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례강학-9 (황사영과 백서사건중 황사영)

2014. 8. 29. 오후 5:19:10

글자

3절 황사영과 백서사건

 

황사영의 생애

 

이러한 가문적 배경을 가지고(별도 배부한 가계도 참조) 유복자로 태어나 8세까지 증조부 황준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다가 정조14(1790) 16세때 진사시에 합격(이때 정조가 손을 잡아 줌)

 

1801115일 황사영이 서소문 밖에서 대역무도죄로 능지처사된 뒤 그의 집안은

완전히 풍비박산되었다.

 

2. 황사영의 교회활동

 

황사영의 가족 배경을 살펴보았듯이 그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이미 예정된

   수순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179016세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해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딸인 정난주

    마리아와 결혼한 후 1791년 이승훈에게서 교리서를 얻어다 보고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진술

 

황사영은 천주교를 세상을 구하는 좋은 약’, ‘구원의 학문이라고 하면서 당시

    지배 이념으로서의 위상을 잃어 가던 유교를 대신할 사상으로 인식하여 신앙생활에

    전념하고자 과거 응시도 포기하고 정약종, 홍낙민 등과 교리를 깊이 있게 공부

 

1795(21) 최인길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받음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 하는 한편, 명도회의 하부조직인 육회를 위한 모임

    장소도 제공하였고, 교회로 인도한 사람들은 전국적 전 계층이었다. 비록 경상도

    상주에 사는 이복운에게 교리를 전하였으나 이복운이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돌아가

    벽이변을 저술하기는 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활동하여 신유박해 이전까지는

   교회의 중추적인 인물로 인정받았다.

 

3. 황사영의 체포와 순교

 

신유박해가 발발하면서 모든 상황이 급박하게 변하였다. 정약용의 집에서 압수한

    서찰 가운데 황사영의 편지가 발견되어 정약용이 그가 천주교 신자라고 자백함으로써

   체포령이 내려졌다.

 

자신의 체포령을 들은 황사영은 강완숙의 소개로 용호영 안에 있는 김연이의 집으로

   피신-석정동 권상술-동대문안 노랑정동의 송재기 집으로 가서 김의호를 만나

  상복으로 변복 후 김한빈과 함께 제천 배론에 있는 김귀동의 집으로 피신 거기서

  토굴을 만들어 지냈다.

 

18013월 서울에 갔다가 돌아온 김한빈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주문모 신부마저

    자수했다는 소식은 견디지 못할 만큼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자신이

   교회의 보존과 재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궁리한 결과 자신이 목격했거나 전해들은

  사실을 근거하여 <백서>의 내용을 구상하고 집필에 착수하였다.

 

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의 상황과 조선교회의 재건 및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군함의 파견 등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은 <백서>는 북경의 서양인 신부들과

    안면이 있는 황심의 이름으로 보내기로 하였고, 북경을 여러번 왕래한 옥천희가 동지사

    일행의 일원이 되어 이 <백서>를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옥천희가 의주에서 체포되고 옥천희의 심문으로 황심도 체포되었다. 황심은

    황사영이 도피하여 은거후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음을 알고

    황사영이 있는 곳을 자백하였다.

 

황사영의 체포와 <백서>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이 백서사건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크게 일어났다. 조선정부는 주문모 신부의 처형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불리한 내용을 삭제한 <가백서>를 청나라 황제에게

    보냈다.

 

또한, 조정에서는 백성들에게 박해의 전말과 그 당위성을 알리는 반교문,

    <척사윤음>을 반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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