘게 무늬 없이 짠 명주), 62x38cm, 122행, 13,384자
- 1894년 의금부 고문서 소각 때 우연히 발견되어 뮈텔주교에게 전달됨.
- 1925년 '79위 순교복자‘ 시복식에 원본과 번역본 교황에게 봉정, 바티칸 민속박물관에 소장.
-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조선교회의 보고서이자 도움요청 청원서.
- 편지형식 : 1) 서론 => 인사 및 위기에 빠진 조선교회에 대한 구원요청
2) 본론 => 신유박해 발발과 진행과정, 주문모신부와 순교자들의 약전, 교회의 재건과
(95%)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최초 순교전기. 수난기)
3) 결론 => 大齋(대재)와 小齋(소재)의 관면 요청과 맺는 말.
- 백서의 주요 이본
1) [진주사등본]=[가백서] : 동지사와 진주사 겸임 조윤대 파견(1/15로 922자 16행)
2) [사학죄인사영등추안] : 원문필사, 은언군 관련 삭제.
3) [벽위편] : 10,500자. 최필제~권철신 삭제, 은언군 관련 삭제.
- 조선교회 재건방안(북경 주교가 아니라 교황에게 청원)
1) 재건 위한 재정원조 요청(사제영입과 사제생활비용)
2) 북경교회와 연락방안(조선신자->중국인에게 조선어 가르침->책문에 중국신자 상점)
3) 교황이 청 황제에게 조선 신앙자유 위해 외교적 압력행사 제안
4) 조선을 청의 지방으로 만들어 청이 조선에 대해 감독. 보호할 것 제안(감호책)=>속국?
5) 서양군함, 무기, 군대동원으로 신양자유 획득 제안(병사 5~6만 명, 배 수백 척, 무기=대박청래)
- 황사영은 백서에서 박해원인으로
(외적) : 당론으로 인한 천주교 배척과 교조적인 주자학 제시
(내적) : 재정적 어려움(공동체 파괴와 재산 몰수)
- 황사영의 외부도움 이유
1) 조선교회 자체적 난국 해결할 힘없음을 판단.
2) 1790년, 1796년 [대박청원]~이상향 동경의 상승작용.
3) 박해 속 살아남은 자신은 교회 재건의 하느님의 뜻이라는 ‘소명의식’.
5.황사영과 <백서>에 대한 평가
- 극명한 대비: 1)민족주의 관점=>반국가적, 반민족적(척사론자은 무력 청원은 ‘역적’), 2)호교론의 관점=>순교자
- 유진길, 정하상도 기해박해 추국에서 [백서]는 역적(역절)이다.
- 달레, 다블뤼주교, 뮈텔주교 등 => 시대적 비현실성. 공상, 위험, 경솔
- 해방 이후 : 새 사상의 근대화 획책에 의욕적 호흡, 세계 지식의 확대 상
- 1970년 긍정적 평가 시작 : 이분법이 아니고, 역적이자 민족반역자인 동시에 순교자다.
- 신유박해 대부분의 순교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당당하게 증언하고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황사영은 조선왕조의 정 통성을 부정하는 대박청래와 감호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부당하고 참혹한 박해를 멈추게 하는 것이 옳다고 믿 었으며, 그러한 만행을 일삼는 국가라면 그 같은 국가 체제에 승복할 필요가 없음을 확실히 하였다. 즉 황사영은 ‘조선’이라는 국가와 사회를 궁극적으로 새롭게 변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유교가 지배하는 조선사회에서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유교의 하늘’을 벗어나 ‘그리스도교의 하 늘’로 들어가고자 하였고, ‘유교적 조선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며, ‘대박청래’는 희망이 보이는 꿈 꾸는 이상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자 수단이었다. 즉 근대로 향하는 길목의 들머리에서 굳게 닫혀 있 던 문의 열쇠를 찾고자 했다.
- 근대화를 향하는 관점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순교자였을 뿐 아니라, 유교가 지배하는 조선사회를 근대사회, 즉 왕
정에서 공화정으로 변화시키는 데 목숨을 바친 또 다른 의미에서의 순교자이고, ‘근대적 인간’의 선구적 전형이다.
* [척사윤음]=대왕대비의 백성들에게 박해전말과 당위성을 알리는 반교문으로 12월 22일 반포=> 300명 이상이 희생된 신유박해의 막 내림. (리오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