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05,03,19) - 성 요셉 대축일

2005. 3. 19. 오후 12: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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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05년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

제1독서 사무엘 상권 7,4-5ᄀ.12-14ᄀ.16
그 무렵 주님의 말씀이 나단에게 내렸다.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일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살 만큼 다 살고 조상들 옆에 누워 잠든 다음, 네 몸에서 난 자식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터이니 그가 국권을 튼튼히 하고 나에게 집을 지어 바쳐 나의 이름을 빛낼 것이며, 나는 그의 나라를 영원히 든든하게 다지리라. 내가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네 왕조, 네 나라는 내 앞에서 길이 뻗어 나갈 것이며 네 왕위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제2독서 로마서 4,13.16-18.22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물려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상속자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곧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에게 그 약속을 보장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성서에 "내가 너를 만민의 조상으로 삼았다."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복음 마태오 1,16.18-21.24ᄀ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 이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 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제 어제 있었던 강화성당 판공을 끝으로, 각 본당의 판공성사 도와주는 일이 모두 끝났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계속해서 각 본당을 돌아다니면서 판공성사를 주었거든요. 더군다나 성지의 공사까지도 함께하고 있기에 피곤함이 더욱 더 배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좋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듣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고백성사를 1시간 정도 드리고 나서는 사제관에 들어와서 쉬었다가 나가서 다시 성사를 주곤 하지요.

그런데 어제 저녁이었습니다. 저녁 식사 후 1시간 동안 고백성사를 드리고 난 뒤, 사제관으로 들어왔는데 너무 피곤했습니다. 그래서 방에 잠시 누웠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어느 순간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 갑자기 눈이 떠졌는데, 사제관에는 신부님들이 한 명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고백성사를 드리러 성당으로 간 상태였고, 제가 너무나 피곤해 보여서인지 그냥 놔두고 가신 것이었지요.

판공성사를 보는 날에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많은 신부님들을 초대합니다. 저 역시 그런 식으로 초대 받은 신부였지요. 그런데 그런 신부가 고백성사는 주지 않고 잠을 자고 있으면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성사를 주는 그 시간에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면? 바로 제가 이런 상태에서 잠을 자고 있었지요. 하지만 신부님들은 제가 너무나 피곤해 보인다고, 그냥 놔두었던 것입니다.

판공성사를 주러 왔다면 성사를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저에 대해서는 그 원칙을 어기고 잠을 자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바로 저에 대한 배려, 즉 사랑 때문에 이렇게 해주신 것이었지요.

이 세상에 사람들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원칙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칙에서 벗어나면 난리를 칩니다. 어떻게 원칙을 어기는 몰상식한 행동을 하느냐고 말이지요. 그런데 사랑은 이 원칙보다 더 상위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면 그 원칙을 어기고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그래서 복음에서는 바로 이 요셉 성인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전해주는데요. 그 분의 성격을 이렇게 아주 간단히 표현합니다.

‘법대로 사는 사람’

이 말씀을 따라서 요셉 성인은 법을 잘 지키는 사람, 즉 원칙 중심의 생활을 했던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셉 성인이 자신의 배우자인 마리아에 대해서는 원칙을 어깁니다.

먼저 그는 유대 율법에 따라 자신의 배우자가 결혼 전에 임신하였으니, 파혼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원칙에 맞습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하려면, 당연히 자신의 배우자인 마리아를 사람들에게 부정한 여인으로 고발해서 돌에 맞아 죽게 해야지요. 여기서 그는 원칙을 어깁니다. 부정한 여인으로 고발하지 않고 그냥 남모르게 헤어질 생각만을 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말씀을 전해 듣고는 그 말씀대로 실천을 합니다. 원리 원칙을 중시하는 사는 사람이 꿈 한 번 꾸었다고 자신의 틀을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밤에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을 그만두어라’고 말한다면 그대로 하겠습니까?

아니겠지요. 요셉 성인 역시 지난밤에 꾸었던 꿈만으로는 자신의 원리 원칙에서 벗어나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마리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자신이 평생을 지켜왔던 법을 어기는 우직한 행동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느님의 아들을 직접, 그리고 가까이서 볼 수가 있었지요.

그렇게 원리 원칙을 따졌던 사람도 사랑이라는 이유로 그 원칙을 어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이렇게 사랑보다도 원리 원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까요?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 사랑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우리들의 마음 안에 모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원칙을 내세우며 따지지 맙시다. 대신 먼저 이해해 보려고 합시다.



행복이라는 나무(이정하 '돌아가고 싶은 날들의 풍경' 中에서)

행복이라는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곳은 결코 비옥한 땅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절망과 좌절이라는 돌멩이로 뒤덮인 황무지일 수도 있습니다.
한번쯤 절망에 빠져 보지 않고서 한번쯤 좌절을 겪어 보지 않고서
우리가 어찌 행복의 진정한 값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절망과 좌절이라는 것은 우리가 참된 행복을 이루기 위한 준비 과정일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 절망스럽다고 실의에 잠겨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 잠깐 좌절을 겪었다고 해서 내내 한숨만 쉬고 있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입니다.

절망과 좌절이라는 것이 설사 우리의 삶에 바윗덩어리와 같은 무게로 짓눌러 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무사히 들어내기만 한다면,
그 밑에는...틀림없이 눈부시고 찬란한 행복이라는 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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