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 조성호 신부님

2006. 11. 23. 오후 3:43:13

글자

나해 연중 제 32 주간 월요일.

2006. 11. 13.

중계본동.


티토 1, 1-9.

루카 17, 1-6.


사람이 살면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당신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그것처럼 남을 죄짓게 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죄가 아닌 남을 죄짓게 하는 행위는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자신이 죄를 짓는 것보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더 심각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더더군다나 작은이들 즉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나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을 죄짓게 한다면 더 심각한 벌을 받게 됩니다. 커다란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진다는 것인데, 상을 받고 목에 꽃다발을 거는 삶을 살지 못하고 무거운 연자매를 걸고 바다에 떨어진다니 엄청난 비극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목걸이는 상상하기도 싫은 것이죠.


예수께서는 이런 예를 통해서 자신이 죄를 짓지 말고, 더더군다나 다른 이를 죄짓게 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함을 요구하시던 예수께서는 그러나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너그러울 것을 요구하십니다.


네 형제(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가 죄를 짓거든 꾸짖어주어라.”(루카 17, 3)

그러나 “회개하거든 용서하거라”(루카 17, 3)


다른 이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책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형제적 정신으로 꾸짖으라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그래서 용서를 청한다면? 그때는 모든 것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의 회개는 하느님께 돌아서는 회개가 아니라 일상적인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일상적으로 하듯이 잘못한 사람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죠.


이 구조가 순환의 관계처럼 죄를 짓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마치 짜증날 정도로 하루에도 일곱 번씩이나(물론 이 일곱이라는 숫자는 일곱이 아니라 아주 많은 것을 의미한다) 잘못하고 돌아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그가 회개를 했는지 아닌지 입증하도록 우리에게 책임을 지운 것이 아니라, 그저 용서를 구하는 사람을 용서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가? 비록 내 안에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기꺼이 용서하라는 것이죠. 그게 그리스도인이랍니다.


어떻습니까? 이 말씀을 들으면서 고개를 젓게 되죠? 그러나 분명 이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사도들도 우리와 같은 마음입니다. 오죽했겠습니까? 이러한 극단적인 말씀이 예수를 따르고 있는 이들에게마저 아주 버거운 도전으로 다가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달라고 청합니다.


우리도 역시 그 믿음을 청해야 합니다. 마치 나는 아닌 척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도 역시 그러기가 어려우니 저에게 믿음을 더해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나약한 저로서는 너무 버거운 가르침이라고 솔직히 말씀드려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불가능도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가능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과연 내가 가진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느냐가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믿음이 작은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작다고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분을 믿고 하면 됩니다. ‘그래,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까’ 이렇게 마음을 가지고 실천하다보면, 한 걸음 떼다 보면 첫걸음이 버거워도 나는 걷고 있는 것이고, 한 걸음이 두 걸음이 되고 나는 어느새 용서의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결국 첫 걸음을 주님을 믿고 떼겠느냐가 관건입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강론 묵상 모음집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