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고린토 2서 3,15─4,1.3-6 형제 여러분,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여전히 너울로 가려져 있습니다. 이 너울은 모세의 경우처럼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갈 때에 비로소 벗겨집니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 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 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이 직분을 맡은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가려졌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가려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선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일하는 여러분의 종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복음 마태오 5,20-26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하지 마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누가 너를 고소하여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내주어 감옥에 가둘 것이다. 분명히 말해 둔다.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 글은 2003년 6월 12일 새벽을 열며 묵상 글입니다.
어느 학교 국어선생님 중에서 "요"자체를 무지 싫어하시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이 선생님은 무조건 "~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요"자는 일본의 잔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학생들은 그 선생님의 수업시간에 '요'자를 쓰지 않기 위해서 긴장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험기간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신입생들의 시험감독으로 들어가게 되셨습니다. 당연히 신입생들은 그 선생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했지요. 선생님께서 맨 앞에 앉아있는 신입생을 가르키면서 물으셨습니다.
"그 쪽 줄 학생수가 몇명이야?"
시험지를 나눠주시기 위해 한 줄 한 줄 앉아 있는 학생 수를 묻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 여학생은 바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홉명이요"
선생님이 가장 싫어하는 '요'자를 붙인 것이었지요. 그 말을 듣고 선생님께서는 화를 내시며 되물었습니다.
"뭐 몇명이라고?"
여학생 너무 놀라서 자기가 잘못을 했나 하고 다시 학생 수를 쉬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홉 명이 맞았습니다. 여학생 다시 한 번 똑똑하게 "아홉명이요" 라고 또 말을 했습니다. 듣고 계시던 선생님은 너무 화가 나서, " 뭐라고 다시 말해 봐 몇 명이라고?" 하면서 되물었어요. 이 여학생은 다시 한 번 뒤를 돌아서 학생 수를 세워보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리고 떨면서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구인이요"
웃어 넘길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런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자신의 뜻을 강조하고 자기만의 틀을 만들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우리에게 더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이처럼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계명이 화도 내지 말고, 욕도 하지 말고, 원한 품게도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확장됩니다. 사실 사람들은 율법에서 규정하는 그 정도만 지키고 그 이상은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주님의 율법,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중요한 사랑의 실천은 외면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율법이 정한 선에서 멈추어 버리지 말고, 항상 조금만 더 나아가도록 이끄십니다.
특히 원수를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확장하신 것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람들이 '됐다'고 하는 선에서 조금만 더 잘하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리를 함께 가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십리를 함께 가주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고,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돌려 대주라고 하시지요. 이처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청을 들어주라는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이만하면 됐다는 선을 금 그어 놓고, 그만큼만 실행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금 그어 놓은 선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선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라고 이끄십니다. 살인하지 말뿐만 아니라, 이웃을 욕하거나 비방하지도 말고, 이웃에게 화를 내거나 나쁘게 하지도 말라고 말이지요.
우리 자신들이 그어놓은 금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적어도 이만큼만 하자는 한계선이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은 아닌지요.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 또는 다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 내 스스로의 한계를 지으면서 정작 중요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놓은 한계선에서 한 발자국 넘어서는 지점에 바로 하느님 나라의 국경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정한 한계선에서 한 발짝만 더, 조금만 더 나가면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의 한계선을 부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조금만 더 사랑해요.
이상한 계산 어느 날 돈 많은 은행가가 길에서 우연히 죽마고우를 만났다. 두 사람은 반가운 마음에 포옹까지 나누며 오랜만의 회포를 나누었다.
“자네 행색을 보아하니 생활이 마음먹은 것처럼 잘 풀리지 않나 보군.” “그러게나 말일세. 나날이 나아지는 대신 늘 요 모양 요 꼴이라네.” “그럼 이 1천 프랑짜리를 가지고 가면 어떻겠나. 친구 사이니 부담 갖지 말게나. 자네의 형편이 나아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
그 친구는 돈을 고맙게 받아들며 재기를 다짐했다. 그로부터 1년 뒤 두 사람은 시내 한복판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친구는 여전히 힘없는 모습이었다.
“가난의 여신이 아직 떠나지 않은 것 같군. 참 안됐네. 그럼 내가 5백 프랑을 줄 테니 가지고 가게나.”
다시 1년이 흘렀다. 은행가는 예전보다 더욱 초라하고 볼품없는 행색을 한 친구와 마주쳤다.
“자네 삶을 구제하기가 참 어렵군. 내게 250프랑이 있으니 그것이라도 가지고 가게.” “매번 고맙네. 그런데 자네도 나처럼 형편이 나빠지고 있나 보군.” “무슨 소리야? 그와 반대로 내 사업은 나날이 번창해서 해마다 수입이 늘고 있다네.” “아니, 그렇다면 왜 나를 만날 때마다 주는 돈이 반씩 줄어든단 말인가?” “음, 그거 말인가.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독신이었어. 두번째 만났을 때는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고, 올해는 아이까지 하나 생겼다네.”
“그런가? 잘 알았네. 그럼 자네는 내 돈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게로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