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05,03,18) - 사순 제5주간 금요일

2005. 3. 18. 오전 9: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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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05년 3월 18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예레미야 20,10-13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거립니다. '저자야말로 사면초가다. 고발하자, 고발하자.' 저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모두 제가 망하기를 바라 모의합니다. '걸어 넘어뜨리고 잡아 족치자. 앙갚음을 하자.'
그러나 제 곁에는 힘센 장사처럼 주님께서 계시기에, 저를 박해하다가는 당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것입니다. 뜻을 이루지 못하여 부끄러움으로 머리도 들지 못하고, 길이길이 잊지 못할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만군의 주님, 사람의 뱃속을 아시고 심장을 꿰뚫어 보시는 공정한 감시자여, 저들을 고소하는 이유를 밝히 말씀드렸사오니, 이제 이 백성에게 제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이 눈으로 그것을 보아야겠습니다."
주님께 노래를 불러 드려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악당들의 손에서 빼내 주시는 분이시다.


복음 요한 10,31-42
그때에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좋은 일들을 많이 보여 주었는데 그중에서 어떤 것이 못마땅해서 돌을 들어 치려는 것이냐?" 하고 말씀하셨다.
유다인들은 "당신이 좋은 일을 했는데 우리가 왜 돌을 들겠소? 당신이 하느님을 모독했으니까 그러는 것이오. 당신은 한갓 사람이면서 하느님 행세를 하고 있지 않소?" 하고 대들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율법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 하신 기록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겨 세상에 보내 주셨다. 너희는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다시금 예수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몸을 피하셨다. 예수께서는 다시 요한이 전에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어 거기에 머무르셨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와서 서로 "요한은 기적을 보여 주지 못했지만 그가 이 사람에 관해서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하면서 많은 사람이 거기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지하철에서 한 장님거지가 동냥 통을 앞에 놓고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을 지나가던 중년 신사 한 사람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 뒤로 예쁘게 차려입은 숙녀 한 사람이 그곳을 지나다가 거지를 보고는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통에 던져놓고 갔습니다.

이제 이 둘 중에서 누가 더 사랑을 실천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준 숙녀 한 사람의 행동이 더 사랑을 실천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명의 생각이 이러했다면 어떨까요?

먼저 적선을 하지 않은 신사가 ‘지금 돈 몇 푼을 저 거지에게 주는 것은 쉽지만, 이런 동정으로 그가 계속 타성에 젖어 거지 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근본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라는 안쓰러움을 꾹 참고서 그냥 지나갔다면, 그것이 과연 잘못된 행동일까요?

또 예쁜 숙녀가 거지를 보고 맵시 있는 자태로 지갑을 열어 우아하게 돈을 꺼냈고 혹시 더러운 동냥 통에 손이 닿을까봐 멀리서 던져 놓고서는, 적선했다는 뿌듯한 마음을 가지고 고상한 걸음걸이로 걸어갔다면 과연 그녀의 행동이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겉으로 보았을 때에는 예쁜 숙녀가 더 사랑을 실천한 것 같지만, 속 내용까지 보았을 때는 분명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런 판단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냥 겉으로 보이는 부분에서 머물러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어제부터 갑곶성지는 본격적인 성전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성지가 난장판입니다. 현재 건물의 창문과 문짝, 그리고 천장까지도 없애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치 전쟁 중의 폭탄 맞은 분위기입니다. 이 모습만 보고서는 ‘성지가 왜 그래?’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될까요? 아니지요. 지금은 비록 이렇게 정신없고 지저분한 난장판 같은 분위기이지만, 계속된 보수를 통해서 곧 깔끔해진 성전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앞서 거지에게 보였던 겉모습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참된 사랑이 우러나왔느냐가 중요한 것처럼, 또한 현재의 공사 중인 모습이 아니라 공사가 끝났을 때의 멋진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과 대치하는 유다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연상하게끔 하려는 것인지 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했다는 과격한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아무튼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지금의 모습만을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라해 보이는 예수님의 겉모습, 또한 보잘 것 없는 예수님의 신분. 바로 그러한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겉으로 드러나는 것, 그것은 전부가 결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마치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말해야만 살 수 있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그런 마음을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서야 우리들은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우리를 보살펴주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겉모습만을 보고서 판단하지 맙시다.



주는 사랑, 받는 사랑('행복을 전하는 우체통' 에서)

귀엽고 사랑스러운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백발노인이 산모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위해 한가지 소원을 들어줄테니 말하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망설임 없이 이 아이가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아이가 되길 소망했습니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소망대로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귀하게 자랐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받는 사랑에 익숙한 나머지 작은 일 하나에도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했습니다. 결국 그의 삶은 점차 비참과 황폐로 변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의 백발노인이 다시 나타나서 그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그가 말했습니다.

"사랑받기보다는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사랑을 받으며 산다는건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위험한건 없습니다.

받는 사랑에 익숙해지면 그 사랑에 의지하게 되고 결국 그 사랑의 노예가 됩니다. 자신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을 원한다면 먼저 베푸는 것이 얻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은 부메랑과 같다고 하나 봅니다. 지금 당장 돌아오지는 않지만 그 사랑은 분명 엄청나게 커져서 되돌아옵니다.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요.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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