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05.06.04) -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2005. 6. 4. 오전 9:41:02

글자
2005년 6월 4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제1독서 이사야 61,9-11
“내 백성의 후손은 만방에 알려지고 자식들은 뭇 백성 가운데서 이름을 날리리라. 그들을 보는 자마다 주님께 복받은 종족임을 알게 되리라.”주님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그는 구원의 빛나는 옷을 나에게 입혀 주셨고,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둘러 주셨다. 신랑처럼 빛나는 관을 씌워 주셨고 신부처럼 패물을 달아 주셨다.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듯, 주 하느님께서는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정의가 서고 찬양이 넘쳐 흐르게 하신다.


복음 루가 2,41-51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는데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명절의 기간이 다 끝나 집으로 돌아올 때에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부모는 아들이 일행 중에 끼여 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을 갔다. 그제야 생각이 나서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으므로 줄곧 찾아 헤매면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갔다.
사흘 만에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거기서 예수는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능과 대답하는 품에 경탄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예수를 보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이 글은 2002년 6월 8일 새벽을 열며 묵상 글입니다.

어느 새댁이 아주 예쁜 아기를 낳았습니다. 이 아기는 첫 아이였지요. 첫 아이 여서인지, 이 아이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움이 있었지요. 그것은 아직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예쁜 아기, 사랑스런 아기였기에, 하루 빨리 "엄마"라는 말을 듣고 싶은데, 아기는 너무 어려서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습니다.

"나, 우리 아기에게 "엄마"라는 말을 듣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빨리 들을 수 있니?"

"전에 TV에서 보았는데, 애기는 같은 말을 1000번 들으면 그 말을 할 수 있다더라."

이 새댁은 희망에 넘쳤습니다. 그리고 아기에게 달려가 말하기 시작했지요.

"엄마, 엄마, 엄마……."

목이 마르고 지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엄마"라는 말을 꼭 듣고 싶었기 때문에 목이 마르고 지쳤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말했지요. 드디어 1000번에 가까워졌습니다.

"엄마(997번), 엄마(998번), 엄마(999번), 엄마(1000번)"

드디어 1000번을 말했지요. 그리고 희망에 찬 눈으로 아기의 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꿈틀거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말했어요.

"마~엄"

엄마, 엄마를 계속 외치다보면, "엄마"를 말하는 것인지, "마엄"을 말하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겠지요? 이 아기는 "엄마"라는 단어를 기억하게 된 것이 아니라, "마엄"을 기억하게 된 것이지요.

좋은 부모는 어떤 부모일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이를 다른 아이보다 더 좋은 교육을 시키는 것 역시 중요하지요. 하지만 무조건적인 강요라면 아무로 좋은 교육을 시킨다해도 그렇게 좋은 교육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아울러 좋은 부모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아들 예수님과 함께 과월절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찾으면서 예루살렘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모님의 이런 애타는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성전에서 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요.

아무튼 예수님을 발견한 성모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애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잘못했다고 빌어도 모자랄 상황인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이런 상황이라면, "이런 버릇없는 놈이 있나"하면서 혼을 낼 만도 한데, 성모님은 복음에 나오듯이,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할 뿐이었습니다.

성모님의 교육법은 강압이나 강요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자녀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기초한 교육법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이 교육법을 기억하면서, 나의 자녀에게 뿐만 아니라, 내가 만나는 이웃에게도 이 교육법을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때 이 세상은 미움보다는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교육법을 가슴에 새깁시다.



가시나무새 사랑(용혜원)

오늘도 난
그대를 향한 사랑이란
이름으로 서 있는
한 그루 가시나무의 새이고 싶습니다.

그대를 향한 그리움에 사랑으로
깊은 믿음에 뿌리 내리고
그대가 전하여 주는 언어들로
푸른 행복을 품은
한 그루 가시나무의 새이고 싶습니다.

오늘도
내 몸에서 돋고 있는
두꺼운 그리움에 가시는
그칠 줄 모르고

때론 내 잔가지를 타고 올라오는
가시덩굴도 보이지만
난 오로지 그대만을 품고 사는
한 그루 가시나무의 새이고 싶습니다.

봄이면 아카시아꽃 향기로
설레는 기쁨을 주고
여름이면 지친 몸 이끌고 와서
편히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어

가을이면 노오란 편지지로 물들여
사랑에 사연들로 매달아 놓아
그대가 읽어 내리게 하고

겨울이면 하이얀 미소 같은
눈들로 내 몸을 감싸 안은 채
그대만을 향해 우뚝 서 있는
한 그루 가시나무의 새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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