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 받는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로서
제2 이사야 예언서의 저자는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종은
이스라엘에게서 영광이 드러날 것이라고 합니다.
날카로운 칼과 같은 하느님의 말씀(히브 4,12; 묵시 1,16; 에페 6,17),
멀리 날아갈 수 있는 화살 같은(시편 57,5; 64,4; 127,4)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종의 사명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갈라지기(B.C. 933-722년) 전의 상태,
즉 야곱이라고 불리던 상태로
이스라엘(창세 25,23; 32,29; 35,10)을 일치시키는 일이라고 합니다.
야곱이 장인 라반의 일을 해주고 얻은 아내들과 자식들이야말로
수고로 얻은 것이었는데(창세 32,25-43; 31,1-18. 36-42)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갈라진 나머지
바빌론에 유배까지 오게 되었는데
이제 머지않아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위로를 합니다.
그런 날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데
수많은 예언자들을 보냈으나 실패했고,
이제 하느님께서 직접 모든 민족들이 보란 듯이
바빌론에서 이스라엘을 데려올 것이고 모든 이가 구원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제2 독서(사도 13,22-26)는
바오로 사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때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셨음을 강조합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뽑았고
그 후손에게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는데,
그 예수님은 구원의 말씀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에 앞서 세례자 요한이 구세주가 오신다는 것을 선포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교회, 즉 우리 자신의 사랑의 짝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57-68.80)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한의 탄생은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엘리사벳에게 커다란 하느님의 축복이었고,
자비를 베푸심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엘리사벳의 임신을 알려준 천사의 말에 의심을 품었던 즈카르야는
별안간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의 풍습대로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하느님께 아기를 봉헌하기 위해 성전에 갔다가
아기의 이름을 붙여주는 문제로 엘리사벳과 친척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아기의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아기의 이름을 묻자
천사를 만난 뒤로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하던 즈카르야가
아기를 요한이라고 붙여야 한다면서
그 입장이 엘리사벳과 같은 것을 친척들이 확인하자
친척들은 대단한 기적으로 깨닫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이름을 즈카르야가 말해주었음은
이 어린아이가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지닌 채로 태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즈카르야의 입도 열리게 되면서,
아기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에 휩싸여
이 사건이 유다의 온 산악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직접 개입하시기 시작하셨음을 암시합니다.
오늘날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우리 조상들은 아기의 이름을 지을 때
미래에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줄 때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을 바라는 내용을 암시합니다.
특히 그 이름 속에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라는 생소한 이름 때문에
친척들은 과연 이 어린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까 하고 궁금해 합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손길이 세례자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으며,
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엘리사벳(루카 1,41-45)과 즈카르야(루카 1,67)에게도 그랬듯이
세례자 요한도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기 위하여 준비하셨던 일이었음을 말해줍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위해 준비하시는 일이
유다의 온 산악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껏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기 시작했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
즉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할 때 남북으로 갈라졌듯이
우리도 역시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거나 느꼈음에도 거부할 때
우리의 마음이 갈라질 것입니다.
또한 즈카르야가 그랬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거부한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더 이상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선포하지도 못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사벳과 친척들 사이에
아이의 이름 때문에 생겼던 긴장과 대결의 모습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이런 긴장의 관계를 해소시켜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사랑의 짝이시라고 선포하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이 들리는 광야에서 오랜 기간 동안 준비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이웃에게 선포하지 못하는 것도
고요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젖어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독서들에서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겪을 당시에는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고 의문이 생겼고,
때로는
원망도 있을 수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아니 나를 당신께로 이끌어주시고자 준비하셨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의 시편 저자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살피시는 정도가 어떤가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다 같이 화답송을 다시 읽어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