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20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마태오 6장 1-18절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계란 프라이를 만들며>
형제들을 위한 아침식사로 계란 프라이를 만들 때였습니다. 익숙한 솜씨로 계란 하나를 들어 ‘탁’ 치고는 잘 달궈진 프라이팬 한 가운데로 정확하게 깔았습니다.
그런데 계란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노른자가 제 형태를 유지해줘야 계란 프라이 모양이 나는데, ‘팍’ 터져버렸습니다. 색깔도 ‘노란’게 아니라 시커멓게 변색되었습니다. 냄새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썩은 것입니다.
외양은 다른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이 동글동글하나 속은 썩을 대로 썩은 계란을 바라보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의 겉은 정말 그럴 듯 했습니다. 멋지게 옷을 차려입었습니다. 잘 먹어서 그런지 혈색도 좋았습니다. 자선도 많이 베풀어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기도는 또 얼마나 열정적으로 바치는지? 가르침 또한 훌륭해서 다들 우러러 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철저하게도 달랐습니다. 위선과 사악으로 가득 찼습니다. 내면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바리사이들은 기를 쓰고 외면의 치장에 몰두했습니다.
사람 마음속을 다 꿰뚫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위선과 이중성을 어찌 파악하지 못하셨겠습니까?
한없이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셨던 예수님, 온유와 부드러움의 극점에 서 계셨던 예수님, 그래서 웬만해서는 분노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이셨지만 날카로운 직책을 칼을 드실 때가 있었습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였습니다.
① 하느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 메시아로 오신 당신을 끝끝내 모른 척 하는 사람들, 그래서 자신들의 코앞에 닥친 구원을 놓친 사람들.
➁ 위선자들, 겉과 속이 확연히 다른 사람들,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사람들, 내면은 엉망인데 겉만 신경 쓰는 사람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위 두 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호되게 예수님으로부터 질책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로부터 들어보지 못했던 꾸중을 밥 먹듯이 듣게 된 바리사이들이 그냥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은 분노로 이글거렸습니다. 증오심으로 불타올랐습니다. 눈에는 살기가 번뜩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질타에 분노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질책 이면에 담겨있는 그분의 애끓는 마음, 안타까운 마음, 노심초사를 조금이라도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제는 수확이 끝난 자리에 또 다른 작물을 심었습니다. 땅을 가까이 하다 보니 좋은 점이 아주 많습니다. 밭으로 나가는 날은 마치 피정이라도 하러 가는 날 같습니다.
몸을 뻣뻣이 곧추세우고 농사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자세를 낮춰야 제대로 된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자세를 낮추니 작은 것들의 소중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외면보다는 내면을 볼 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다들 그렇게 겸손하신 듯합니다.
이제는 오랜 사목생활을 접고 하느님의 사랑에 푹 잠겨 사시는 한 원로 신부님의 고백을 들으며 참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젊어서는 왕성한 혈기를 못 이겨 이것 저 것 안 해 본 것이 없었지. 다들 또 잘 한다고 박수를 쳐주더군.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내 능력만 믿고 뛰어다니던 철없던 시절이었어. 그런 내게 하느님께서 극진한 당신 사랑의 표시로 날 치시더군.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갔지. 그 바닥에서야 비로소 내 비참한 실상을 알게 되었어. 주님 은총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 귀중한 ‘바닥체험’을 통해 너덜해진 나였지만 그 순간부터 제대로 된 사제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지. 나를 고집하다보니 삶이 엉망이 되더군. 반대로 나를 죽이다보니 그제야 참 ‘나’를 찾게 되었지.”
결국 바리사이들을 향한 호된 질책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이것입니다. 겸손해지는 것, 진실해지는 것, 외면보다는 내면을 갈고 닦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