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신유박해 과정과 결과

2000. 11. 5. 오후 1:5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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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 과정과 결과

 

 

◎ 한국 교회 첫 전국규모 박해 ... 200여명 순교

 

1801년의 신유박해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이래 첫 전국 규모의 박해였다. 정순왕후(대왕대비 김씨)가 공식 박해령인 '척사윤음'을 반포하면서 시작된 신유박해는 1년간 지속됐다.

 

신유박해가 지엽적으로 일어났던 이전의 명례방 사건이나 을사추조적발사건, 제사 폐지 문제가 원인이 된 신해박해 등과 달리 '전국 규모'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 배경에는 크게 3가지 요인이 있다.

 

▲ 배경 및 과정

 

첫째, 정치적 요인으로 남인의 영수 채제공이 1799년 사망하고 다음해에 정조가 사망함으로써 박해를 막아 줄 배경이 없어져 버렸다. 둘째, 사상적으로는 주문모 신부 체포 과정에서 발생한 을묘박해 이후 반서학 사상이 정치적인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셋째, 사회적으로 제사 폐지 등 천주교 교리가 윤리 체계와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어 이를 박멸해야 한다는 인식이 위정자들 사이에서 팽배했다.

 

신유박해는 1801년 1월9일 김여삼의 밀고로 조선교회 총회장 최창현(요한)이 체포되면서 시작됐다. 다음날 10일 어린 순조 대신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척사윤음을 반포, 공식화했다.

 

박해령이 떨어지자 가장 먼저 권철신, 정약용, 이벽 등 남인계 인사들이 체포됐다. 또 신자들을 철저히 색출해 내는 방편으로 '오가작통법'을 실시, 신자가 발각되면 이웃 5가정에게 연대 책임을 물었다.

 

1월19일 임대인(토마스)이 황사영(알렉시오) 집으로 천주교 서적과 주문모 신부정약용 집안의 서한을 옮기다 발각된 '책롱사건'은 신유박해를 더욱 부추켜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강완숙 등이 체포됐다.

 

박해는 주문모 신부 체포, 황사영 백서사건 등이 터지면서 서울에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확산됐고, 12월18일 채제공의 관직을 추탈, 남인 세력에게 재기 불능의 타격을 준 다음 잠잠해졌다.

 

▲ 박해 결과

 

신유박해는 약 1년간 지속되면서 전국적으로 200여명에 이르는 신자들을 처형했다. 조선 천주교회는 이 박해로 유일한 성직자인 주문모 신부와 지도층 인사들을 잃었고 교회 조직은 대부분 와해됐다. 더불어 신자들의 신분 계층도 양반중인층이 감소하는 대신 상민천민층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교회서적이 대부분 압수소실돼, 이후 교리 학습이나 전교활동은 대부분 구전으로 이루어지게 됐다. 또 비밀 교회인 교우촌이 형성, 신자들이 경상도 북부와 충청도 서부, 경기도 남동부, 강원도 남부 산간 지역으로 숨어 들어가 복음을 더 널리 전했다.

 

아울러 박해가 그치면서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신자들이 늘었고, 순교 신심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평화신문, 2000년 8월 20일 연중 제20주일 제591호,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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