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림 제2주일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출현을 알리면서, 그것이 역사적 어느 시점에 일어난 일인지를 정확하게 먼저 말합니다. 로마 황제 테베리오 치세 15년이고, 당시의 로마총독은 빌라도이며, 팔레스티나 영주 세 사람과 대사제들의 이름도 밝힙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면서도 당시의 로마 황제와 총독의 이름을 먼저 밝힙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기원은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신화의 인물들이 아니라, 역사적 실제 인물이고 그들로 말미암아 발생한 그리스도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 부근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시대 팔레스티나에는 여러 형태의 세례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율법과 성전 의례에 대한 유대교 당국의 요구는 엄하였습니다. 사람이 그 요구들을 온전히 지키기는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하느님이 버린 죄인이라는 절망감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 시대의 세례는 흐르는 강물에 사람의 몸을 잠기게 하여 죄를 씻는 의례였습니다. 그것은 유대교 실세인 제관과 율사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민중 안에서 일어난 일종의 신앙부흥 운동이었습니다.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의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사람들 중 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세례는 다른 세례 운동가들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세례들이 단순히 죄를 씻는 의례였던 반면, 요한의 세례는 받는 사람이 회개, 곧 삶의 전환을 약속하며 일생에 단 한 번 받을 수 있는 의례였습니다.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받는 세례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애의 어느 시점에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서들이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셨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발족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위한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례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세례자 요한을 정확히 자리매김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살아 있던 시대입니다. 세례를 베푼 요한이 세례를 받은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여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내진 인물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서(40,3-5)를 인용하여 그들의 해석을 뒷받침 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요한은 예수님이 알려 주신 구원을 사람들이 보도록 길을 마련한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회개는 어려운 절차가 아닙니다. 삶을 바꾸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던 사람이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 자기 욕심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겠다는 결심이 회개입니다. 그 결심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하고 세례를 받으면 죄가 용서된다는 요한의 가르침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일을 왜곡하였습니다. 율사들은 율법 준수만을 강요하였고, 제관들은 성전에 바칠 것만 강조하였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깨달음에서 발생한 율법이고 제물봉헌이었지만, 잘 지키고 잘 바쳐서 보상을 받도록 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욕심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지키고 바치는 일에만 골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율법 준수와 제물봉헌으로만 사람이 관계 맺을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제물봉헌이 있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고 그분과 함께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사는 데에 필요한 지침이었습니다. 제물봉헌은 사람이 노동하여 얻은 것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서 하느님의 시선이 그 위에 내려오게 하여 그분의 시선으로 자기의 산물을 보겠다는 의례였습니다. 인간이 얻은 것을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로운 것으로 보는 계기였습니다. 은혜로움을 깨달은 사람은 얻은 것을 이웃 앞에도 은혜로운 것이 되게 내어 놓습니다. 율사와 제관은 지키고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단죄되지 않고 복을 받아 잘 사는 수단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시대 세례 운동은 이런 종교적 여건에서 발생한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계기였습니다. 요한은 물로 씻는 죄의 용서만이 아니라 마음가짐의 변화를 요구하는 적극적인 의례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의례였습니다. 후에 예수님은 이 새로운 삶을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녀 된 삶으로 발전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자녀는 은혜로우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실천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기도입니다. 그 실천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다, 사랑하신다, 용서하신다는 말들은 모두 하느님이 은혜로우시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자녀 된 사람은 그 은혜로우심을 이웃 앞에 실천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말은 모두 우리가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말은 허공에다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그런 실천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오늘 복음이 인용한 이사야서는 말했습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인간을 차별하는 높고 낮음을 없애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체험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는 자녀가 되어 사람들이 그분의 구원을 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웃에게 은혜로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저 멀리 내세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람들에게 은혜로울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마르 10,43)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
[강론] 대림 2주[서공석신부님]
2006. 12. 10. 오후 12: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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