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었던 사람
오늘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요한 성인은 <갈멜의 산길>, <어둔 밤> 등 탁월한 영성서적의 저자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특히 <어둔 밤>에서 성인은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분노와 절망, 음모와 배신, 살상, 속임수, 게으름 등 온갖 죄악이 난무하는 어두운 세상을 세밀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여정을 “어둔 밤”이라고 표현하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어둠과 같은 터널을 지나는 것을 영적 성장의 과정이라고 하였지요. 즉 이 어둠의 세상을 거쳐야 비로소 정신의 밤, 신앙의 밤으로 정화되어 나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실지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둔 밤>을 그대로 살아낸 인물이었습니다.
1542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요한은 대대로 명문 귀족 집안 출신이었으나 가세가 몰락해 그가 출생할 당시에는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그가 태어난 16세기는 이른 바 종교개혁자들이 갖가지 이단 사설을 유포시켜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혼돈 속에 지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태어난 요한의 삶이 어둔 밤을 거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상황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생활고에 쪼들린 어머니와의 생활 속에 요한은 목수의 조수, 양복점 사환 등 어려운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렵게 자라 청년이 된 요한은 1563년 갈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1567년 사제로 수품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몸담고자 한 갈멜 수도회 역시 퇴폐적인 시대의 영향을 받아 수도자들 또한 완덕에 대한 열망이 없고 인간의 욕망을 따르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염려한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의 소속인 갈멜 수녀원의 개혁에 착수하였고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는 남자 수도회의 개혁을 권합니다. 요한은 뜻을 같이하는 안토니오 수사와 함께 엄격한 금욕과 고행의 생활을 하면서 오직 하느님 안에 살려고 노력합니다. 극도로 절제된 삶을 살며 요한은 마치 세례자 요한이 외쳤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회개를 권고하고 악한 상황들을 끝없이 규탄합니다. 철저한 수도자로써 살아가는 요한의 생활에 탄복한 이들이 함께 모여 복음적인 생활을 하게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수도회를 지원하는 사람들의 수가 날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요한의 노력과 복음적인 삶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납할 수 없었던 기존의 갈멜회 수사들은 원한을 품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를 괴롭혔습니다. 바로 요한이 저술한 <갈멜의 산길>, <어둔 밤> 등이 그런 고통의 시절을 영적인 성숙의 과정으로 표현하며 신앙의 밤으로 나가기 위한 과정이라 이야기하고 있지요. 갈멜 총회가 열리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을 오해한 총장은 그를 톨레도 수도원 지하실에 감금시키도록 엄명합니다. 요한은 그곳에서 온갖 모욕과 학대를 받지만 모든 것을 묵묵히 감내하며 형제들에게 일언반구의 항변도 하지 않고 오히려 덕을 쌓게 하는 은인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요한의 결백이 드러나 교황 비오 5세 및 그레고리오 13세는 그의 이상을 받들어 수도에 전념할 수 있는 특수한 갈멜 수도회를 공인합니다. 이로서 그에 대한 모든 오해가 풀리고 수도회는 큰 오해 없이 성장하는 계기를 맞습니다. 요한의 겸손과 높은 덕을 아는 수도자들은 그를 총장직에 추대하지만 그는 끝내 사양하고 1579년부터 2년 간 신학교 교장으로 지내다가 이후에는 그라나다 수도원장으로 있으면서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한 생활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시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588년 갈멜 총회석상에서 요한의 수도 규칙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이유로 일부 수도자들이 회칙의 완화를 선동합니다. 그는 회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총장의 명에 따라 미국으로 떠나게 되지요. 그 곳을 향하는 도중 열병에 걸려 우베다라는 마을에 있는 수도원에 머물렀으나 그곳에서도 수도원장에게 시련을 받았고, 설상가상으로 병세는 더 악화되어 병마와 싸운 지 4개월 째인 1591년 12월 14일 하느님께로 돌아가십니다.
사후에 요한은 십자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온전히 자기를 버린 엄격한 관상생활로 점철된 전 생애로 하느님의 사람이었음이 판명되어 1675년에 시복되고 1726년에 성인 품에 오르게 됩니다. 그가 특히 <갈멜의 산길>, <어둔 밤> 등에서 보여준 초자연적인 깊은 지식으로 인하여 교황 비오 11세는 1926년에 그를 교회의 박사로 선언하였지요.
예수님께서 치욕과 고통, 배반과 죽음의 길인 십자가의 어둔 밤을 걸으실 수밖에 없으셨듯이 십자가의 성 요한 역시 예수님과 같이 인간으로서는 감래하기 어려운 시련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 정화시키고 승화시킨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활의 삶을 사셨듯이 완덕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 시대는 작은 시련과 하찮은 고통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평불만하며 남을 탓하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곳곳에 난무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참지 못하고 서로를 공격하여 상처입고 단절되는 외롭고 안타까운 결과들이 세상을 휩쓸고 있지요. 완덕으로 나아가는 길은 매 순간 순간을 발설하고 표현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가 모든 어려움을 가슴에 담고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어둔 밤을 걸으셨듯이, 오직 주님만을 믿고 그 길을 갈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을 지내면서 인내할 수 있는 은총과 지혜를 다시 한번 청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