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신유박해 당시 신자 대부분 서대문, 중구에 거주

2001. 4. 7. 오후 7: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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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 당시 신자 대부분 서대문, 중구에 거주

교회지도자 중심 활동지는 지금의 남창동 근처

 

신유박해(1801년) 당시 서울대교구 신자들의 거주지는 대략 84곳(2곳은 불명)이며,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서대문구와 종로구, 중구 등 3개구에 95%의 신자들이 집중 거주했으며 교회 지도자들의 중심 활동지는 중구 남대문내 창동(현 남창동) 근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사실은 방상근(38, 석문 가롤로)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사가 3월24일 연구소내 도서실에서 열린 제128회 연구발표회에서 발표한 논문 '신유박해기 천주교인들의 거주지 연구 - 서울지역을 중심으로'에서 밝혀졌다. '사학징의'와 '벽위편'(이기경 편), '벽위편'(이만채편), '추안급국안' 등 4개 관변사료에 나타난 천주교신자 198명의 거주지를 분석한 결과, 중구에 36곳 86명(39.3%), 종로구에 20곳 62명(28.3%), 서대문구에 19곳 59명(26.9%)이 거주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당시 거주지가 파악된 신자들의 신분은 양민이 115명(58.1%)로 가장 많았고 양반이 41명(20.7%), 중인이 35명(17.7%), 천민이 7명(3.5%)인 것으로 집계됐다.

 

방 연구사는 198명 중 순교자(44명) 총수에 대한 신분별 순교자율은 중인이 43.2%로 가장 높아 이들이 교회지도자로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폈고 또 그만큼 신앙심이 깊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하고 아울러 양반의 순교자율은 29.6%, 양민의 순교자율은 27.3%였다고 공개했다.

 

방 연구원은 또 당시 신자들의 직업 분포는 역관, 의원, 상업, 수공업. 기타(마군) 등으로 나타나며 양반들의 경우는 구체적인 직업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밝히고, 김범우 등 역관들은 종로구 청진동 일대에, 최창현 등 의원들은 남대문 근처에서, 김한봉 등 상인들은 용산구 청파동과 서대문구 사창동, 중구 남창동 등 도성 안팎에 골고루 살았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방 연구사는 이날 특히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아 신자들이 신유박해와 관련해 신앙선조들이 거주했던 신앙의 터전을 알고 그 모범을 배우고 기억하기 위해 신유박해 관련 사적지를 지정, 표지석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표석 건립지로는 당시 신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북쪽의 정광수 집터(현 종로구 관훈동 135번지), 남쪽의 강완숙 집터(현 서울시 경찰국 앞쪽), 황사영 집터(충정로3가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고개) 등을 꼽았다.

 

방 연구사는 "이번 연구는 당시 신자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못했고 언급된 인물도 자료에 따라 그 내용이 차이가 있어 연구 자체가 상당한 제약을 지닐 수밖에 없지만 신유박해기 서울지역 신자 거주지 분포는 정리 분석한 경우가 없어 이번에 하게 됐다"며 "표석 건립은 물론 어느 정도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현재 표석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서울시와 협의만 된다면 상징적으로라도 당시 신앙의 현장을 기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화신문, 621호(2001년 4월 8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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