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 200주년 특강 지상중계
◎ 신유박해의 전개와 그 이후의 교회 공동체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는 신유박해 200주년(2001년)을 앞두고 매달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신유박해 200주년 특강'을 마련하고 있다. 8월2일 여섯 번째로 열린 '신유박해의 전개와 그 이후의 교회 공동체'에 관한 전수홍(부산가톨릭대학교) 신부의 특강을 요약 소개한다. <편집자>
한국천주교회 역사가 피로 증거한 박해의 역사라고 할 때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는 최초의 전국적 규모의 대박해였다. 가성직자 제도와 주문모 신부의 입국(1794)을 통해 조선천주교회는 1만명 정도의 교우를 지니며 나름대로 성장을 해가던 시기에 이같은 대박해를 당해 교회 조직과 발전에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반면 순교선열의 피가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씨앗이 되어 연연히 이어져 오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글에서는 신유박해의 경과를 살펴보고, 박해 후 폐허가 된 조선교회가 어떻게 다시 재건되고 지속되어 왔는지를 살펴본다.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던 정조가 죽고 11세 어린 나이에 순조가 즉위하자 그의 계증조모이자 벽파였던 김 대왕대비는 1800년 11월 이후부터 교회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다. 최필공(도마), 최필제(베드로), 최창현(요한) 등이 체포됐고, 이듬해 1월 사학을 금하는 교서가 발표되면서 조선교회 창설의 중심 인물들이 체포돼 순교하게 된다. 이 때 이가환, 권철신이 옥사했고, 이승훈, 정약종, 홍낙민 등이 순교했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주문모 신부는 박해기간 동안 강완숙(골룸바) 집에 거처하고 있었으나 김여삼의 밀고로 거처가 알려지자 정조의 서형 은언군의 처 송 마리아의 집으로 피신했다.그러나 2주 후 자신만 자수하면 박해가 누그러질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의금부에 자수했다. 하지만 주 신부의 의도와 달리 박해는 더욱 확대되었다. 박해는 전주지방에서도 발생했는데 200여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이중 많은 이들은 배교했으나 유항검, 유관검 등이 순교했다.
신유박해는 9월 황사영(알렉시오)의 체포를 계기로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다. 그는 2월에 체포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7개월이 넘도록 제천에 피신해 백서를 작성했다. 이 백서는 황사영 혼자서 구상하고 쓴 글임에도 조정에서는 정약용, 이치훈과 함께 공모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문초했으나 이들과 관계가 없음이 밝혀져 두 사람은 귀향가고 황사영은 11월 대역불도죄가 적용돼 처형당했다.
연소한 순조가 박해의 이런 잔악상을 알게 되자 이 사건에 관여해 관용정책을 펴게 했고, 이에 김 대왕대비도 더 이상 수색을 하지 말 것을 명하고 국청을 해체시켰다. 또 박해기간 동안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처형한 조정은 청나라에 대한 화근이 걱정이 되어 박해의 정당성을 알리는 '토사주문'서를 청나라 황제 인종에게 바치게 했다. 그리하여 12월에는 '토사교문'이 반포됨으로써 박해가 정식으로 종결된다.
신유박해의 희생자 수는 기록에 따라 약간씩 다르나 대체로 처형된 자가 100여명, 유배자는 400여명으로 도합 5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수도와 경기도, 충청 및 전라도가 주요 박해 무대였다.
유래없이 잔악했던 신유박해로 조선천주교회는 완전히 황폐화됐다. 그러나 로마제국 시대의 박해를 보듯이 신앙의 뿌리는 아무리 강한 외적 박해로도 뽑지 못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1802년 용인 산속에 살던 교우 40여명을 강원도 산골로 이주시켜 강원도에 신앙공동체를 새로 탄생케 했고 권기인, 이여진, 정약용, 정하상 등과 같은 인물이 교회 재건을 위해 활동하도록 했다.
신유박해 이후 살아남은 신자들은 수도와 박해지를 피해 강원도와 경상도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리고 배교자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 새로운 입교자도 늘었다.
<평화신문, 2000년 8월 6일 연중 제18주일 제589호, 정리=박주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