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만남// 최익철 신부

2008. 1. 15. 오전 10:27:43

글자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26)이라 증언했을 때 안드레아는 주저하지 않고 그분을 따라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와서 보라."(요한 1,39)고 하신 말씀을 듣고 그는 가서 보고 또 확인했습니다. 보기 위해서는 우선 가야합니다. 가는 수고를 아낀다면 눈으로 볼 수는 더욱 없을 것입니다. 가 보지도 않고 좋은지, 나쁜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듯 또한 신앙에 있어서도 '간다'는 첫 단계를 거치는데 용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동방 박사들도 베들레헴까지 갔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간다'는 수고와 희생없이 본다는 기쁨과 값이 주어질 리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끊어 버린다는 용단도 또한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첩경은 자기 자신이 직접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안드레아는 가서 보고 와서,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말하며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들이 만났던 분을 우리는 만날 수 없는 것일까요? 물론 만나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이시라면 더는 다른 것들처럼 보고 싶지도, 믿을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그분을 이 다음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가 염려스럽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한번은 미리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찾던 메시아"라고 했으니 만나기 위해 스스로 찾아나서야 겠습니다. 찾으려면 우선 찾을 마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또 찾을 마음이 클수록 있음직한 곳이 짚이고 만날 곳도 발견되게 마련입니다.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요한 1,38)라고 주님께 물어 보십시오. "와서 보라."고 하셨는데 주를 어떻게 발견하고 따라 갈 것입니까? 그러나 그분은 그 길을 우리에게 분명히 밝혀 놓으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8,20)하신 주님의 말씀이 기억납니까? 또한 "이는 내 몸."이라 하신 그 몸이 성당 안에 모셔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거룩한 성체를 매일 내 안에 모실 수도 있으니 바로 여러분은 그분과 함께 하고 있고 여러분의 생활 역시 그분과 함께 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분은 더 구체적으로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내 이웃에게서 당신을 만나 주기를 원하셨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 안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당신이 만드신 것은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까닭에 소외된 모든 것을 향해 새삼 눈 돌려지는 가운데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내 제자로 삼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는 말씀을 주셨으니 우리는 실상 어느 한 순간도 그분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세상의 빛"(요한 8,12)이라 하셨으니 우리가 어두움의 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빛으로 살 때 그분 안에서 함께 하는 삶인 것이며 이 모든 느낌이 바로 찾아서 본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고 싶을 때 이미 사랑하고 있듯, 찾고 또 보고 싶을 때 이미 찾았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찾았기에 또 찾고, 보았기에 또 보고 싶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높은 사람을 대하는 사람일수록 높아 보이듯, 메시아를, 하느님만을 대하며 사는 사람은 얼마나 높아 보이고 행복할 것입니까? 그런 인생은 또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가 이런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의 직접적인 음성에 접하며 그 이끄심에 따르기 위한 방법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일입니다. 이로써 그분에게 더 익숙하게 되어 나중에 그분을 만날 때 즉시 알아보는 영광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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