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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33주간 수 루카 19, 11-28- 예수님께서 알려주려는 것...
2박 3일간의 사제 연수 잘 다녀왔습니다. 모처럼 교구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한자리에 모여 의미 있는 시간을 갖고 돌아왔습니다. 솔직히, 강론 부담이 없어서 좋았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말도 안 되는 강론 듣지 않아서 좋으셨죠? 비록, 그 기간이 하루라서 서로에게 아쉬움이 남지만, 변함없이 말도 안 되는 강론을 시작하겠습니다.
‘푸쉬킨’ 이란 러시아 시인이 있습니다. 시인은 부인과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군인으로부터 결투 신청을 받습니다. 당시 풍습으로는 상대방의 부인이나 애인을 뺏어오기 위해 결투를 하곤 했답니다. 그러나, 시인은 결투에서 패해 죽어가는 순간, 부인이 자신을 배신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너무나 사랑했던 부인이기에, 배신의 충격은 말로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은 명시를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리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그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실제 우리는 가급 적으며 좋은 생각을 하려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심리적, 정신적 측면을 넘어 신체적으로까지 큰 해를 끼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더욱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을 하려 합니다. 상대방의 모습 속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먼저 보려하고, 어떠한 사건을 겪게 되더라도 그 안에서 이로운 면을 찾으려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삶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품고 있는 것과 입으로 말해지는 것의 삶에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인 생각, 좋은 말을 하며 살아간다면, 마지막 모습 역시 좋은 결과를 맺을 것이고, 부정적인 생각, 나쁜 말을 하며 살아간다면, 마지막 모습 역시 그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미나의 비유” 입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면서 자기 종들에게 한 미나씩 나눠주며 돈을 벌라고 말합니다. 왕권을 받고 돌아와서는 종들을 불러 셈을 합니다. 돈을 벌었다는 종에게는 칭찬을 해주고, 돈을 벌지 않은 종에게는 화를 냅니다. 이러한 모습은, 능력을 중시하는 오늘날에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족의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상선 벌악의 하느님에 대해서와 우리에게 한 미나를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알려주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귀족은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믿을 교리에 보면 하느님은 상선 벌악의 하느님입니다.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나쁜 일을 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십니다. 실제, 복음에서도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번 종에게는 열 고을을... 다섯 미나를 번 종에게는 다섯 고을을 다스릴 권한을 주십니다.
그러나, 주인을 무서운 사람으로 생각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종은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벌 받는 모습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이 종은 자신의 주인을 “냉혹하고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폭군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나머지 종들과는 달리, 이 다른 종은 자기 주인을 미워하는 사람들처럼 주인을 대하고, 이해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자기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주인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주인에 대해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인의 심판 역시 귀족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그리고 다른 종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폭군이 아닙니다. 종이 게으르고 악하다 해서 벌을 내리거나, 매를 든 것은 아닙니다.
종이 말한 그대로... 종의 입에서 나온 그 말 그대로 종을 심판할 뿐입니다. 자신이 주었던 한 미나를 빼앗을 뿐입니다. 그렇게 무자비한 주인이 아닌데, 무자비하다고 생각하고 말하다 보니, 정말 자기에게 무자비한 주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먼 훗날 하느님 앞에 섰을 때, 하느님께 많은 용서를 받는다며 자신에게 아픔과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해주고,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갔던 사람은 그러한 사랑 가득한 하느님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남을 비방하고 시기, 질투하며 살아간다면... 남을 용서해 주지 못하고 정의와 심판을 자세로 살아간다면... 그러한 하느님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분명, 하느님은 상선 벌악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실 때도, 우리의 말과 행동을 기준으로 내리는 분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한 미나를 주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사용할 수도 있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사용할 수도 있고, 남을 도와주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한 미나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들 중에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거나, 남들보다 좀 더 쉽고 편하게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 받은 1미나 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우리에게 있는 한 미나를 다섯 미나, 열 미나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실제, 우리는 잘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할 수 없다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는 마음으로 주춤거릴 때가 있습니다. 좋습니다. 때에 따라서 그럴 수 있습니다. 다시금 마음을 새롭게 하는데 필요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밝은 면, 좋은 모습 보다는 어두운 면과 부정적인 모습만을 더 크게 보며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심한 죄책감속에 ‘나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존재다.’ ‘나는 신앙생활을 할 자격도... 사랑을 실천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는 생각에 하느님께 받은 소중한 미나를 그냥 묻어버리고 어눌하고 의기소침하게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정의롭고 벌을 내리시는 하느님의 모습만 있고,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의 모습은 없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복음에 주인께 벌 받는 종이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 되어 버립니다.
나는 어떠한 하느님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는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느님께 받은 소중한 한 미나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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