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해 연중 제 33 주간 화요일. 2006. 11. 21. 토평동. 묵시 3, 1-6.14-22. 루카 19, 1-10. 자캐오라는 세관장이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키가 작습니다. 무엇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 키가 작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의 살아온 인생 역정을 알 수 있습니다.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이죠. 이런 사람은 자기 방어가 심하고 무엇인가를 통해 보상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아마도 자캐오에게는 세리라는 직업으로 드러난 것이었을테고, 열심히 한 결과 세관장에까지 올라 부를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가진 열등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그 직업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더 멸시를 받게 됩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에게 한계가 있는 사람, 결점이 있는 사람은 더 부지런해야 합니다. 자캐오는 그들보다 앞서 달려갑니다.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보기 위해서, 내가 얻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서 그는 바삐,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얻으려는 사람은 노력해야 합니다. 자캐오가 보고 싶어 하는 것, 그것은 호기심입니다. 교부들은 자캐오의 이 호기심에 주목합니다. 이 호기심이 바로 믿음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합니다. 호기심이 없는 사람은 도무지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이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그 사람이 웃을 때 어떻게 웃는지, 머리 스타일이 어떤 게 어울리는지, 말투는 어떤지, 하나에서 열까지 궁금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그것을 바꾸어 말해보죠? 주님에 대해 호기심이 있습니까?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십니까? 그분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것인지, 그분의 말투나 그분의 행동, 그분이 가신 곳이 궁금하십니까? 그러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 호기심이 나를 알게 하고 하늘나라로 데리고 갑니다. 자캐오는 이 호기심을 가지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갑니다. 이 돌무화과 나무를 유다인들은 무가치하게 여겼습니다. 아예 이 돌무화과 나무와 접촉하는 것조차 불명예스럽게 여겼습니다.(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던 나타나엘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안다.) 그런 돌무화과 나무에 자캐오가 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보통은 지붕 위로 올라가 구경합니다. 자캐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은 것이고, 부정하다고 여겼기에 집 안으로 들여보내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사람과 소외된 나무. 그러나 그 나무에 오른 자캐오를 예수께서 부르시면서 그 어느 것도 무가치한 것이 없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 소외를 시키지만, 주님께는 모두가 가치 있는 사람이고 소외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캐오야” 예수께서 이렇게 부르실 때, 사실 이 말 한 마디로 게임은 끝입니다. 그분께서 나의 이름을 불러주신다면 그 이후 그 어떤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너의 집에 머물자, 이런 말은 이미 자캐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 말을 들은 순간 모든 것을 받아들였기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캐오라고 부르실 때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캐오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알고 계시고, 그가 그동안 행해왔던 잘못도 아시죠.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캐오를 보시며 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저 “얼른 내려와라.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루카 19, 5)라고만 하십니다. 잘못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끌어안아 주시면서 그가 바라는 것을 얻게 해줍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의 재산을 내놓는 것을 보면 그는 일상에서 자신의 주변을 막아선 벽에 대항하기 위해 남을 등쳐먹는 일을 했지만, 사실은 좀더 나은 삶을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이만 있다면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잘못을 후려치면 그 사람은 더 강하게 반발합니다. 잘못했으면서도 아닌 척 대듭니다. 그러나 그를 믿어주면서 더 기다려줄 때,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결국 상대는 자신을 굽히게 되어 있죠. 부정적인 모습, 닫혀진 모습, 건방진 모습, 이기적인 모습, 그 어떤 모습에도 사실 믿음을 가진 이들은 마음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의 모습도 그런 것입니다. 나의 어떤 모습에도 믿어주고 계시는 분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이 믿음이 자캐오를 변화시킵니다. 자캐오를 변화시켜야지 하고 작정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그를 믿어주었을 뿐인데, 그는 변화됩니다. 내가 그 사람의 삶에 중심이 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의 것임을 인정하고 단지 그 집에 손님이 되려고 하시니 그는 마음을 엽니다. 넌 이래야 돼, 아니 저래야 돼, 이렇게 하지 않고 믿으며 받아들여 주시니 그는 변화합니다. 그러나 의심의 눈초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여전합니다. 그들은 못마땅합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내가 봐왔던 그는 변할 수 없는 사람이고, 약점이 많으며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는 나와 함께 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나와 다른 사람입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부정한 것이라고 투덜댑니다. 나는 변화하지 않은 채 다른 이들에 대해서 비난의 화살만을 쏘아댑니다. 더 나쁩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고, 이리저리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 더 나쁩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자캐오는 이제 자랑스럽습니다. 자신의 약점 앞에 움츠러들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 하면서 굳이 앉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키 작은 것이 콤플렉스였지만,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어섭니다. 모든 이가 듣도록 이야기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거절했던 사람들 보라고 큰 소리로 말합니다.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도무지 자신의 것을 내어놓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보란듯이 말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 8) 이것이 고해성사입니다. 나를 믿어주시는 그분 앞에서, 그분이 아무 말하지 않았지만, 그분 앞에 나를 고백하면서 당신으로 말미암아 더 좋은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 바로 이것이 고해성사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당시에 재산상의 손해를 끼칠 경우에는 그에 20% 정도를 손해액으로 갚으면 됐습니다. 그러나 이 자캐오는 그 이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대화하면서, 주님과의 만남을 계산의 만남이 아닌 진정 나를 알아주는 믿음의 관계, 인정해주는 인격적인 관계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자캐오의 변화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며, 특히나 이 시대를 사는 부자들의 모델이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길목에서 앞서 하늘나라와 부자의 관계에 대해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름대로 선한 삶을 살았다고 하는 부자가 재산 때문에 울상을 짓는 모습과 예루살렘에 더 가까운 장소에서 선하게 살지는 않은 부자 세리 자캐오를 대비시키면서 과연 어느 누가 구원을 받겠느냐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그리고 명확하게 당신께서 답변을 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루어졌다”(루카 19, 9) 예수께서는 이 자캐오를 보시며 지금도 역시 여타의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세리를 관두라고 하시지도 않습니다. 자캐오도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외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으니 못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외적인 것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지 않는 것이죠.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고, 그것은 핑계입니다. 자캐오가 세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의로운 세리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면서 욕하고 멀리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에 굴복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하며 살았지만, 예수께서 계시기에 그분께서 나를 믿어주시기에, 있는 그 자리에서 보란듯이 회개의 삶을 살면 되는 것이죠.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이라는 말은 핑계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이 자캐오를 보시며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루카 19, 9)라고 하시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라고 하시는 것이고,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 사람은 이래서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된다고 규정하면서 사람들을 떨구어 내지만, 나는 모으러 왔다. 너희들은 사람을 잃어버리지만, 나는 사람들을 모은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없기에 그 사람들을 찾아 믿어주고 얻으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나 역시 그분을 믿으면서 잃는 사람이 아니라 얻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 조성호 신부님
2006. 12. 2. 오전 12:57:17
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