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금요일: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논쟁-2
2. 하느님에 대해서
이제 하느님에 대한 생각들을 짚어보자.
유대인들게 있어서 예수님의 하느님 호칭은 귀에 거슬렸다.
그들은 하느님을 항상 “주님”이라고 불러왔다. 원어로 “아돈”, 혹은 “아도나이”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건방지게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에게 이 호칭은 하느님 경망 죄에 해당된다.
또,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때로는 “메시아”라고 하는데,
더러는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정신 나간, 미친 소리요,
명백히 하느님을 모독하는, 있을 수 없는 짓이다.
여보, 예수 선생, 자네는 한갓 사람이면서 감히 하느님 행세를 하느냐?
너, 제 정신이 아니지? 너 미친 놈 맞지?
감히 어디라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냐?
그냥 돌로 쳐 죽여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는 경우이다.
실제로 그들은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 돌을 집어 들어 치려고 하였다.
여러 차례 그렇게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반론:
너희가 나의 출신을 안다고 하는데, 그건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알다시피 나자렛 출신이다.
그러나 그건 나의 신체적인 인적사항일 뿐이다.
나의 진면목은 그게 아니다.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것이 나의 진면목이다.
너희는 나의 본성을 모른다. 그저 껍데기만 알뿐이다.
실상 나는 아버지로부터 왔다.
나는 사람을 살리라고 파견되어 온 것이다.
나는 복음, 기쁜 소식을 전하러 파견되었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다.
종이나 노예는 자기 집 주인을 주인님이라고 부른다.
종이 주인을 알겠느냐?
종은 종일토록 뼈 빠지게 일해 봐야 종에 불과하다.
상속을 받을 수도, 아들의 지위도 없는 것이다.
종은 주인의 사랑을 받으려고
굽신거려야 하고, 아양을 떨어야 하고, 전전긍긍하여야 한다.
그런데, 아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일부로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다.
새로 태어나면 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하느님의 자녀는 밝고 환하고 빛나고 당당하다.
아빠의 사랑을 받기 때문이고,
아빠의 유산을 받기 때문이고,
아빠와 대등한 지위를 얻기 때문이고,
아빠와 진솔한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고,
아빠와 맞장을 트기 때문이야.
너희는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모른다.
나의 겉모양만 알 뿐 속 모양을 모른다.
그러기에 나의 아빠도 모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서 이 세상 것을 말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천상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다.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기에 욕정에 휘말려있지만,
나는 위에서 왔기에 성령으로 가득 차 있다.
너희가 아무리 애를 써도 모르는 것이 있다.
나의 본체에 대해서다.
나는 누구냐?
나는 바로 그이다.
나는 바로 I am who I am 이다.
내가 바로 신이다.
아빠와 나는 하나이다. 아빠와 나는 동등하다.
아빠가 아는 것은 나도 알고, 아빠가 하는 것은 나도 한다.
아빠는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아빠 안에 있다. 이렇게 아빠와 나는 하나다.
너희는 이걸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그래서 아빠는 모든 심판권을 아들에게 주셨고,
아빠는 모든 생명권을 아들에게 주셨다.
아들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고,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이런 말씀에 유대인들은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증거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했으니 치욕스럽게 죽이고,
다만 더욱 악랄한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