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금요일 - 민병섭 신부님

2007. 4. 7. 오후 6:5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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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요일

 

 

 

오늘 우리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오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기 위해 살아온 삶이었지만, 마치 큰 죄인이라도 된 듯이, 예루살렘의 온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도들 사이에 끼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이제 잠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의 모습이 과연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계시는지 주님의 마지막 가르침에 대하여 잠시 묵상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그분의 머리를 바라보십시오. 엉클어진 머리에 가시관의 가시에 깊이 찔리시어 온 몸을 피투성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왕중의 왕이시며, 모든 것의 첫 창조주이신 분이, 금관이 아닌 가시관에 의해 그 머리엔 깊은 상처가 생겼으며 조금만 움직여도 가시가 더 깊이 찔리는 그 아픔은 전신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항상 아버지의 일만을 생각하시던,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 죄인들을 아버지께 인도하나 만을 생각하시던 예수님의 머리, 그런데 왜 이런 고통을 겪으셔야만 하겠습니까? 허허벌판인 사막에서 굶주림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빵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그 백성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그들의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러했던 그 백성들이 이제는 왕관이 아닌 가시관을 그분의 머리에 씌우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고통을 받으셔야 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잘못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들이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며 참된 하느님의 사랑의 나라를 이룩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남을 속이고 자신을 들어낼 수 있을 까 하는 생각이나, 온갖 악한 생각들로 인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파괴하고 있기에 주님께서는 그러한 고통을 당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손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두 팔을 넓게 벌리시고 있으며 그분의 양손은 못으로 구멍이 뚫리고 생명의 피가 밑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잘못하셨기에 그분의 손이 이렇게 비참하게 못에 박혀 찢어져야만 했겠습니까? 그분이 살아 계실 때, 그 손을 가지시고 행한 선행, 손으로 맹아의 눈을 만져 빛과 세상을 보게 한 일이나, 귀를 만져 농아를 고쳐주신 것, 많은 병자들을 손으로 안수하여 그들을 병고에서 해방시키신 일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손을 대신하여 그분의 손이 못에 박히는 그런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만들어 준 손은 창조의 손이요, 일치의 손이요, 치유의 손이며 보호의 손 이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손은 병자를 치료해 주고, 가난한 이를 도와주며, 죽은 이를 장사지내 주는 등 선행으로 우리 죄를 보속하며 하늘 나라에 썩지 않는 보화를 쌓는 그런 손 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교만으로 인해 금단의 열매인 지선악수 실과를 손으로 따먹으면서부터 인류의 손은 서로가 서로를 정복하기 위한 파괴의 손으로 바뀌어 버렸으며, 일치가 아니라 분열의 손이 되었고, 치유가 아니라 난폭함으로 인해 형제를 상해하고 죽이는 무서운 살인의 손으로 바뀌어 버렸으며, 그 때문에 온갖 악을 행하는 그런 손으로 그리고 참된 봉사가 아니라 오직 대가만을 바라는 이기적인 손으로 바뀌었기에 주님의 손이 우리를 대신하여 못에 박히는 그런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입술과 혀는 어떠합니까? 무엇에 갈증을 느끼셨기에 그렇게 바싹 마르고 갈증을 느껴 “나 목마르다” 하고 외치고 계십니까?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주며, 위로의 말씀을 던져주시던 주님의 입은 이제 갈증으로 이해 메말라지고 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 무엇을 잘못하셨기에 그러한 고통을 받으시겠습니까? 주님의 이 고통 또한 바로 우리들의 잘못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에레미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그들의 혀는 사람을 죽이는 화살이니 입으로는 친구와 함께 평화를 말하나 속마음으로는 해를 도모하느니 내 어찌 이를 벌하지 않겠느냐”는 말대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진리를 전파하며 평화를 도모해야 하는 우리의 혀를 우리는 잘못 사용함으로 남을 죄로 인도하고 서로의 평화를 깨트리고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기에 주님의 입술은 진리에, 사랑의 말씀에 갈증을 느껴 검게 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눈은 어떠합니까? 언제나 다정하며 사랑스런 눈길을 보내며 연민에 가득한 모습으로 바라보시고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에 충만하여 우리에게 생명의 정기를 넘겨주시던 그분의 눈동자가 이제는 무엇인가를 갈망하며 우리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호소하시는 그분의 눈길은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네 몸의 등불은 네 눈이니 만일 순수하면 네 온몸이 빛날 것이요, 네 눈이 만일 악하면 네 온몸이 어두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바라보며 또 높은 이상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뵙게 되는 날까지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눈을 보존해야 하는 우리들이지만, 우리는 그 눈을 탐욕의 눈으로, 증오의 눈으로, 그리고 질투의 눈으로 바꾸어 저주의 불꽃이 튀는 그런 무섭고, 따스한 마음까지도 차갑게 얼리는 매섭고 찬 눈으로 만들고 있지나 않나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다면 베드로 사도가 한 저주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들의 눈은 간음에 대한 욕망과 죄악에 대한 허기증으로 가득차있으니 저들은 저주받을 자식들이다.”.

그분의 귀는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인생의 상담자로서 그리고 병자의 의사로서 그들의 고통의 하소연을 들어주시며 도움을 주시던 귀에, 주님을 왕이라고 부르며 메시아를 맞아들이듯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하고 외치며 따라오던 바로 그 군중들이 퍼붓는 저주의 소리를 듣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형제들의 애원의 소리보다는 남을 비방하는( 말이나, 음탕한) 말에 더 귀를 잘 기울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잠언에 보면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애원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가기 부르짖을 때 들어줄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두 귀가 있고 한 입이 있는 것은 되도록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는 뜻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듣는 데에 너무나 인색한 것 같습니다. 더구나 우리에게 유익한 이야기는 말입니다. 아제부터라도 악에서 깨어나 이웃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발은 지금 어떠합니까? 못에 박힌 주님의 두 발 역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몸을 지탱하기 위하여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습니다. 왜 이러한 고통이, 주님의 발을 십자가에 매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곳곳을 돌아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던 발이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발이 어둠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 받은 우리의 발로 우리는 지금 어디로 향하여 뛰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경기장에 나서서 뛰는 사람은 목적지만을 향해서 뛰어야 하고, 왼편으로나 바른편으로, 옆길로 가서는 상급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목표는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김유신의 말처럼 타면 술집으로 달려가는 그런 발이 아니라, 사랑과 봉사의 길을 따라 주님께 나아가는 발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잠언에서도 “네 발이 나아갈 굽은 길을 평탄히 하며 우편으로나 좌편으로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고 경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주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당신의 피를 몽땅 땅에 다 쏟으시고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고개를 떨구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 28-30을 보면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목마르다’ 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마침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포도주를 해면에 담뿍 적셔서 히솝 풀대에 꿰어 가지고 예수의 입에 대어 드렸다.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라고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마지막 모습은 바로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수철리에 맹사성의 생가가 있습니다.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장원 급제를 하여 스무 살에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된 맹사성은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무명 선사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스님이 생각하기에 이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제가 최고로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무명 선사가 대답하였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무슨 거창한 말을 기대했던 맹사성은 실망의 눈빛으로 “그런 건 삼척 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먼 길을 온 제게 해 줄 말이 고작 그것뿐입니까?”하고 거만하게 말하며 맹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습니다. 그러자 무명 선사가 기왕 이렇게 어려운 발걸음을 하였으니 녹차나 한 잔 하고 가라며 붙잡았습니다. 그는 못이기는 척하고 자리에 않았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찻물이 넘치도록 그의 찻잔에 자꾸만 차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맹사성은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칩니다”하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태연하게 계속 찻잔이 넘치도록 차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잔뜩 화가 나 있는 맹사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스님의 이 한마디에 맹사성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졌고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바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많은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정작 신앙생활에서 제일 필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우리들도 고개를 숙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지 못하다면 우리들이 신앙인으로 지내는 근본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름이 “고개를 숙이는 행위”, “겸손”한 행위에 있지 않고 외적인 두드러짐에 있다고 한다면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천주교에서는 신자들이 회장님이나 교회의 봉사자들을 보는 눈이, 교회의 사람들이 장로나 집사 등을 보는 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많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비교하여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재의 수요일에 마태오의 복음을 읽으며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단식할 때에는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그리하여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진정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마지막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것 곧 주님의 겸손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많은 가르침을 주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깨닫도록 하여 주셨지만, 유일에게 당신을 보고 당신에게 배우라고 한 것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라는 말씀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주님의 겸손한 모습을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모습에서 그 최고의 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1-5에 보면 “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같이 저녁을 잡수실 때 악마는 이미 가리옷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한편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맡겨 주신 것과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라고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나중에 이 사건의 의미를 베드로 전서 5장 5절에서 “모두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라는 말로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최고의 겸손의 행위로 고백하고 있으며, 바로 모두가 그런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오스딩 성인께서도 덕 중에서 무슨 덕이 가장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고, 셋째도 겸손이라고 대답하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겸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며,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겸손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남이 하는 말을 잘 들어주고 자기 주장을 별로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추켜세우고 자신은 부족한 사람이라고 낮추는 모습이 겸손이겠습니까? 그것은 겸손이 아니며 비굴한 행위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억지로 겸손이란 말을 붙이자면 그것은 강요된 겸손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참된 겸손이란 “섬김의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을 높인다고 할 때, 말로만 높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높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몸으로 남을 높이는 것, 그것이 바로 섬김인 것입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 주는 모습, 바로 그것이 진정한 겸손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흙처럼 겸손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겸손이란 말 humilitas ← humilis ← humus 는 바로 땅, 흙이라는 humus에서부터 나온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흙이란 어떤 것입니까? 흙에는 두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장 낮고 비천한 성격입니다. 사람에게서 가장 낮은 부분은 발바닥입니다. 그런데 흙은 그 발바닥에 밟힙니다. 사람에게서 가장 낮은 것에 밟히는 것이 흙인 것입니다. 또한 흙은 사방 천지에 널려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사람들이 알지 못합니다. 모래는 돈 주고 사는 사람이 있어도 흙은 돈 주고 사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때때로는 돈 주고 내다 버리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곧 비천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흙은 이렇게 가장 낮고 비천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흙의 또 다른 성격은 모든 것을 품어 주면서 생명을 안겨 준다는 것입니다. 흙 속에는 온갖 종류의 자양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하기에 흙 속에서 자라는 뿌리 식물에는 영양가가 풍부하다고 합니다. 또한 흙은 사람에게도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요즘은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몸보신을 위해 보약을 먹곤 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아이를 열씩이나 낳고도 보약은커녕 곧 밭에 나가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몸이 성하였다고 하니 놀라울 일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흙집의 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요즘의 건강학자들은 지적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흙을 밟고 지내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추천을 하여 주고 있습니다.

예전에 텔레비젼에 어느 산엔가 오랫동안 맨발로 등반을 하시는 분이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60이 넘었는데도 힘이 젊은이보다 더 세고 병도 앓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흙을 밟고 지내며 흙의 기운을 받은 결과라고 하였고, 현대인들의 심성이 날로 약해지는 것도 바로 흙으로부터 멀어져 콘크리트 집에서 사는 것이 주요 원인 중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흙은 모든 생명체에게 몸과 마음의 자양분을 안겨 주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흙이 지닌 이 두 가지 특징 중에서 앞의 것은 눈에 띄고, 뒤의 것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낮고 비천한 모습은 눈에 뜨이는데, 다른 생명체들에게 자양분을 안겨 주는 것은 눈에 잘 안 띄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흙의 또 다른 가치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전제로 하여 “흙처럼 겸손하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이란 바로 흙과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남을 살리는 것으로까지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에는 꼭 남을 섬기는 행위가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곧 겸손이 결국에는 자신을 위한 행위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남을 섬김에 있는 것입니다. 섬김이란 내가 낮아져서 남을 받드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진정한 겸손은 남을 “살림”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밟히더라도 남에게 생명을 안겨주는 데 겸손의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형식적 겸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적 겸손, 실제적 겸손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흙처럼 겸손하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베드로 사도는 진정한 겸손의 의미를 발견하였던 것이며, 모두 겸손의 옷을 입으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들에게 흙처럼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함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기 위에 지하철역에서 나오는데 흰 티셔츠를 입은 한 젊은이가 서울역 광장을 왔다갔다하며 예수님을 믿으라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흰 티셔츠 앞면에 “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라고 쓰고 있었습니다. 저는 대단한 사람이다 하고 생각하며 저를 지나쳐간 그 사람을 다시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마치 제가 뒤돌아 볼 줄 알았다는 듯이 그의 등 뒤에도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종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각각 가장 높이 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것에 매여 사는데, 돈, 명예, 높은 지위, 지식, 술, 자식, 이데올로기 등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우상’이라고 정의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매여 사는 삶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겸손한 삶, 흙처럼 겸손한 삶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무엇엔가에 매여 살고 있습니다. 무엇인가의 종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 완전한 자유인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무엇이 우상인가 하느님인가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철저하게 하느님의 종이 될 때, 가장 완전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속박되어 살 때, 역설적으로 참 내면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의 열매로서 흙처럼 겸손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흙처럼 겸손한 삶을 살지 못함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도 우리는 철저한 그리스도의 종이 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종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우상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곧 두 주인을 섬기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그를 어중간하게 섬길 때까지는 그 사람에게 제법 잘 대해 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철저히 자신을 섬기게 되는 그 순간, 돌연 그를 철저히 배신해 버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철저히 섬기는 사람을 더욱 사랑해 주시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상을 철저히 섬기다가 우상에게 철저히 배신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면서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하느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고 있다는데 우리들의 아픔과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우상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하느님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보다 더 강한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하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마도 이에 대한 답을 갖는 것은 보통 사람인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우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하느님만의 종이 되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런 한계성을 갖고 태어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차피 그런 한계성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니 아무 부담 없이 두 주인을 섬기자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 한계선을 철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고, 그러면서 그것이 쉽지 않은 자기 자신에 대해 겸허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곧, 우상의 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과 자신의 한계선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때만이 우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을 섬기며, 주인 집 자녀들을 섬기고, 주인 집 모든 일을 무조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종이라는 제도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영적으로 종의 의식을 갖는 다는 것은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즉 자신이 종과 같이 비천한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이 하듯 섬기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스스로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흙처럼 겸손히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바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원래 종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하기에 종과 같이 남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종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남을 섬기는 것은 겸손이지만, 우리가 남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주인이 종의 발을 씻어주면, ‘참 겸손한 양반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종이 주인의 발을 씻어줄 때에는 ‘참 겸손한 종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아들은 종의 신분을 취하셨는데, 정작 종과 같은 우리가 주인 행세를 하려함에 있는 는 것입니다. 남위에 올라서서 대접을 받으려는 우리들의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우상의 종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보면서, 자신의 한심한 수준을 겸허히 인정하여 자신을 종으로 규정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입니다. 여전히 우상의 종 신세를 면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경로를 거쳐 하느님의 종으로 자신을 규정하여 당연히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흙처럼 겸손한 삶을 사신 분이셨지만, 나는 자신의 낮은 신분으로 당연히 그분의 겸손한 삶을 흉내내며 사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겸손이란 엄밀하게 말해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겸손이란 말속에는 원래 높은 지위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낮고 비천한 존재인 우리는 겸손할 수 없으며, 다만 겸손을 흉내낼 뿐입니다. 흙처럼 겸손한 삶을 사셨던 예수님, 그분의 그 숭고한 삶을 흉내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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