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습니다.” - 조성호 신부님 *

2006. 11. 23. 오후 3:34:35

글자

나해 연중 제 32 주일.

2006. 11. 12.

중계본동.


1열왕 17, 10-16.

히브 9, 24-28.

마르 12, 38-44.


우리는 누구나 주님께 받은 것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리라”(마르 12, 17)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몫이 있고, 하느님나라를 살아가는 이로서 하느님나라를 살아가는 몫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돈의 외형적 가치만은 아닐 것입니다.


신앙의 역사 안에서 헌금(봉헌)의 메시지는 크게 구약의 헌금과 신약의 헌금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구약의 헌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십일조가 기본입니다. 이는 땅의 십분의 일은 모두 주님의 것이라는 레위기의 가르침(레위 27, 30)을 기초로 하는 것이고, 말라키에서는 이것으로 주님의 집을 넉넉하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잠언에 보면 모든 재물과 소출의 맏물은 주님께 바쳐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잠언 3, 9) 사람들은 이 가르침에 기초하여 주님께 십일조를 충실히 바쳤습니다.

신약에 와서 헌금의 가르침은 조금 의미를 다르게 합니다. 바오로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모금하면서 형편이 닿는 한도에서 얼마씩 내라고 하는데, 이것은 미리 교회의 몫을 즉 주님의 몫을 떼어놓으라는 것입니다. 코린토 후서(8~9장)에서는 헌금하는 원칙에 대해서 말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서 형편에 맞게 하는데, 적게 뿌린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둔다고 가르칩니다. 정해진 금액이 없이 사랑과 정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진정 마음이 중요하고 제사가 아닌 자비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을 보십니다. 그런데 간혹 우리 중에는 이것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외적인 것 없이 마음만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정성은 반드시 외적으로 표현되게 되어 있습니다. 가슴 안에만, 자신 안에만 갇혀 있는 사랑과 정성은 허구입니다. 마음이 있어 하지 않는 것은, 즉 표현되지 않는 것은 0입니다. 주님께서는 크고 작고를 보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우리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봉헌을 더 크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내가 보이는 것이 0이라면 그것은 여전히 0입니다.


예수께서는 종교에 붙어 있으면서도 전혀 신앙적이지 못한 율법학자들을 꼬집은 뒤 성전에서 모범적인 모델을 발견합니다. 헌금함 맞은편에 자리하고 계신 예수. 그분의 눈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뽐내듯 스쳐지나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당신의 눈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한 여인의 모습이 당신의 눈에 포착되는데, 그 여인은 행색이 초라한 과부(그의 옷차림-베옷)입니다. 그 여인은 두 렙톤을 넣는데, 이것은 1400원(한 렙톤이 700원) 정도 되는 돈입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1400원 내지는 않았을테니 1000원이군요. 우리도 역시 그 여인과 같은 돈을 내고 있죠? 예수께서 이 여인을 칭찬하고 있으니 우리도 역시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돈을 많이 넣어도 우리는 1000원을 고집하니까 우리는 참 성서적으로 사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많은 돈을 내는 것이 성전에도 도움이 되고 당신께도 많은 것을 바치는 것이었을텐데, 왜 예수께서는 그들의 헌금은 거들떠도 보시지 않고, 과부의 돈을 칭찬하셨을까요? 그렇습니다. 그 안에 그의 마음, 정성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은 자신이 가진 넉넉한 것에서 헌금함에 툭 떨어뜨리고 갔습니다. 아니면 헌금을 받을 때 누군가 그 돈을 받고 있었다고 하니까 보란듯이 돈을 건네고 갔겠지요.


복음에서 ‘풍족하다’고 번역된 말은 ‘잉여’를 의미합니다. 즉 자신이 쓸 것을 쓰고 남은 것을 봉헌하는 것을 의미하죠. 그러나 이 여인은 부족한 가운데에서 넣었습니다. ‘궁핍하다’는 것은 ‘부족하다’ ‘결핍되다’ ‘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 여인은 성전에 봉헌할 여분이 없었습니다. 성전에 내고 나면 먹을 것조차 없는 여인입니다. 이 돈이면 한 줌의 곡식 가루를 살 수 있고,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돈이죠. 이 여인은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습니다.”(마르 12, 44)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이 여인은 이 돈으로 무얼 할까 하다가 주님께 봉헌하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치를 세속의 기준으로 바라봅니다. 그렇기에 이 사람이 낸 만원이나 저 사람이 낸 천원이나 같은 가치로 칩니다. 그래서 누가 교무금을 백만 원 냈다더라 하면 우와~! 하고 감탄합니다. 평화신문에서도 불우이웃을 위해 누가 1억을 냈다고 하면 제일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내용을 보십니다. 과부의 처지를 아시고, 그 여인의 마음을 아시는 것처럼 당신께서는 당신의 가치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그녀가 낸 동전 두 닢이 성전에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의 몸 즉 참다운 성전에는 분명 다른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큰 힘이 됩니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하나. 주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이들이 자신을 업신여기는 세상. 위안을 받아야 할 성전에서마저 차별을 두는 세상입니다. 성전에서 헌금 넣는 궤는 13가지 통이 있었는데, 헌금을 하기 전에 사람들은 사제에게 검사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사제는 헌금을 구별 지어 13개의 헌금 궤 중 하나에 넣습니다. 얼마나 따가운 눈총을 받았을까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도 서럽게 더러운 눈총을 받아야 하는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이 세상에서 그 과부는 모든 희망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작은 동전 한 닢. 손으로 쥐기에도 초라한 그 두 닢을 쥐고서 헌금 궤에 넣습니다.


이 여인은 신앙이 있습니다. ‘나를 외면하고, 나를 초라하게 하는 이 세상에 희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있는 주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실 것이다. 하느님께 가는 이 길목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나를 등쳐먹는 이들이 있다 해도, 지금 내가 봉헌하는 이 돈이 불손하게 쓰여진다 해도 결코 그분만은 나의 마음을 아실 것이다.’


분명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모두가 진실을 외면한다 해도, 예수만큼은 진실을 보십니다. 부자들의 헌금에는 미동도 하지 않으시던 예수께서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참입니다. 진실입니다. 저 여인이 봉헌하는 저 헌금은 진실된 봉헌입니다.’이 말씀은 눈물을 글썽이시면서 하시지 않았을까요? 저런 얼마나 된다고 저렇게. 저런 돈을 등쳐먹다니. 그러나 그 여인을 축복해 주십니다.


그분은 기다리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바라고 계십니다. 이 여인이 1400원을 바칠 때 힘들텐데 바치다니 안쓰러우시면서도 그 마음이면 세상 잘 견디어 내겠구나 대견해 하시면서 그 여인의 자리를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이 여인에게 여타의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참 장하고나!라고 용기를 주면 이 여인이 더 큰 힘을 얻었을텐데 예수께서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분이 보아주시는구나라고 힘을 가질 수도 있었겠지만, 헌금할 때마다 오히려 분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마음대로 하늘에 보화가 쌓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대로 두십니다. 단지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미래의 지도자들에게, 당신을 믿게 될 신앙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넣었다”(마르 12, 43)


하느님께서는 그럴싸한 것으로 치장을 해도 그 안의 진실을 아십니다. 마음이 아닌 돈의 전례는 억만금을 준다 해도 거들떠보실 분이 아니죠.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 이전에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뒤이어서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겉으로 보이는 성전, 가짜 성전을 허물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당신께서도 당신의 몸을 허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진짜인 것으로 알고 우리의 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지만, 당신께서는 결국 이 몸도 허물어질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성전에 투자해야 합니다. 내 몸에, 내 삶에 꽉 쥐고 있어봐야 그것은 곧 허물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가서야 어쩔 수 없이 쥐고 있던 손을 놓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은 지금 가진 것 모두에서 손을 펴고 예수의 마음을 붙잡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과부의 모습을 보면서 당신을 떠올리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바치신 당신처럼 모든 것을 내어드린 과부의 모습, 그 같음을 예수께서는 칭찬하고 계신 것이죠. 주님을 믿는 나, 오늘 과부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을 믿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배웁니다. 늘 나를 보아주시는 주님을 만나며 그 주님을 위해 내 모든 것을 걸기를 청하고 다짐합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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