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고통이 변모하다

2008. 1. 17. 오전 11:3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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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고통이 변모하다

 

 놀라운 영적인 실제들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느린지 그런 내 자신을 보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깨달음은 갑작스레 오는데, 그것은 내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의 말씀일 것이다.

 

 이런 일이 최근에도 일어났는데 -내가 도착한 우편물을 읽었을 때- 아니 오히려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에 한 시간 정도 하느님 앞에 앉아서 깨어있을 때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몇몇 편지는 살아가면서 고통을 맞부닥친 여성들이 기도하며 적은 깊은 영적체험에 관한 것이었다. 고통은 계속 이어지고, -그래서 그들 삶의 여정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는데- 아주 오래전에, 심지어는 어린아이시절의 상처와 아픔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나 믿음과 기도로 충만한 여성들이며, 가족과 다른 고통받는 사람들, 세상을 위한 헌신적인 사랑과 보살핌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과 가까이 있음을 느끼거나 쓴 편지를 보면 어떤 분노나 절망을 찾아 볼 수 없다. 고통은 컸지만 그들은 희망, 사랑, 심지어 즐거움을 지니고 있는 여성들이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지만, 그들은 분노, 회한 혹은 쓰라림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이 겪는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유들은 너무나 많다. 자주 그것은 어린시절의 황폐함, 부모로부터의 애정결핍이든가 왜곡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단순히 질병, 사고로부터 오는 신체적 고통일 수도 있고 의사들의 오진 때문에 생긴 고통일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성장과정에 깊숙히 새겨진 정서적 심리적 불균형에서 오는 고통일 수 있다. 혹은 결혼의 실패나 부모들의 유기에서 올 수도 있다. 또 개인적이며 친밀한 사랑의 부족과 외로움이 원인일 수 있다.

 

 우리 사회, 문화, 경제적 독재는 엄청난 이윤이 인간의 중독과 충동 등을 대가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수많은 여성들은 그들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알콜중독, 약물중독, 충동적인 도박, 성적 강박관념, 불균형의 식사습관, 돈 숭배, 소유와 기타 등등의 함정에 빠져있기 때문에 고통의 십자가 속에 살고 있다.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과 부인들이 매일 낮밤을 이런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나 배우자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는가? 그들은 상처받은 이의 고통스럽게 폭력적인 모습에 괴로워한다.

 

 나는 어머니이며 아내인 좋은 여성들, 영적이며 기도하는 여성들이 도박-특히 포카 게임기-의 함정에 비참하게 빠져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되면서 놀라고 있다. 이미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황폐해지고 풀이 죽고 이러한 기계들에 족쇄가 채워져 있는 자신들을 보며 수치스럽게 느낀다. 족쇄? 그렇다. 중독이란 족쇄와 같은 것이다. 이와 비슷한 함정들이 알콜중독이며 성적인 방황 등이다. 그러한 중독의 명단은 너무 길다. 고통에 대한 다양한 표현도 엄청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 여성들의 자질, 선함, 거룩함은 압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참으로 이런 모든 것을 알아보고 하나로 정리하는 것이 느리다. 하느님께서 이른 아침의 침묵 속에서 그것을 알아보라고 나를 깨우셔야 했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은 밝게 다가오기도 하고 다시 희미해지기를 계속한다. 그리스도는 많은 여성들이 그분과 함께 그분의 고통과 죽음, 그분의 십자가를 오늘날 모든 사람들의 생명과 구속과 회복을 위하여 나눌 것을 요청하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기술, 정치, 정부기금, 전문주의, 교육과 오늘날 매우 똑똑한 세계의 모든 놀라움들이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인간 삶의 핵심에 있는 고통을 없애주는 데 확실히 부적절하다. 훌륭하게 보이지만 그런 방법들은 더 깊고 더 넓게 충분히 고통에 이르지 못한다. 에이즈, 가난, 갈등, 자살, 증오는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느님은 또 다른 말을 하고 계신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느님이 한 작은 인간의 아들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일상 속에서 살다가 마침내 세상의 학식 있고 권력있는 사람들에게서 거부당하고 십자가에 공개적으로 처형되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고통이라는 거대한 인간 체험 속으로 친밀하게 들어옴으로써 구원을 이루신다. 그분은 이 고통을 -아니 그분의 아버지가- 변화시켜 부활, 구원의 새로운 생명으로 만든다.

  우리 모두는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오직 하느님만이 고통, 죽음, 거부, 멸시를 새로운 생명과 사랑의 길로 변화시킬 수 있다. 나는 고통받는 여성들 속에서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당신에게로 끌어당기어 생명을 주는 사람들이 되도록 한 것을 볼 수 있다고 믿으며 또한 맹세한다. 그것도 자신의 아이들에게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생명을 주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누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누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진짜로 비난할 수가 없다. 도움을 받지 않는 이성의 힘으로써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어리석음과 십자가의 약함, 스캔들에 닿아야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다 - 십자가 홀로 인간 고통의 대양에 빛을 비추고 우리의 상처 받고 부서진 인간성에 희망을 가져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가난, 불의 그리고 잔인함에 의하여 부서지고 있는 세계에 드러나는 인간 고통의 충격적인 실제를 거부해야만 한다. 아니면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과 교육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십자가와 처형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를 부인하는 것은 문제를 푸는 것이 전혀 아니다.

  충격적인 절망, 우울, 폭력주의를 만들어내는 무력하고도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고통앞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응답은 분노와 반항일 수 있다. 결국 문제를 부인하는 것은 희망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가톨릭의 전통에서 우리는 고통 자체를 찬양하는 무의미하고 병적인 경우가 아닌, 생명과 사랑으로 변화된 고통의 경우들과 예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구세주이며 연인이신 예수에 대한 사랑으로 편안함과 생명까지 포기하는 증인들, 순교자들을 많이 알고 있다.

  신비가들은 "사랑의 상처"로 기꺼이 고통을 받는데, 이는 사랑이신 하느님과의 전적인 일치를 갈망하기 때문이며, 현재 지상에 사는 우리들의 조건과 같은, 하느님의 온전한 현존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추방된 상황에서 성인들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손과 다리에 십자가위의 예수의 상처를 오상으로 경험하였다.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어머니, 슬픔에 찬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이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박히는 동안 그 밑에 서 있었다. 예수가 사랑했던 어머니 마리아는 그의 고통을 나누는 일에 물러서지 않았다.

 오늘날 격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여성들은 그들이 너무나 사랑하는 십자가 위의 예수 발 아래에서 마리아와 함께 갈바리에 서 있다. 그들의 가슴은 시메온이 마리아에게 미리 말했던 것처럼 에인 듯 아프다. 고통은 쾌락을 찾는 경제 중심의 세계에서 보면 어리석은 스캔들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고통은 생명이며 구원이고 희망이다. 그것은 모든 부서진 인간성의 희생자들과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선물이 없다면 이것은 모두 넌센스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넌센스라고 여기고 있다.

 

 1998년 요한 바오로 2세는 1891년에 태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1942년에 죽은 한 유대여성을 새로운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그는 뛰어난 학자였으며 가톨릭 신자가 되어 가르멜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는 에디뜨 슈타인 이며 지금은 십자가의 성 데레사 베네딕다로 알려진다. 그는 자신의 회심과 소명을 따르는 일이 가족에게 많은 아픔을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특히 동족인 유대민족이 그렇게나 비참한 고통과 박해를 받고 있을 때에. 그러나 가르멜에서의 기도와 고독의 생활은 늘 수난이었다. 백성과 함께 가스실로 간 슈타인의 또 다른 유대인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전적으로 동참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미리 알고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슈타인을 오늘날 세계의 고통에 대한 특별 수호성인으로 지정했다. 슈타인의 다음 말들은 우리 모두에게 풍부한 묵상을 하게 한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이다. 이 고통에 참여하는 것, 그것이 나의 갈망이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로부터 생겨나는 고통은 구원의 위대한 역사에 투입되고 그 안에서 열매를 맺는 그분의 고통이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자기를 내어드리는 위대한 연인들이 되지 못한다면 교회의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십자가는 정상에 빨리 오르게 해 주는 지팡이와도 같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은 우리를 당신의 가슴으로 이끄시려고 팔을 뻗치신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분이 사랑이시라면, 서로 사랑하는 것밖에 다른 수가 없다."

 하느님은 당신의 창조의 계획안에서 여성들에게 그처럼 친밀한 자리를 주셨다. 그분은 여성들을 당신의 전체 신비 안으로 경이롭게 끌어당겨서 우리는 그 신비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다.

  주님은 시에나의 카타리나에게 (14세기) 말씀하셨다:

 "이 시대에 자만심이 너무나 커지고 있으며, 특히 현명하고 지혜롭게 살아야 할 사람들 사이에 이런 현상이 늘고 있으므로 나의 정의감은 그들을 더 이상 참아낼 수가 없다. 나는 그들을 혼동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여성들, 배우지 못하고 약하지만 나에게서 덕과 천상의 지혜를 받은 여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거만함을 물리치도록 할 것이다."

  오늘날 인류는 전세계의 삶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그분의 거룩하고도 고통받는 여성들 속에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 하느님의 신비에 대하여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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