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다 - 이회진 신부님

2006. 12. 2. 오전 12:55:34

글자
오늘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을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라는 측면에서가 아닌
셋째 종이 주인에 대해 지녔던 신뢰와 두려움의 측면에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주인은 열 명의 종 모두에게 똑같이 금화 한 개씩을 주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 주인 앞에 나선 종은
금화 한 개(한 미나)를 다시 주인 앞에 내어 놓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루가 19,21)

두 가지 면에서 셋째 종의 생각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첫째는 셋째 종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입니다.
이 셋째 종은 벌주고 심판하는 하느님 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두려워합니다.
맡기지도 않은 것을 찾아가고 뿌리지도 않은 것을 거두어가는 주인이기에
자신이 받은 금화 한 개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그것을 잃게 될 때 (사업을 해서 망하게 된다면)
받을 벌에 대해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엄격하고 지독한 주인을 그는 두려워합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미 두려움의 세계에 빠져
그의 삶을 자유롭지 못하게 옭아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입니다.

둘째는 그 자신의 안전에 대한 사고방식입니다.
종은 두려워합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을 혹시나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누구의 비판도 받지 않기 위해서 그 어떠한 실수도 범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죠.
무사안일(無事安逸), 복지부동, 책임지지 않으려는 마음 뭐 그런 거죠.

그리스도교 신앙은 “기쁨의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며,
또한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보여주시며
그분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 세상에서 “기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두려움과 고통을 달게 받음에 우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가신 금화 한 개는 바로 “기쁨”입니다.

주어진 기쁨 하나를 가지고 우리는 열 개의 또 다른 기쁨을 만들 수도 있고,
다섯 개의 또 다른 기쁨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의 십자가와 다시 오심이 곧 기쁨이 되리라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자 그분께 대한 온전한 신뢰입니다.

신앙이 죄를 짓지 않기 위한 규율과 법조항이라면,
또한 신앙이 벌을 받지 않기 위한 도피처 혹은 두려움을 자아내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가는 그 길을
오늘 비유말씀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다시는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셋째 종이 주인에게 받은 금화 한 개를 수건에 싸서 감추어 둔 것처럼
하느님께 받은 신앙을 사는 이 기쁨을 감추어 두지 않았으면 합니다.
신앙을 살며 기쁨을 얻지 못한다면 신앙을 사는 이유를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하느님은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항상 감사하십시오.”(1데살 5,16-17)라고 이야기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는 하루이길 바랍니다.

“주님, 당신을 아는 것이 어찌 아니 기쁘겠습니까? 당신과 함께 사는 것이 어찌 아니 기쁘겠습니까? 이 기쁨을 모든 것 안에 심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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