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 역사신문] 대왕대비, 천주교인 형집행 '선참후보' 시행
1801년 4월 3-5일
대왕대비 김씨는 천주교인들에 대한 신속한 형집행을 위해서 때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처벌할 수 있는 '선참후보'(先斬後報)제를 시행할 것을 5일 지시했다.
대왕대비 김씨는 4월에 들면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는 상소가 잇따르자 5일 영의정 심환지, 영부사 이병모 등 전현직 대신들과 정3품 이상 금오 당상들을 불러 "천주교인들의 국문이 지체되고 있어 민망하다"고 질책한 후 "천주교인들을 엄중하게 추문해 국법을 바로 세울 것"이라면서 이같이 지시했다.
대왕대비 김씨는 또 이부영의 '선참후보' 제안을 그대로 시행할 것을 명한 후 "이존창(49, 루도비코 곤자가)을 고향으로 내려보내 백성들을 모아 놓은 후 처형시켜 한 도에서 경계가 되어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바탕을 삼도록 하라"고 명했다.
대왕대비의 이같은 결단에는 대사간 목만중(74)과 지중추부사 권엄(72), 경기도 관찰사 이익운(53)의 상소가 결정적으로 작용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달 말(3월 31일) 지중추부사 권엄(72)이 순조 임금에게 이가환(59), 이승훈(45, 베드로), 정약용(39, 요한) 등 천주교 신자에 대한 극형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어 경기도 관찰사 이익운(53)이 4월 3일 정약종(41, 아우구스티노)과 권철신(65,암브로시오)의 탄핵을 주장하는 상소를 바쳤다.
이익운은 상소에서 "천주교인들은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통하고 천리 밖에서도 마음이 일치되어 그 무리를 사랑함이 가족(골육)보다 더하고, 거짓을 꾸며 서로를 은밀히 숨겨주며, 형벌을 가해도 혀를 깨물고 실토하지 않으며 백 사람이 한 몸이 되어 마치 소리가 메아리지고 그림자가 따르는 듯 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천주교인들이 무리를 지어 뭉칠 경우 국가의 근심이 백련교나 황건적 보다 더할 것"이라며 "정약종, 권철신 등 교주로 지목돼 있는 이들에게 무거운 형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사간 목만중(74) 역시 4일 이들 남인시파 계열 천주교인들의 탄핵을 청하는 상소와 함께 사직서를 제출했다. 목만중 또한 상소에서 "사학의 무리들이 어디에 숨어서 어떠한 재난을 일으킬지 알지 못한다"며 "숨어 있는 무리들을 발본색원해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요청했다.
<평화신문, 621호(2001년 4월 8일), 리길재 기자>
[신유박해 역사신문] 천주교도 사법상 불이익 극심
조정이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 체포에서부터 재판, 형 집행에 이르기까지 초법적이라 할 만큼 파격적으로 법을 집행하고 있다.
4월 8-10일 서울 서소문에서 순교한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은 모두 서울 중부 견평방에 위치한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고, 왕명에 의해 사형이 집행됐다.
왕권 유지를 위한 특별범죄를 취급하는 의금부가 천주교 신자들을 심문했다는 사실은 조정이 천주교를 국가 질서를 위협하는 불순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반증해주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의금부는 왕족의 범죄나 국사범, 모역반역죄, 관기문란죄, 사교(邪敎)에 관한 죄 등을 심리하는 '특별형사재판기관'.
조선의 사법제도는 수령 → 관찰사 → 형조, 또는 사헌부 → 임금에게 상언하는 것이 통상적이다.그러나 의금부에서는 왕의 교지를 받아 추국하는 최고의 사법기관이기에 통상적인 상고 절차를 생략한 채 범죄인을 심문한 추국안을 바로 임금에게 상고해 판결을 받아 집행하는 것이 관례화 되어 있다. 천주교 신자들은 체포된 후 의금부로 바로 압송돼 왔기에 상고할 기회를 잃은 채 사형 선고를 받았다.
천주교 신자들은 사형 집행 과정에서도 불익을 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선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사형은 '교수형'과 '참형', 사지를 자르는 '환', 독약을 먹여 죽이는 '사사'(賜死), 솥에 넣고 끓여 죽이는 팽(烹)형 등이 있으나 이번 형 집행을 당한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목이 잘리는 참형을 받았다.
사형 집행은 통상적으로 추분 후, 춘분 전에 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대역죄인이 아닌 이상 사형수들은 추분이 올 때까지 형 집행이 미루어졌다가 추분이 지난 다음 형을 받았다. 이를 사법 당국에서는 '대시참'(待時斬)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추분을 기다리지 않고 사형이 집행돼 '부대시참'(不待時斬) 됐다.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연좌형'도 시행됐다. 연좌형은 죄인과 일정한 친족 관계에 있는 자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책임을 지우는 제도로 주로 모반과 대역의 경우에 시행됐고, 죄인의 부자, 처첩, 조손, 형제자매, 아들의 처첩까지도 연좌에 포함됐다.
다른 순교자들과 달리 반역죄로 기소된 정약종에게 연좌형이 추가돼 조정은 그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집안이 복권되는 것을 영구히 막았다.
천주교 신자들은 체포된 후 옥에서도 심한 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가한 관리에게 장 100도 에 3년 형에 처할 만큼 국법으로 고문을 엄격히 금하고 있으나 의금부 관리들은 조선 천주교 조직 구성과 현황,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교회 인사들의 거처를 자백 받기 위해 천주교 신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공공연하게 자행했다.
최창현, 정약종 등 교회 인사들은 체포된 후 오장육부가 있는 등을 치는 '태배형', 몸을 마구 때리는 '난장', 양다리를 묶고 그 사이에 두개의 붉은 몽둥이를 가위를 벌리듯이 좌우로 벌리는 '전도 주뢰형' 등을 당했다.
천주교 신자들은 이외에 목에 씌운 나무칼을 나무에 매단 채 발에 돌을 달게 하는 형벌과 양다리의 무릎뼈를 둥근 나무 막대로 문지르는 '압슬', 사지를 묶은 다음 쇠막대기를 뜨겁게 달구어서 발가락 사이에 넣는 '포락' 등 갖가지 고문을 당했다.
정약종 등 서소문에서 참형 된 순교자들의 시신은 형장에서 사흘간 방치돼 있다가 가족들의 의해 수습돼 정성스럽게 안장됐다. 특히 정약종의 묘는 이 곳을 순례한 여러 사람이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다는 소문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몰래 다녀가고 있다.
<평화신문, 621호(2001년 4월 8일), 리길재 기자>
[신유박해 역사신문] 정약종, 이승훈, 이존창 등 교회 지도자 잇따라 형장으로
1801년 4월 8-10일
최창현(47, 요한) 총회장를 비롯한 초대 명도회장 정약종(41, 아우구스티노), 최필공(56, 토마스), 홍교만(64,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홍낙민(61, 루가), 이승훈(45, 베드로) 등 조선 천주교 평신도 지도자들이 8일 서울 서소문 형장에서 순교했다.
또 '내포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49, 루도비코 곤자가) 도 10일 서울 의금부에서 고향인 충청도로 압송돼 공주에서 순교했다.
이들은 조선 땅에 천주교 신앙을 처음으로 받아들였고 20여년 동안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파해 오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초석을 놓았던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형장에서도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당당하게 참수형을 받았다. 이들의 형을 지켜보던 많은 백성들은 이들의 장엄한 죽음에 크게 감탄하며 굳은 절개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정약종은 형장에서 구경꾼들에게 큰 소리로 "여러분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해 죽음은 당연한 일이오"라고 외친 후 "땅을 내려다 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것이 더 낫다"며 머리를 하늘을 향한 채 2번이나 칼을 받고 순교했다.
이존창의 경우는 칼을 6번이나 맞은 다음 목이 떨어졌고, 홍교만은 "천주교를 위해 죽는 것이 행복"이라는 유언을 남긴 후 순교했다. 최필공은 망나니가 단번에 그의 머리를 자르지 못하자 흥건히 젖은 피를 보고 "보배로운 피"라고 말한 후 숨을 거두었다. 이들의 시신을 형장에서 3일간 방치되었다가 가족들과 신자들에 의해 수습돼 안장됐다.
조선 천주교회는 이들이 순교했다는 비보에 크게 비통해 하면서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순교의 화관을 쓴 교회 지도자들의 모범을 따를 것이라는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평화신문, 621호(2001년 4월 8일), 리길재 기자>
[신유박해 역사신문] 주문모 신부 자수
1801년 4월 24-30일
주문모(42, 야고보) 신부가 4월24일 의금부에 자수했다. 중국인으로 우리나라에 입국해 조선 천주교회를 사목한 첫 사제인 그는 신유박해가 터지자 중국으로 피신하기 위해 의주 변문 인근까지 갔다가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입게 될 피해가 너무 클 것 같아 다시 서울로 되돌아와 이날 자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 신부 체포에 현상금까지 걸었던 조정은 그의 자수에 크게 놀라는 반응이다. 영부사 이병모는 27일 "사학의 괴수 주문모가 자수했다"고 순조 임금에게 보고했다. 이에 순조는 무엇 때문에 자수를 했고 용모는 어떤지 등을 자세히 물은 다음 의금부에서 주 신부를 추국할 것을 명했다.
주 신부는 추국에서 의금부 관리가 조선입국 이유를 묻자 "내가 조선에 온 목적은 단 한가지, 참된 종교를 전해 불쌍한 백성의 영혼들을 구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주 신부는 중국인이었기에 족쇄만 찼을 분 심문 과정에서 아무런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 그는 1801년 2월22일 대왕대비 김씨가 천주교를 금하는 '척사윤음'을 발표하자 교우들의 권유에 따라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피신 생활을 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추국안에 따르면 주 신부는 1759년 중국 강소성 소주의 곤산현에서 태어나 스무살 때 혼인하였으나 2년 뒤 상처하였고,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실패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또 1785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설립한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한 뒤 첫 졸업생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고, 1792년 4월1일자로 교황 비오 10세로부터 조선 포교지의 지도를 위임받은 구베아 주교의 명을 받고 1794년 12월3일 조선 밀사 지황(사바)의 안내를 받아 조선에 입국해 지금까지 7년 여간 조선 천주교회를 사목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평화신문, 621호(2001년 4월 8일), 리길재 기자>
[신유박해 역사신문] 강완숙 및 신자 왕족 부인들 체포
(1801년 4월 6일-30일)
조선 천주교회 초대 여성회장 강완숙(41, 골롬바)이 그의 아들 홍필주(필립보)와 몸종들과 함께 4월 6일 체포됐다.
강완숙은 조정으로부터 천주교인 중에서도 가장 간악한 요녀로 취급돼 체포 우선 대상자로 수배돼 왔었다. 의금부 관리들은 그녀에게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다그쳤으나 강완숙은 끝내 함구했다.
또 천주교를 믿어왔던 왕족 은언군 이인의 처 송씨와 그의 아들 이담의 처 신씨가 25일 체포됐다. 이들 두 왕족 부인들은 선대 정조 임금의 서제인 은언군 이인과 그의 아들 상계군 이담이 반역죄에 연계돼 강화도로 유배되자 거처인 경희궁에서 강완숙으로 부터 교리를 배운 후 주문모 신부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다.
이들 두 왕족 부인들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됐다는 사실은 고문을 이기지 못한 강완숙의 여종이 실토하는 바람에 드러났다.
이들 왕족 부인들을 국청하던 시임 대신, 원임 대신 및 금오 당상이 대왕대비에서 사약을 내릴 것을 청하자, 대왕대비는 26일 이들이 체포된 지 하루 만에 사사(賜死)를 명했다.
<평화신문, 621호(2001년 4월 8일), 리길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