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
최대 번화가인 명동에 자리잡고 있는 명동성당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이자 상징이다.
젊음의 패션이 가득 넘치는 도심 한복판에 한국교회의 상징물인 명동성당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 자체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그나마 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민의의 장이 되다시피한 성당 앞은 요즘도 시위와 집회가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성당 언덕을 올라 넓은 마당으로 들어서면 밖의 소란과 시끄러움은 오간 데 없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순례객을 맞이한다.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딕양식 건물이자 사적 제258호라는 것만으로도 여느 성당과는 다른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명동성당의 진가는 건물 외형이 아니라 그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역사에서 느낄 수 있다.
우선 명동성당하면 자연스럽게 김범우라는 인물이 떠오른다. 통역관이었던 그는 초기 한국교회 정착과정에서 명례방(현 명동성당 일대)에 있는 자신의 집을 신앙집회 장소로 내놓았다가 추조(형조) 관리들에게 적발돼 고초를 겪은 선각자다.
1785년에 일어난 소위 '을사추조 적발사건'으로 그는 형조에 끌려가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 경남 밀양으로 귀양가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천주 신앙을 신봉했다. 이렇듯 명동성당의 역사는 자신의 부귀영화를 천주 신앙과 맞바꾼 수많은 이들의 땀과 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명동성당에 찾아와 건물만 휙 둘러보고 빠져나가지만 성당 건물 못지 않게 한국 교회사를 응축하고 있는 곳이 바로 지하 성당의 유해실이다. 성당 밑에 있는 이 유해실에는 조선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를 비롯해 모두 9위의 성인과 순교자 유해가 모셔져 있다.
번잡한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조용한 지하성당에서 묵상에 잠겨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복음을 설파하다 박해의 칼날에 쓰러진 이들 성인과 순교자들의 거룩한 죽음을 생각하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지하성당에서 나와 뒤편으로 돌아서면 아담한 성모동산이 나온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성모무염시태상이 있는 동산에는 벌써 가을의 자락이 내려 앉았다. 성모동산에 앉아 있으면 도심 한복판에 이런 묵상 공간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다시 성당을 돌아 밖으로 나오면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가톨릭회관이다. 서울대교구의 각종 단체 사무실이 빼곡히 들어찬 이곳을 둘러보면 참으로 많은 일꾼들이 교회를 위해 땀 흘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 김범우는 누구인가
김범우는 명례방 신앙공동체를 결성한 한국 천주교회사의 태두격인 사람. 1785년 명례방의 자기 집에서 신앙집회를 개최하다 형조 관리들에게 발각돼 경남 밀양으로 귀양간 김범우는 귀양살이 동안에도 주민들에게 공공연하게 천주교를 신봉할 것을 설득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를 가르쳤다”고 샤를르 달레의 기록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혹독한 매질의 여독으로 2년 동안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뒤 후손들은 만어산을 중심으로 삼랑진, 단장면의 범귀리 등에 살면서 신앙을 전파했다. 그의 묘는 1989년 후손 중 한명의 증언으로 경남 밀양군 삼랑진읍 용전동 산 102번지 만어산 중턱에 있음이 확인됐다.
그의 묘를 발굴할 당시 십자가 형태로 놓인 큰 돌들이 발견돼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현재 삼랑진에 있는 사회복지시설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구내에 김범우 기념성당을 건축하는 등 김범우 순교자 현양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평화신문, 2000년 9월 3일 연중 제22주일, 제593호, 김정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