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금요일에 다시 바라보는 십자가
주님 수난 성 금요일인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거룩한 종교의 상징이 왜 하필 사람 죽이는 형틀인 십자가였을까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일등공신들이었던 제자들은 사실 십자가의 주님을 그리 가까이서 보지 못했습니다. 겁이 많아서 멀찌감치 어딘가 숨어서 봤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부활한 주님은 가까이서 만져보기도 하고, 함께 식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부활한 예수님의 모습을 신앙의 상징으로 삼지 않고 굳이 말라 쪼그라든 예수님이 매달려있는 죽음의 형틀을 상징으로 삼았을까요.
여타 종교들의 신상들은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는 고품격의 상들입니다. 불교는 보리수 밑에서 성불한 부처님의 고귀한 모습을 상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신앙하는 대상이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상징은 다른 종교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리스도교만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들의 상징은 구도의 길을 걸어온 결과로서 얻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결실을 보여줍니다. 불교를 예로 들면 불상은 인간이 완성될 수 있는 모습, 즉 종교생활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십자가 상징은 그 결과인 부활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로 향하기 위한 과정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몸을 날씬하게 하려고 비싼 돈을 들여 운동기구를 사놓았습니다. 그 운동기구를 살 때는 날씬한 모델이 광고를 했기 때문에 나도 그 운동기구만 있으면 그렇게 되겠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날씬한 모습만 꿈꾸면서 땀흘려 운동은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과정이 낳게 될 훌륭한 결과만을 미리 맛보게 되면 그 과정에 소홀하기가 쉽습니다. 어떻게 굴러가든 이 과정 자체(종교생활)에 몸만 담고 있으면 나도 저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지 않습니다. 단지 십자가가 부활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그 위에 달려있는 사람의 직접적인 증거를 통해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을 피하고 행복만을 추구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게으른 본성에 대한 경고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에만 가고 싶어하지 예수 믿고 십자가 지는 것은 피하고 싶어하는 우리 본성을 비추어주는 등대와도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 믿고 천당 가기만을 바라면서 예수 믿고 십자가 지기는 싫어하는 우리들에게 2천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십자가, 거기에 너의 구원이 있네"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는 나처럼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내가 이만큼 고통을 당했으니, 너희도 그만큼 당해야 한다'는 그런 고통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하느님이 나에게 허락했다고 오해하는 그런 고통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내 삶의 한 부분이며 겪어야할 과정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십자가는 유독 더 무거워 보이고 남의 십자가는 가벼워 보입니다. "왜 나에게만...?!"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주어질 부활의 영광이 더 크고 영광스러움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만큼 그 사람이 새로운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이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저절로 나를 부활에로 이끌어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으려고 노려하는 사람에게만 새 사람이 되는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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