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용서는 전적으로 주님의 권한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나
오늘 제1 독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 독서의 바로 앞의 부분(12,1-6)에 나오는 내용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 내용은 나탄이 다윗에게 죄인임을 인정하도록 비유를 드는데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잡아서 손님 대접을 했다는 것입니다.
나탄의 이 비유를 듣고 다윗이 화를 내자
나탄은 “바로 다윗 당신이 그런 사람이오.”(12,7ㄴ)라고 합니다.
나탄은 다윗에게
주님께서는 사울의 손아귀에서 다윗을 구해주셔서 어렵게 왕이 되게 해주셨고,
주님의 보살피심으로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는 상황에서
다윗은 자기 부하인 우리야를 치열한 전쟁터로 보내 죽게 하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차지했기 때문에 주님의 진노를 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탄은 다윗이 주님의 축복을 무척 받았음에도 의롭게 살지 않고
부정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다윗 집안에 칼부림이 있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그러자
다윗은 즉시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자
인간의 행위를 정의대로 갚아주시는 주님께서는
다윗의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붙이려던 진노를 거두시고 용서해주십니다.
오늘 제2 독서(갈라 2,16.19-21)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이 나오는 내용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적대 관계에서 우정의 관계로 돌아서게 되었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아갔으며,
율법에서 믿음으로 삶의 방법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핵심적인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면서 나의 삶을 이끌어주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의 은총과 그분께 대한 믿음 때문에 의롭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럼에도
율법(구약)을 지켜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신약)을 아무런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에
내 멋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임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7,36-50)은
바리사이의 식사 초대를 받으신 자리에서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가르침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바리사이의 초대에 즉시 응하시고
그와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
사회적으로 아니 공개적으로 죄인으로 인정되는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는 그 여인의 회개와 사랑의 행위를 그대로 받아주시자
바리사이가 속으로 이
여인은 이 고을에서는 죽어야 마땅한 죄인으로,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형편없는 사람이며 예언자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사실 여인이 행한 행동은
예수님 시대에 부인이 남편에게,
혹은 딸이 아버지에게 했던 행위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여인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구약성경의 전통에 따라서 남편으로 알아 뵙고
자신의 신앙과 사랑을 최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참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사이는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더욱 이상하게 판단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통속적인 생각을 단죄하시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눈물을 흘리는 행위를 회개하는 행위였으며,
당신께 대한 사랑의 행위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바리사이의 생각대로라면
만일 예수님께서 예언자라면
그 여인이 어떤 직업(창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보고 예언자가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특이한 사실은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시는” 예수님(요한 2,25)께서는
속으로 중얼거리는 바리사이의 생각은 알아차리시면서
여인의 과거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만한 자의 탓은 알아보시지만
회개하는 이의 잘못은 모두 덮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제껏 침묵으로 일관하시던 예수님께서는
별안간 바리사이인 시몬을 부르시자,
그는 얼떨결에 “스승님”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이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하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느닷없이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 시몬을 부르셨고,
그 바리사이 시몬을 학생으로 취급하십니다.
그리고는
마치 오늘 제1 독서의 앞부분에서
나탄이 다윗에게
손님 접대를 위해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잡았다는 비유를 들어
다윗이 저질렀던 죄악을 지적하듯이
채무자와 채권자의 예를 시몬에게 말씀하시면서
바리사이의 나쁜 태도와 생각을 지적하십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이
채무자와 채권자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것을 즐겨했듯이
예수님께서도 똑같은 예를 들어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전에 있었던 여인의 행위를 그대로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 대한 더 큰 사랑 때문에 회개와 사랑의 행위를 했다고 강조하시고,
당신의 식사에 초대한 바리사이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적게 사랑하는 것이라고 암시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회개와 사랑의 행위로 죄의 용서를 청하는 여인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보았으나
자신의 식탁으로 초대하여 함께한 바리사이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또 다시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속으로 중얼거리는 바리사이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시지 않고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직업이나 과거의 잘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개와 사랑의 행위가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시고,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리사이에게는
심판과 두려움을 남겨주시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회개하는 죄인인 여인에게는 구원과 평화를 남겨주십니다.
채무자와 죄인인 여인의 경우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이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과 당신을 믿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평안히 가거라.”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 봅시다.
우리야의 아내처럼 주님 앞에 억지로 끌려온 것입니까?
아니면
복음의 여인처럼 자진해서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까?
나탄의 말을 듣고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다윗과 같습니까?
아니면
채권자와 채무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바리사이와 같습니까?
겸손과 믿음으로 죄를 고백한 다윗과 복음의 여인이 죄를 용서받은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고,
잘못이 덮여진 것이며,
하느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되었습니다.
겸손과 믿음이 없으면 하느님께로 돌아서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고백성사 역시 겸손과 믿음이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에 “나는 행복하여라.” 하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겸손과 믿음으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신앙을 고백할 때
주님이야 말로 우리의 피난처이고 우리를 구원해주실 분이십니다.
겸손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