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신유박해 역사 신문 2호(1801년 3월)

2001. 3. 5. 오후 4:5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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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 역사신문 2호] 조선교회 지도자 대거 체포

 

 

1801년 3월18~27일

 

지난 2월 대왕대비 김씨의 척사윤음 발표로 천주교 교인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진 가운데 긴급 체포대상자로 지목됐던 교회 지도자들 중 정약종(41, 아우구스티노)과 권철신(65, 암브로시오)이 24일 체포됐다.

 

이에 앞서 22일에는 정약용(39, 요한)과 이승훈(45, 베드로), 홍낙민(60, 루가)이 붙잡혔고, 남인학자 중 천주교를 지지해온 이가환(59) 역시 같은 날 의금부로 압송됐으며, 27일에는 홍교만(프란치스코 사베리오)과 그의 아들 홍인(레오)이 잇따라 체포됐다. 또 충청도(내포)에서는 '내포의 사도'로 불리며 신자들의 존경을 받아오던 이존창(49, 루도비코 곤자가)이 18일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이들 천주교 지도자들은 대부분 나라가 금하는 사학신봉 죄목으로 붙잡혔으나 천주교 대중화를 위해 한글로 된 교리서를 집필해온 정약종은 이들과 달리 '불경'과 '모반'의 죄목이 추가됐다.

 

정약종은 심한 고문이 동원된 신문 과정에서 관리들에게 천주교의 진리를 설명하면서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을 배반하는 일은 절대로 동의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가장 연장자인 권철신은 신문에 이기지 못해 배교하는 신자들의 소식을 듣고 "가련한 사람들, 저들은 신앙을 저버림으로써 그들의 고통으로 의당 받게 될 영광을 잃게 되었다"고 애석해 하면서 배교하지 않도록 옥중에서 신자들을 격려했다.

 

조선 천주교회는 이들이 체포됨에 따라 중인과 서민, 천민 계층의 교회 구성원들의 정신적 지도자들을 모두 잃는 불행을 겪게 됐다. 또 일부 양반계층의 신자들은 다음 차례로 자신들을 잡기 위한 포졸들이 곧 닥칠 것임을 예상하고 피신하지 않고 기도로 마음을 다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주교측은 충청도 지방까지 박해의 불길이 급속히 퍼져가는 것에 우려를 금치 못하면서도 지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체포된 교회 지도자들을 대신할 인물들을 선정하는 등 교회 재정비 작업에 돌입했다.

 

차세대 교회 지도자로 촉망받고 있는 황사영(27, 알렉시오)은 서울을 떠나 산세가 험한 충청도 제천 배론 땅으로 잠적, 조선교회 재건을 위해 중국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으로 한 정통한 소식통이 밝혔다.

 

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고 신앙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아직 천주교가 전파되지 않은 경상도와 산간지역 등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이주해 비밀교회 형태의 '교우촌'을 형성할 것이라고 그는 전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그간 대부분 중인과 서민계층의 천주교 신자들이 옥에 갇혔던 것과 달리 이번에 체포된 이들 모두가 양반계층의 저명한 남인학자들임을 주목, 이번 사건은 대왕대비의 힘을 입고 권력을 독점한 노론 벽파가 정권 기반 유지를 위한 전면적 숙정작업의 신호탄이라고 해석했다.

 

<평화신문, 616호(2001. 3. 4.), 리길재 기자>

 

 

3월 체포된 조선 천주교 지도자

 

△ 정약종(1760~1801) : 정하상(바오로)와 정정혜(엘리사벳)의 아버지요, 유소사(세실리아)의 남편(이들 셋은 모두 성인품에 오름). 진주 목사 정재원의 셋째 아들로 경기도 마재에서 태어났고 정약전, 정약용과 형제. 둘째형 약전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 1800년 주문모 신부로부터 명도회 회장으로 임명됐다. 교리 강습과 전교에 큰 공헌을 남겼음. 한국 천주교회 최초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 와 '성교전서'를 저술.

 

△ 정약용(1762-1836) : 1784년 요한으로 영세.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교회와 멀어졌다. 1801년 체포된 후 배교, 유배형 받음. 문집으로 '여유당전서' 있음.

 

△ 권철신(1736-1801) : 성호 이익의 제자로 호는 녹암. 남인계 학자들의 대부로 일찍이 서학 사상을 수용 1779년 겨울 천진암 강학회를 개최했다. 그가 서학을 처음부터 부정했다면 한국에 천주교가 도입되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평.

 

△ 이승훈(1756-1801) :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요 교회 창설의 주역. 호는 만천. 권철신 문하에 수학.1783년 겨울 중국 북당 천주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음.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때 겉으로 교회를 떠난 것처럼 행동하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제도'를 주도. 그 후 독성죄 논의가 일자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 성직자 영입운동을 시작함. 문집으로 '만천유고'가 있음.

 

△ 홍낙민(1740-1801) : 충청도 예산 출신으로 정약용, 이승훈과 사귀며 천주교 신앙 받아들임. 가성직제도 시절 '신부'로 활동. 정언 벼슬을 지낼 때 정조의 강압으로 한때 배교한 적 있으나 다시 교회로 귀의함.

 

△ 이존창(1752-1801) : 충남 예산 여사울 출생으로 단원으로도 불림. 1776년 권철신 문하에서 글을 배우다 그의 아우인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에게 영세 입교함. 충청도 지방에서 선교를 하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석방됐고, 1795년 다시 체포돼 옥중생활과 연금생활을 하다 천안 행수 군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평화신문, 616호(2001. 3. 4.), 리길재 기자>

 

 

조선 천주교 문서 담긴 정약종 책상자 적발

 

1801년 3월 13일

 

천주교 지도자들로 당국의 수배를 받아오던 중국인 주문모(49, 야고보) 신부와 명도회 회장 정약종(41, 아우구스티노)이 쓴 서한들을 비롯해 천주교 서적과 상본들이 가득 담긴 책롱(冊籠, 책상자)이 적발돼 파문이 커지고 있다.

 

삼법사(三法司) 소속 금제특별단속반은 13일 정약종 머슴 임대인(토마스)이 주인의 책롱을 옮기던 중 한성부 동문 인근에서 이를 수상히 여긴 밀도살 감시원의 불심검문에 의해 체포됐다면서 책 속에는 천주교인들의 우두머리들이 쓴 편지들과 천주교 서적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고 밝혔다. 임대인은 경기도 포천에 거주하는 남인학자 홍교만(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집에 임시로 보관했던 주인의 책 상자를 서울 아현 황사영(27, 알렉시오) 집으로 몰래 옮기던 도중이었다.

 

금제특별단속반의 한 관리는 이와 관련 "나무 장사꾼으로 변장한 죄인이 농을 마른 솔잎으로 싸 가지고 해질녘에 거리로 나왔는데 농이 클뿐 아니라 솔잎도 엷고 엉성해 밀도살한 쇠고기를 담은 상자인 것 같은 의심이 들어 관청으로 끌고 갔다"며 "관청 관리들이 농에 든 물건을 보고 모두 놀라 곧장 그 농과 죄인을 포청으로 압송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포도청은 이 책 상자에 들어있던 문서들을 면밀히 조사, 이를 근거로 체포조를 구성해 조선 천주교 지도층 인사 소탕 작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조선 천주교 주요 인물들은 임씨의 체포와 책 상자 발각 사실을 알고 모두 잠적한 상태다.

 

한편 순조(11) 임금을 대신해 수렴청정 중인 대왕대비 김씨(정순왕후)는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고 정보가 새어나간 것에 대노해 판윤 이집두, 좌윤 윤동만, 우윤 윤장렬, 포장 이유경 등 고위급 관계자들에 대해 그 책임을 묻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대왕대비 김씨는 "사학의 문서를 적발했으면 급히 임금을 뵙기를 청해 중죄인을 신문할 것을 청하거나 대신에게 보여 엄중하고 비밀스럽게 처리했어야 마땅한데, 경솔하게 포도대장이 이를 허술하게 취급해 사실이 밖으로 세어나가 죄인들의 도피하는 폐단을 초래했다"며 "어찌 이같은 기강이 있을 수 있냐"고 대신들을 크게 나무란 것으로 알려졌다.

 

<평화신문, 616호(2001. 3. 4.), 리길재 기자>

 

※ 삼법사 금제특별단속반

삼법사는 형조와 한성부, 사헌부의 세 곳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금제특별단속반은 한성 성내에서 승려나 무당이 출입하는 것, 돼지를 키우는 일, 난잡한 행동을 일삼는 것 등을 단속하고, 성 밖에서는 어리아이 무덤 근처에서 밭갈이를 하거나 산 밑에 흙을 파내거나 말이나 소를 함부로 도살하는 행위 등을 단속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부서다.

 

 

정약종 책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었나

 

포청이 13일 적발한 정약종의 책롱에 들어 있는 문건들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책롱에는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의 편지를 비롯해 천주교 서적들과 상본들이 가득 있었다고 하는데 문제는 편지의 내용이 무엇이며 천주교 서적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천주교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정약종이 주문모 신부와 교환한 서신들 뿐 아니라 다른 5, 6명의 신자들과 주고받은 편지들도 포함돼 있을 것이라면서 2년 전인 충남 보령에 사는 방백동의 집에 숨겨진 궤짝 속에서 100여명의 천주교인 인명록이 발견됐던 것처럼 주요 신자들의 인명록이 포함돼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당시 방백동의 집에서 발견된 인명록에는 서울과 시골에 사는 천주교도 100여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첫머리에 이가환이 나오고 정약종, 약전, 약용 형제, 홍낙민, 이가양, 그리고 상민과 천민 계층의 신자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었다.

 

이 관계자는 또 주 신부가 정약종과 함께 조선교회 사목에 대해 서로 깊은 의논을 나누어 왔던 것을 토대로 짐작해 볼 때 책롱에서 발견된 다수의 편지들은 조선교회 상황을 면밀히 알 수 있는 중요한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책롱 속에 있던 천주교 서적은 정약종이 직접 지은 '주교요지' 원본일 가능성이 높다고 그는 전했다. '주교요지'는 한글로 만든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로 상하 두 권으로 구성돼 있다. 상권은 천주의 존재, 사후의 상벌, 영혼의 불멸을 밝히면서 이단을 배척하는 일종의 호교서이다. 하권은 천주의 강생과 구속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

 

아무튼 책롱이 적발됨에 따라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을 비롯해 천주교인들에 대한 색출 작업 도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평화신문, 616호(2001. 3. 4.), 리길재 기자>

 

 

천주교도 석방한 신대현 포도대장 해임

 

1801년 3월 23일

 

신대현 좌포도대장이 옥에 갇혀 있는 천주교 신자들을 석방하고 체포를 중단하는 등 천주교인들에게 지나친 관용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23일 해임됐다.

 

대왕대비 김씨는 그의 후임으로 임율을 좌포도대장에 임명하고, "석방한 모든 천주교 신자들을 다시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신대현은 지난 2월 사학 금지령이 발표되면서 대왕대비에 의해 좌포도대장으로 중용됐으나 임명 한달여만에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번 해임 조치는 소북의 박장설, 노론의 이서구, 남인의 최현중 등이 천주교 신자들을 석방하는 것에 대해 잇따라 상소를 올려 그의 파직을 청원해 이루어졌다.

 

신대현은 좌포도대장으로 부임한 후 최필공(토마스), 최필제(베드로), 최창현(요한), 임대인(토마스) 등 주요 천주교 신자 4명만 잡아두고 포청 옥에 가득 차 있던 천주교 신자들을 모두 석방했었다.

 

대왕대비는 같은 날 형조판서 김재찬을 파직하고, 병조판서 서정수를 판의금부사로 제수하는 한편 천주교 신자들을 신문하는 국청을 설치토록 하고 책임자로 영부사 이병모를 임명했다. 또 포청 옥에 갇혀 있던 4명의 신자를 의금부로 옮겨 신문할 것을 명했다.

 

대왕대비는 이와 함께 상소를 올린 박장설에게는 '사학인 천주교를 공박하고 바른 도인 유교를 호위한 공'을 인정해 아경(亞卿)으로 부르게 했다. 아경은 육조 참판 등을 존경해 부르는 호칭이다.

 

대왕대비의 이 같은 조치에 대해 천주교측 관계자는 "국청을 열고 체포된 신자들을 의금부로 이송하는 것은 역적으로 몰아 그에 따른 벌을 주기 위한 조치"라며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예상했다.

 

조선 법률에 의하면, 관직이 있는 자와 불경죄나 반역죄로 기소된 사람들만 '의금부'에서 다루고, '포도청'은 소유권을 침해하는 범죄만을 취급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형조에서는 아무 공직이 없는 양반이나 서민들의 소송을 취급하고 있다.

 

<평화신문, 616호(2001. 3. 4.),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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