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지 않으면.
회개와 쇄신에 대해서.
예수님 말씀하시길: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제1차적 탄생:
부모로부터 태어난다.
이 탄생은 철저히 비극적 운명에 속한다.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태어날 때 아무 것도 모른다. 백지상태이다.
즉 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탐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 탄생에는 부모가 있다.
부모의 자식이다.
인간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차원,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이신다.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다.
그것 가지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 가지고는 인생의 의미, 인생의 목적,
삶의 보람을 모른다.
제2의 탄생이 필요하다.
그것이 곧 제2의 탄생,
즉 성령으로 인한 재-탄생, 거듭 남이다.
부모의 자식에서 “하느님의 자식”이라는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표현이다.
물세례, 성령세례 이렇게 나누어 표현하지만, 함께 봐야 옳다.
성령세례는 누가 검증해 줄 수 없다. 오로지 자신만 안다.
물세례는 검증이 가능하다.
교회에서는 물세례, 성령세례를 같이 베푼다.
성령으로 새로 태어났음을 물세례로 검증해준다.
이렇게 하느님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새롭게 아는 것을 회개라고 한다.
단순히 죄를 뉘우치고 새롭게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먼저 하느님을, 성령님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만물의 창조주요,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오,
인간에게 말을 건네시는 분이시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며
인간에게 진-선-미를 따라 살도록 배려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알아차려야,
이렇게 하느님을 만나야만이
그분과 살아있는 교류를 하게 된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회개이다.
내 삶이 자연히 바꾸지 않을 수 없다.
거꾸로 되면 즉, 율법만을 그냥 억지로 지키면
회개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유대인들은 누구보다 율법을 신봉했지만
예수님한테 크게 야단을 맞았다.
그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했기 때문이다.
먼저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알아차려야,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율법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믿는 것”이 회개이다.
사도 바오로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외쳐대는 것이
율법을 실행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외쳐대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회개한 사람들...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는 회개한 사람,
우리는 행복한 사람,
우리는 하느님을 아는 사람, 믿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오, 이 전율이요.
이제 그렇게 해서 우리 행실이 바뀌도록 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바뀌도록 해야 한다.
저절로 바뀌어져야 한다. 즉 큰 노력 없이도,
큰 수고 없이도 남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게 된다.
남의 권리를 빼앗지 않게 된다.
남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남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남을 이롭게 한다.
이것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남과 협력하고, 남에게 양보하고
남과 손을 잡고 어깨동무하면서 룰루랄라 하게 된다.
회개의 모습은 다양하다.
사람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어떤 사람은 완벽 형이어서 회개도
완벽 지향 형 회개를 따른다.
뭐든지 완벽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고치고 닦고 기름 치고,
매사에 철저히 애를 많이 쓴다.
용맹정진하고, 고신극기하고, 자신을 학대하고,
인욕정진하고, 의지를 불사른다.
좋다. 다만 문제점이 있다.
자신에게 엄격하지만,
남에게는 부드러워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을 못살게 굴면서,
타인도 못살게 굴면 괴로운 일이 발생한다.
자신도 평화를 찾지 못하고
남에게도 평화를 전하지 못하고 늘 불안하게 만든다.
남을 괴롭힌다.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어떤 사람은 적응 형이어서,
회개도 현실 인정 형 회개를 한다.
현실을 잘 받아들이는 타입이다.
현실 없는 주장은 뜬 구름과도 같기에
현실적 여건을 수용한다.
나이를 인정하고, 힘없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질병 앞에서 나약함을 인정하고,
자신이 회개했음을 굳게 믿으면서도 자신의
부족함을 겸허히 수용한다.
루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의 태도를 달리 바꾸어서 보는 입장이다.
왜 맏아들은 동생을 호의로 대하는 아버지에게 화를 냈을까?
완벽 형이어서?
벌을 기대했는데, 아버지가 뜻하지 않게
사랑하는 모습을 부여주니까,
마음속에서 부화가 들끓어 올랐다.
이게 뭡니까?
이렇게 했는데, 왜 그래야만 했을까?
아버지처럼 너그러울 수 없었을까?
그건 그의 기질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을까?
“우리 아빠, 최고. 정말 멋진 분이셔”라고.
현실인정형의 회개를 하는 사람은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에 대해서 정말 박수를 칠 줄을
아는 태도를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다만,
현실인정 형 회개를 하는 사람은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현실 안주 형이라고.
사람의 성격에 따라 회개의 모습이 다양하다.
젊어서는 용맹정진하고, 나이 들어서는
현실을 인정하는 쪽으로 나아가면 좋겠다.
정리:
회개? 하느님 안에서 거듭 태어났다? 맞는가?
확신하는가? 믿는가? 그게 아직도 불확실한가?
하느님 안에서 거듭 났음을 믿자.
그걸 의식하지 못하니까, 어정쩡 살고 있지 않은가?
확신이 부족하면 확신을 가지도록 하자.
근데, 세상 속에서 세상 안에서 살다 보니,
세상 것들에 대해서 무심할 수 없다.
무심하다가는 쪽박 차기 십상이다.
세상에서 영악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니 세상 것들, 재산과 돈에 대해 눈을 똑바로
뜨고 관심을 집중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다보니 세상에 속해버린,
속물이 되어버린다. 세속적이 된다.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돈의 자녀가 되어버린다.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황금에 눈이 어두워진다.
“돈 좀 실컷 만져봤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회개한 사람은 마음이 평화스럽다는데,
현실의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평화스럽다가도 걱정과 근심, 불안, 공포에 휩싸인다.
그렇게 되면 죽을 지경이다. 머리가 아프다.
좋다가도 자식 생각만 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자식이 뭔지?
자식 생각만 하면 갑자가 스트레스가 치밀어 올라온다.
금방 신경성 위장병이 도진다. 힘이 쪽 빠져버린다.
시집 안 가고 집안에 있는 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억장이 무너진다.
남들은 시집도 잘 가는데 우리 딸은 왜 저런가?
회개를 하면 기쁨이 넘치고 낙천한다는데,
나는 이게 뭔가?
왜 이리 삶의 의욕이 없고 기쁨이 없는 것일까?
캄캄하다. 어둡기 그지없다.
컴컴한 터널 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출구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서성대고 있는 기분이다.
왜 이리 어두울까?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을까?
회개는 한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부단히 회개해야 한다.
부단히 거듭 태어나야 한다.
세속에 대해서 죽고,
하느님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세속에 대해서 죽고,
하느님을 늘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하느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의식.
하느님이 지금 나를 사랑하신다는 의식.
요걸 잊어먹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완성된 사람이 아니고,
완성을 향한 여정 중에 있다.
회개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이다.
인생은 회개의 과정에 있다.
누구도 회개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이미 끝났다고 선언해서는 안 된다.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 누구도 회개하지 못했다고 낙담해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 회개의 과정을 밟으면 되는 것이다.
내일, 어떤 계기로 해서 회개의 과정을
걸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회개는 마치 마라톤과 같은 것...
계속해서 뛰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뛴다고 해서 자만해서는 안 되고,
지금 안 뛴다고 너무 낙담하거나 절망해서도 안 된다.
뛰면 된다. 뛰자. 부단히 뛰자.
겸손하게 뛰자.
서로서로 뛰자고 격려하면서 뛰자.
넘어진 사람, 일어나자고 격려하고,
안 뛰고 딴전부리는 사람, 어서 뛰자고 격려하고,
감사하면서 뛰고,
감탄하면서 뛰고,
사랑에 겨워 울면서 뛰고,
기쁨에 겨워 춤을 추면서 뛰고,
고요히 명상하면서 뛰고, 하여간 열심히 뛰자.
뛰는 게 중요하다.
이제 쇄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쇄신은 새롭게 거듭 나는 것을 말한다.
“일신일신우일신”(日新, 又日新)의 그 일신이다.
나날이 새롭게 되자는 것이다.
왜 쇄신해야 할까?
나태하고, 구태에 젖어들고, 회개했으면서도 잊어먹고,
망각하고 지내기 때문이다.
가끔 때가 많이 묻어서
“내 탓이오”를 정말 해야 할 때가 온다.
쇄신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또 다시 눈을 뜨고
“내 탓이오”를 하는 것이다.
미안합니다. 잘못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쇄신을 하지 않으면 구태의연하게 산다는 것.
구식으로 산다는 것.
옛날 것이 좋다고 거기에 주저 앉아버리는 것.
새로운 것에 마음을 열지 않고, 그냥 구식대로 사는 것.
종교에 대해서도
가톨릭을 구교라고 하고, 프로테스탄트를 신교,
개신교라고 부른다. 불만이다.
아니, 우리가 옛날 방식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인가?
그러면 못쓴다.
쇄신하지 않고 구태의연하게 산다는 말인가?
아니다. 우리도 쇄신하고 새롭게 하고 날마다
새롭게 적응하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구교이냐?
어떻게 구식교회냐? 말도 안 된다.
개신교가 나갈 때, 우리는 그렇게 옛 것을 고집했었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다가는 썩는다. 그러면 큰일이다.
쇄신하지 않으면 썩는다.
바람이 불지 않고 막혀서 썩어버린다.
바꿀 것은 바꾸고, 새롭게 할 것은 새롭게 하고,
수리할 것은 수리하자. 옛 것을 고집하는 것은
마치 병원을 안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서워서 못 가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 치과에 잘 안 간다. 무섭다고.
이 가는 소리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는 것이다.
그럼 안 된다.
자재가 썩었으면 얼른 새 것으로 바꿔 낄 것이다.
그걸 못하면 시대에 뒤쳐진 그야말로 구식종교,
구교가 되는 것이다.
자재가 썩었는데도 안 바꾸면 무너진다.
쇄신의 구체적 방법:
1. 몸
목표: 건강, 민첩, 미모.
우리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궁전이다.(1고린 6,19)
우리의 몸은 “보이는 나”다.
방편: 자연에 순응하기, 음식을 조절하기, 몸을 놀리기, 미소 짓기.
2. 마음[감정=기분]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는 나를 통제하고 조정한다.
감정에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있다.
목표: 긍정적인 감정, 즉 기쁨, 즐거움, 감사,
만족, 평온, 사랑 등을 키운다. 부정적인 감정,
즉 화, 분노, 노여움, 격분, 싸움, 질투, 시기,
미움, 원망 등을 제거한다.
두렵고 노여워하고 원망하고 미워한다면 어떨까?
고통이다. 고통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방편: 상대방 이해하기, 상대방에게 겸손하기,
욕심 줄이기, 감정 풀기, 호흡 수련하기.
3. 정신[얼, 영혼]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는 나를 통제하고,
마음을 통제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기관이다.
옛 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정신을 놓아버리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신이 살아있어야 온 요소가 제 자리를 찾고
제 기능을 하게 된다.
정신은 제일 복잡한 기관이고 섬세한 기관이다.
목표: 맑고 순수하고, 깨어있기. 얼 차리기.
방편:
-생각: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인식: 잘 알아차린다. 진위를 가린다. 식별하고 판단한다.
-말: 예쁘고, 이롭고, 친절하게 말하기.
-결단: 공동선을 위해서(이타적) 결정하기.
-하느님과 통하기, 교류하기: 정신이 살아있어야
하느님과 교류할 수 있다.
우선, 하느님의 선물인 “현실”을 잘 받아들이자.
현실은 하느님의 응답이시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려주시는 응답.
현실은 나의 작품이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하랴? 현실을 잘 받아들이자.
인과응보라고 생각한다.
다음, 하느님께 나를 “봉헌”하자.
현실을 받아들였으면 이제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자유, 나의 기억과 지력, 나의 마음, 심성, 감성,
나의 의지, 나의 모든 것. 내가 가진 모든 것,
다 주님 것이옵니다. 주님께 바칩니다. 받아주시옵소서.
주님 뜻대로 처리하소서.
다만, 당신 사랑과 은총을 주시옵소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사옵니다.
원문: 주여, 저를 받아주소서.
저의 모든 자유와 저의 기억력과 지력과 모든 의지와
제게 있는 모든 것과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으소서.
당신이 제게 이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그 모든 것을 당신께 도로 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것이오니,
온전히 당신 의향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제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소서.
이것이 제게 족하나이다.(성 이냐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참된 기도, 즉 교류이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드리는 것.
이것이 하느님께 순응하는 것이요,
이것이 낙천하는 비법이다.
이렇게 현실에 대해서 감사, 찬미할 수 있다.
그런 자세로 호흡을 하면서 마음 깊이 감동, 감탄하는 것이다.
하느님 현존을 느끼면 자연스럽게 감동이 오고, 감탄이 온다.
다음의 방법도 정신을 맑고 순수하고 깨끗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거룩한 독서: 읽고, 멈추고, 명상하고, 감탄하고, 교류한다.
-신학: 우리에게 영과 생명을 넣어주는 글들을 읽는다.
읽고, 명상하고, 감동한다.
-성인 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글들을 읽고 명상하고, 감동한다.
-성지방문: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곳을 찾아가 명상하고 감동한다.
회개와 쇄신에 대해서.
예수님 말씀하시길: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제1차적 탄생:
부모로부터 태어난다.
이 탄생은 철저히 비극적 운명에 속한다.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태어날 때 아무 것도 모른다. 백지상태이다.
즉 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탐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 탄생에는 부모가 있다.
부모의 자식이다.
인간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차원,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이신다.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다.
그것 가지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 가지고는 인생의 의미, 인생의 목적,
삶의 보람을 모른다.
제2의 탄생이 필요하다.
그것이 곧 제2의 탄생,
즉 성령으로 인한 재-탄생, 거듭 남이다.
부모의 자식에서 “하느님의 자식”이라는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표현이다.
물세례, 성령세례 이렇게 나누어 표현하지만, 함께 봐야 옳다.
성령세례는 누가 검증해 줄 수 없다. 오로지 자신만 안다.
물세례는 검증이 가능하다.
교회에서는 물세례, 성령세례를 같이 베푼다.
성령으로 새로 태어났음을 물세례로 검증해준다.
이렇게 하느님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새롭게 아는 것을 회개라고 한다.
단순히 죄를 뉘우치고 새롭게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먼저 하느님을, 성령님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만물의 창조주요,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오,
인간에게 말을 건네시는 분이시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며
인간에게 진-선-미를 따라 살도록 배려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알아차려야,
이렇게 하느님을 만나야만이
그분과 살아있는 교류를 하게 된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회개이다.
내 삶이 자연히 바꾸지 않을 수 없다.
거꾸로 되면 즉, 율법만을 그냥 억지로 지키면
회개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유대인들은 누구보다 율법을 신봉했지만
예수님한테 크게 야단을 맞았다.
그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했기 때문이다.
먼저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알아차려야,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율법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믿는 것”이 회개이다.
사도 바오로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외쳐대는 것이
율법을 실행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외쳐대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회개한 사람들...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는 회개한 사람,
우리는 행복한 사람,
우리는 하느님을 아는 사람, 믿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오, 이 전율이요.
이제 그렇게 해서 우리 행실이 바뀌도록 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바뀌도록 해야 한다.
저절로 바뀌어져야 한다. 즉 큰 노력 없이도,
큰 수고 없이도 남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게 된다.
남의 권리를 빼앗지 않게 된다.
남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남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남을 이롭게 한다.
이것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남과 협력하고, 남에게 양보하고
남과 손을 잡고 어깨동무하면서 룰루랄라 하게 된다.
회개의 모습은 다양하다.
사람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어떤 사람은 완벽 형이어서 회개도
완벽 지향 형 회개를 따른다.
뭐든지 완벽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고치고 닦고 기름 치고,
매사에 철저히 애를 많이 쓴다.
용맹정진하고, 고신극기하고, 자신을 학대하고,
인욕정진하고, 의지를 불사른다.
좋다. 다만 문제점이 있다.
자신에게 엄격하지만,
남에게는 부드러워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을 못살게 굴면서,
타인도 못살게 굴면 괴로운 일이 발생한다.
자신도 평화를 찾지 못하고
남에게도 평화를 전하지 못하고 늘 불안하게 만든다.
남을 괴롭힌다.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어떤 사람은 적응 형이어서,
회개도 현실 인정 형 회개를 한다.
현실을 잘 받아들이는 타입이다.
현실 없는 주장은 뜬 구름과도 같기에
현실적 여건을 수용한다.
나이를 인정하고, 힘없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질병 앞에서 나약함을 인정하고,
자신이 회개했음을 굳게 믿으면서도 자신의
부족함을 겸허히 수용한다.
루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맏아들의 태도를 달리 바꾸어서 보는 입장이다.
왜 맏아들은 동생을 호의로 대하는 아버지에게 화를 냈을까?
완벽 형이어서?
벌을 기대했는데, 아버지가 뜻하지 않게
사랑하는 모습을 부여주니까,
마음속에서 부화가 들끓어 올랐다.
이게 뭡니까?
이렇게 했는데, 왜 그래야만 했을까?
아버지처럼 너그러울 수 없었을까?
그건 그의 기질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을까?
“우리 아빠, 최고. 정말 멋진 분이셔”라고.
현실인정형의 회개를 하는 사람은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에 대해서 정말 박수를 칠 줄을
아는 태도를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다만,
현실인정 형 회개를 하는 사람은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현실 안주 형이라고.
사람의 성격에 따라 회개의 모습이 다양하다.
젊어서는 용맹정진하고, 나이 들어서는
현실을 인정하는 쪽으로 나아가면 좋겠다.
정리:
회개? 하느님 안에서 거듭 태어났다? 맞는가?
확신하는가? 믿는가? 그게 아직도 불확실한가?
하느님 안에서 거듭 났음을 믿자.
그걸 의식하지 못하니까, 어정쩡 살고 있지 않은가?
확신이 부족하면 확신을 가지도록 하자.
근데, 세상 속에서 세상 안에서 살다 보니,
세상 것들에 대해서 무심할 수 없다.
무심하다가는 쪽박 차기 십상이다.
세상에서 영악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니 세상 것들, 재산과 돈에 대해 눈을 똑바로
뜨고 관심을 집중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다보니 세상에 속해버린,
속물이 되어버린다. 세속적이 된다.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돈의 자녀가 되어버린다.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황금에 눈이 어두워진다.
“돈 좀 실컷 만져봤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회개한 사람은 마음이 평화스럽다는데,
현실의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평화스럽다가도 걱정과 근심, 불안, 공포에 휩싸인다.
그렇게 되면 죽을 지경이다. 머리가 아프다.
좋다가도 자식 생각만 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자식이 뭔지?
자식 생각만 하면 갑자가 스트레스가 치밀어 올라온다.
금방 신경성 위장병이 도진다. 힘이 쪽 빠져버린다.
시집 안 가고 집안에 있는 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억장이 무너진다.
남들은 시집도 잘 가는데 우리 딸은 왜 저런가?
회개를 하면 기쁨이 넘치고 낙천한다는데,
나는 이게 뭔가?
왜 이리 삶의 의욕이 없고 기쁨이 없는 것일까?
캄캄하다. 어둡기 그지없다.
컴컴한 터널 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출구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서성대고 있는 기분이다.
왜 이리 어두울까?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을까?
회개는 한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부단히 회개해야 한다.
부단히 거듭 태어나야 한다.
세속에 대해서 죽고,
하느님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세속에 대해서 죽고,
하느님을 늘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하느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의식.
하느님이 지금 나를 사랑하신다는 의식.
요걸 잊어먹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완성된 사람이 아니고,
완성을 향한 여정 중에 있다.
회개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이다.
인생은 회개의 과정에 있다.
누구도 회개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이미 끝났다고 선언해서는 안 된다.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 누구도 회개하지 못했다고 낙담해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 회개의 과정을 밟으면 되는 것이다.
내일, 어떤 계기로 해서 회개의 과정을
걸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회개는 마치 마라톤과 같은 것...
계속해서 뛰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뛴다고 해서 자만해서는 안 되고,
지금 안 뛴다고 너무 낙담하거나 절망해서도 안 된다.
뛰면 된다. 뛰자. 부단히 뛰자.
겸손하게 뛰자.
서로서로 뛰자고 격려하면서 뛰자.
넘어진 사람, 일어나자고 격려하고,
안 뛰고 딴전부리는 사람, 어서 뛰자고 격려하고,
감사하면서 뛰고,
감탄하면서 뛰고,
사랑에 겨워 울면서 뛰고,
기쁨에 겨워 춤을 추면서 뛰고,
고요히 명상하면서 뛰고, 하여간 열심히 뛰자.
뛰는 게 중요하다.
이제 쇄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쇄신은 새롭게 거듭 나는 것을 말한다.
“일신일신우일신”(日新, 又日新)의 그 일신이다.
나날이 새롭게 되자는 것이다.
왜 쇄신해야 할까?
나태하고, 구태에 젖어들고, 회개했으면서도 잊어먹고,
망각하고 지내기 때문이다.
가끔 때가 많이 묻어서
“내 탓이오”를 정말 해야 할 때가 온다.
쇄신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또 다시 눈을 뜨고
“내 탓이오”를 하는 것이다.
미안합니다. 잘못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쇄신을 하지 않으면 구태의연하게 산다는 것.
구식으로 산다는 것.
옛날 것이 좋다고 거기에 주저 앉아버리는 것.
새로운 것에 마음을 열지 않고, 그냥 구식대로 사는 것.
종교에 대해서도
가톨릭을 구교라고 하고, 프로테스탄트를 신교,
개신교라고 부른다. 불만이다.
아니, 우리가 옛날 방식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인가?
그러면 못쓴다.
쇄신하지 않고 구태의연하게 산다는 말인가?
아니다. 우리도 쇄신하고 새롭게 하고 날마다
새롭게 적응하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구교이냐?
어떻게 구식교회냐? 말도 안 된다.
개신교가 나갈 때, 우리는 그렇게 옛 것을 고집했었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다가는 썩는다. 그러면 큰일이다.
쇄신하지 않으면 썩는다.
바람이 불지 않고 막혀서 썩어버린다.
바꿀 것은 바꾸고, 새롭게 할 것은 새롭게 하고,
수리할 것은 수리하자. 옛 것을 고집하는 것은
마치 병원을 안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서워서 못 가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 치과에 잘 안 간다. 무섭다고.
이 가는 소리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는 것이다.
그럼 안 된다.
자재가 썩었으면 얼른 새 것으로 바꿔 낄 것이다.
그걸 못하면 시대에 뒤쳐진 그야말로 구식종교,
구교가 되는 것이다.
자재가 썩었는데도 안 바꾸면 무너진다.
쇄신의 구체적 방법:
1. 몸
목표: 건강, 민첩, 미모.
우리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궁전이다.(1고린 6,19)
우리의 몸은 “보이는 나”다.
방편: 자연에 순응하기, 음식을 조절하기, 몸을 놀리기, 미소 짓기.
2. 마음[감정=기분]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는 나를 통제하고 조정한다.
감정에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있다.
목표: 긍정적인 감정, 즉 기쁨, 즐거움, 감사,
만족, 평온, 사랑 등을 키운다. 부정적인 감정,
즉 화, 분노, 노여움, 격분, 싸움, 질투, 시기,
미움, 원망 등을 제거한다.
두렵고 노여워하고 원망하고 미워한다면 어떨까?
고통이다. 고통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방편: 상대방 이해하기, 상대방에게 겸손하기,
욕심 줄이기, 감정 풀기, 호흡 수련하기.
3. 정신[얼, 영혼]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는 나를 통제하고,
마음을 통제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기관이다.
옛 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정신을 놓아버리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신이 살아있어야 온 요소가 제 자리를 찾고
제 기능을 하게 된다.
정신은 제일 복잡한 기관이고 섬세한 기관이다.
목표: 맑고 순수하고, 깨어있기. 얼 차리기.
방편:
-생각: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인식: 잘 알아차린다. 진위를 가린다. 식별하고 판단한다.
-말: 예쁘고, 이롭고, 친절하게 말하기.
-결단: 공동선을 위해서(이타적) 결정하기.
-하느님과 통하기, 교류하기: 정신이 살아있어야
하느님과 교류할 수 있다.
우선, 하느님의 선물인 “현실”을 잘 받아들이자.
현실은 하느님의 응답이시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려주시는 응답.
현실은 나의 작품이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하랴? 현실을 잘 받아들이자.
인과응보라고 생각한다.
다음, 하느님께 나를 “봉헌”하자.
현실을 받아들였으면 이제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자유, 나의 기억과 지력, 나의 마음, 심성, 감성,
나의 의지, 나의 모든 것. 내가 가진 모든 것,
다 주님 것이옵니다. 주님께 바칩니다. 받아주시옵소서.
주님 뜻대로 처리하소서.
다만, 당신 사랑과 은총을 주시옵소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사옵니다.
원문: 주여, 저를 받아주소서.
저의 모든 자유와 저의 기억력과 지력과 모든 의지와
제게 있는 모든 것과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으소서.
당신이 제게 이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그 모든 것을 당신께 도로 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것이오니,
온전히 당신 의향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제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소서.
이것이 제게 족하나이다.(성 이냐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참된 기도, 즉 교류이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드리는 것.
이것이 하느님께 순응하는 것이요,
이것이 낙천하는 비법이다.
이렇게 현실에 대해서 감사, 찬미할 수 있다.
그런 자세로 호흡을 하면서 마음 깊이 감동, 감탄하는 것이다.
하느님 현존을 느끼면 자연스럽게 감동이 오고, 감탄이 온다.
다음의 방법도 정신을 맑고 순수하고 깨끗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거룩한 독서: 읽고, 멈추고, 명상하고, 감탄하고, 교류한다.
-신학: 우리에게 영과 생명을 넣어주는 글들을 읽는다.
읽고, 명상하고, 감동한다.
-성인 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글들을 읽고 명상하고, 감동한다.
-성지방문: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곳을 찾아가 명상하고 감동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