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130-150

2006. 11. 10. 오전 7:56:41

글자

131.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분열(1517년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의 분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차례입니다.  종교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누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한 분은 아우구스티노회 소속 마르틴 루터(수사 신부)입니다.

그는 1483년에 튀빙겐 지역의 작센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1484년 만스펠트의 광산지역으로 옮겨가 살게되면서 동광기업(광산)의 경영주가 되었고 아들의 입신출세를 위해 교육시킬 계획을 세운다.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아들은 라틴어, 수사학, 윤리학과 신심과 조용한 기도 생활에 대해 배운다.  그는 15세에 에르푸르트대학에 입학하여 강의를 들으면서도 악기연주에 재능을 보였고,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진지해 진다.  이후 1505년에 부친의 뜻에 따라 같은 대학의 법학과에 입학을 하지만, 2개월 후에는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법학과를 포기한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사가 된다.  1506년 9월에는 정식서원을 하고 수도자가 되었고, 1507년 4월에는 사제서품을 받고 본격적인 신학을 연구한다.  1513년에는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성서를 강의한다. 1515년에는 비텐베르그 본당의 설교가가 되어 강론대에서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주창한다.  개인의 구원에 관심이 많았던 루터는 영신적 번뇌와 그 탈출과정을 통해서 ‘의인은 신앙에 산다’는 신앙에 의한 의화(義化)’를 주창하면서  교회, 성사, 사제직의 필요성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때 교황 레오 10세는 전임교황이 베드로 대성전의 재건을 위해서 반포한 대사(大赦)를 다시 선포하고 비용을 걷기 위한 방법으로 대사 설교가를 임명한다. 이 설교가(說敎家)가 된 루터는 신자들이 대사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망각한 채 대사부를 면죄부(免罪符)로 착각하여 남용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1517년 10월 31일 교회관습대로 교구장과 대주교에게 대사남용에 항의하는 95개항의 신학명제를 작성, 동봉하여 보낸다.  약 2 주 후, 이 명제가 출판업자의 손에 넘어가 인쇄되고 인문주의자들과 교회개혁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환영을 받는다.  마르틴 루터는 이 반박 명제를 비덴베르크 성당에 붙이고 95개 조항을  게시하여 개혁 주도의 신호를 보인다.

1518년 10월 카예파노 추기경이 심문관으로 독일의 아우스부르크에 파견되어 루터의 가르침, 즉, 대사, 신앙과 성사은총의 관계, 공로의 의미에 대한 견해를 경청하고 그에게 무조건 이단적인 교리를 취소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1520년 2월 로마에서는 이 교리에 대한 내용이 조사되고 루터의 단죄를 선언한다.  1545-1563년 사이에 열렸던 트리덴틴 공의회에서 다른 교리를 말하는 프로테스탄트를 인정하지 않기에 이른다.


132.   영국 성공회

영국교회를 위시해서 영국교회의 대표 주교인 켄터베리 대주교 관구와 통공관계에 있는 여러 교회를 성공회라 부른다. 

성공회는 1533년 헨리 8세는 아라곤의 가타리나와 이혼하고, 앤 블린과 결혼하여 파문 당함.... 1534년에 그는 수장령을 발표하고, 수장령을 통하여 국왕이 영국교회의 으뜸이라고 선포한다. 이렇게 시작된 성공회는 ‘개신교의 한 형태’입니다. 그렇지만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가장 잘 보존하는 개신교이기도 합니다.

성공회는 혼인문제와 관련하여 로마의 교황과 대립했던 ‘헨리 8세’때를 시작으로 해서,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는 국가와 종교를 단일시 하려는 일 때문에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받습니다(1570년).  이때부터 로마교회와 분열된 것입니다.

이 성공회는 성경을 기본 신앙으로 따르고,  가톨릭에서 통용되는 사도신경과 니체아 신경을 믿으며, 주교 사제 부제의 성직제도를 보존하고,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그대로 보존한다.  하지만 1850년 이후 영국에 다시 가톨릭교회가 진출하여 1982년 현재 31개 교구, 국민의 9% 가량인 약 509만 명의 가톨릭신자가 있다.


133.   중세시대 이후의 간단한 세계 교회역사

1583년 :  마태오 리치가 중국에서 선교활동 시작...

1633년 :  갈릴레오가 이단 심문을 받음... 그는 1642년에  운명함........

1704년 :  청나라의 전례문제... 유교의 여러 사상과 관습을  그리스도교와 접목시키려는 선교사들의 행위, 특히 조상 숭배와  중국의 민간 신앙 문제의 적용이 큰 문제가 되어, 끌레멘스  11세가 이를 금지시킴...

1724년 :  청나라 크리스챤 박해가 시작됨....

1789년 :  프랑스 혁명이 시작됨.... 교회 재산의  국가귀속 등의  공포정치 시작... 교회가 수많은 박해를 받기 시작하고   1796년 나폴레옹의 교황청 침공으로 극도의 혼란상이 가중됨..........미국은 헌법 제 1차 개정 작업을 통하여 종교자유를 명기함..

1829년 :  영국 가톨릭이 종교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헨리 8세 이전의 시민권을 회복함...

1869년 :  제 1차 바티칸 공의회... 비오 9세가 소집한 이  공의회는 약 800명의  고위  성직자가  참석하여  4회기  89회  회의를 함.... 교황 수위권, 무류성, 19세기의 주지주의, 유물론 등  내외의 위험에 대치함....

1967년 :  로마에서 세계 평신도 대회가 개최됨... 교황은  민족들의 발전을 촉구하는 "뽀뿔로룸 쁘로그레시오" 반포하고 사제 독신제도를 강화하는 "사체르도딸리스 챌리바뚜스" 반포하심...

1983년 :  교회법이 개정 선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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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

134. 교회창설의 배경, 천주교의 수용과 가성직제도

지리상의 발견과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세계여행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천주교가 전래되게 하였다. 이들 서양전래의 가톨릭은 당시의 문화와 함께 전래되었다.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의 사신들은 중국의 예수회선교사들을 통하여 서양문물을 얻고자 하였고, 처음에는 학문으로 필담(筆談)을 나누던 것이 계기가 되어 서양의 문물이 점차로 조선에 반입되기 시작하게 되었다.

최초라고 한다면 아담 샬이 소현세자를 통해서 조선에 전도하려고 함이었으나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서적들은 17세기초부터 서양의 학술서적들이 반입되기 시작.  마테오리치의 한문교리서  ‘천주실의’(天主實意)가 진리 찾던 소수의 실학자를 매료시킴. 처음에는 학문으로 연구함(천주학, 천학, 서학). 차츰 신앙으로 바뀜. 교리 연구하던 남인학자들이 받아들이고 환영하여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으로 등장. 사절단으로 북경을 오가면서 이승훈이 1784년 2월에 북경에서 불란서 선교사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 받고, 조선에 돌아와서 이벽과 권일신 등에게 세례 베품.  이승훈이 가져온 서적들을 읽고 연구한 다음에 복음전파 시작함.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의 해결점을 서학에서 찾고, 이제는 기도와 재계등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   1786년부터 지도급 신자들은 가성직제도 세워 북경과 유사한 체제 세우려함. 북경주교에게 문의한 결과 옳지 않음을 알고 선교사 파견을 요청.  조선의 천주교 수용은 조선인 스스로에 의해 시작됨.


135. 한국 교회역사의 시작

처음으로 한국 땅에 천주교가 소개되었을 때에는 지금처럼 신앙이라기보다는 학문의 하나였습니다.  명분에 죽고 사는 ‘주자학’이라는 이론적인 학문을 떠나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의 하나로 소개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들이 발견한 바에 따라서 생활의 한 부분으로 발전합니다.

그런 뜻에서 한국교회의 전래는 자생적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학문의 하나로서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냉대를 받던 몰락한 양반계층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학문의 하나로서 탐구하다보니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삼은 것과 많이 차이가 나죠.  

이들은 처음에 신앙이 아닌 학문의 하나로 출발했기에 지금은 천진암이라고 알려진,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에 있는 절[寺] ‘주어사’에서 모임을 갖고 시작합니다.  이때가 역사로는 1777년이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학문의 하나로 출발했던 것이기에 지금 이야기하기에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는 것에 따라서 지금의 ‘주교, 신부, 부제, 신학생’의 개념을 사용합니다. 그러다가 이승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북경의 성당으로 보내어 1784년에는 세례를 받게 합니다.  역사에서는 그때부터를 한국교회의 시작이라고 기억하고 지냅니다.


이 해를 기준으로 해서 1984년에는 교회역사 200주년 기념식도 여의도 광장에서 가진 적이 있었지요.  굳이 역사상에서 따진다면, 올해는 한국 천주교회 전래 1998년에는<--215주년-->쯤 될 것입니다.


136. 성직자 영입운동과 조선교구의 설정

종교로 받아들여지면서 집회도 잦아짐.  정부는 탄압시작.  북경교구에는 성직자파견 요청. 1794년 주문모 신부 입국하여 1801년 체포 순교함.   33년간 성직자 없이 교회부흥운동을 펴나감.   1831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교구 설정함.  브뤼기에르 소주교를 임명하였으나 입국 전에 병사함.  후임교구장으로 앵베르 범주교가 다른 유방제, 모방, 샤스땅 신부가 입국함.


137. 교회가 받은 탄압

사상적 (--유교의 양반 사상과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부딪힘), 사회적(천주교의 제사거부), 정치적(당파싸움의 방편으로 이용됨) 이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로 낙인찍고 인륜을 거스르는 단체이며 모임이라고 단정. 유교의 배타주의, 정교합일주의, 당쟁과 세도정치, 쇄국이양주의의 복합적 결과.

이런 탄압을 가리켜 박해(迫害)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크게 4대 박해와 한번의 작은 사건이 있다.


137.1. 신해교난(1791)

   :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바오로)와 권상연(야고보)가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버린 사건 때문에 피신했다가 자수하여 결국 사형 당함.  이 사건이 확대되어 이승훈, 권일신 등도 삭탈관직됨.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자 수는 더욱 늘어났다.


137.2. 신유박해(1801)

   : 정조 후임으로 순조가 즉위(1801)하자 조모(祖母)인 대왕대비 김씨가 실권을 잡고 천주교와 가까웠던 시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천주교 탄압.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주문모 신부등 3백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함. 1834년 유방제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는 조선에 신부가 없었다.  1831년에 교황청은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빠리 외방 선교회가 맡게됨.  신자수가 9천여 명까지 늘어남.  1836년경에는 김대건, 최양업 도마등 3명의 신학생이 유학 떠남.


137.3. 신유박해 때 즉 1801년 10월에 전국에 천주교  금지교서를 내리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오늘날 이른바 사학이라는 것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헐어 없이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으로  돌아가게 한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이에 물들어 그릇되어 가니, 이 어찌 슬프고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랴 !.... 잡아서 뉘우치지 않는 무리가 있거든 반역죄로 다스려라.... 수령은 각각 그 맡은 바 지방에서   오가 작통법 (다섯 집씩 반을 만들어 그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으면 관에 고발하도록 하는 제도 )을 밝게 실시하여........... 사학의 무리가 있거든 곧 관에 고하여 죄를 다스려 사학을 뿌리째 없애버려 남은 씨가 없도록 하라 "   << 순조실록 >>


137.4. 기해박해(1839)

   : 순조 후 헌종이 즉위하자 외조부인 조만영이 시파를 축출하기 위해 탄압시도. 외국인 성직자가 있다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 박해로 성직자 세 명(앵베르, 모방, 샤스땅)과 2백여 명의 신자들 순교함. 천주교가 사교라는 척사윤음을 발표. 이때 신자수는 1만여 명 이상. 정하상은 ‘상재상서’를 지어 천주교를 변호하고 박해의 부당함을 알림.


137.5. 병오박해(1846)

   : 김대건이 최초의 사제(상해 긴가항 성당)가 되어 1845년에 귀국.  그러나 1년도 안되어 체포되고 1846년에 교우 9명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함.  이후 철종이 즉위하자 교회에 대한 태도가 너그러워진 듯.  12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활동.  신자 수는 2만3천에 이르기까지.


137.6. 병인박해(1866)

   : 철종 이후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의 섭정.  조정의 인물들이 외국세력에 대항하여 천주교 반대.  자신의 입지를 튼튼히 하기 위해 박해시작.  가장 대규모로서 9명의 성직자와 8천여 명의 신자들 순교.


전체적으로 약 100년 동안 1만여 명의 교우들이 순교함. 103명이 1984년 5월 6일, 한국을 방문하신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하여 여의도 신앙대회 중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38. 박해의 가장 큰 원인

박해의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인 것으로 반대세력을 몰아 내려는 한 방편으로 천주교를 희생으로 삼았다... 또  다른 이유로는 조선에 외국인 신부들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조정에서는 외국신부들을 처단하기 위해 교우들을 잡아 들였다... 조정에서는 전국에 척사윤음을 공포함으로써 박해령을 내려 전국에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 박해 때에 앵베르 주교와 샤스땅 신부, 모방 신부가 순교하였다...두 신부는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교황청에 조선교회의  형세를 적어 보냈다... 그에 따르면 당시 교우 총수 약 1만명 예비자 600명이었다...


139. 종교의 자유와 오늘의 교세

쇄국정책에서 1876년 병자수호조약으로 문호개방. 1883년에 독일과 영국에 맺은 문서에서 종교의 자유를 명기함. 1886년 한불통상조약으로 완전한 신앙의 자유보장.

1888년에는 최초의 수녀회 ‘샬트르 바오로회’가 진출. 성서 출판소를 열어 교리서 발간시작.  1893년에는 약현성당(중림동)이 최초의 양옥으로 준공. 1898년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천주교인들의 모임자리였던 김범우의 집에 명동성당이 들어섬. 1906년 경향신문 1907년 경향잡지 창간됨.

1925년에는 79, 1968년에는 24위가 복자로 시복됨.  1984년에는 현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됨. 1997년 말 현재 신자수가 300-310만 명이라고 한다.


140. 종교 분열에 대한 종합

박해는 신앙의 눈으로 보면, 교회의 승리입니다. 박해를 통한 교회의 발전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천주교에 허용된 신앙의 자유도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라는 것을 알아야.  순교는 신앙증거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바침으로써 육신을 죽이는 이를 초월한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오늘날은 예전과 같은 순교는 없다.  불가능하다고 해도 그 정신으로 살아가야.

가정에 충실하고 가족을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가족의 평화와 화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죽이는 삶이 가장 먼저 요구되는 순교의 삶이다.   순교는 반드시 행위로 표시되어야 한다.


<교회의 사명(使命) >

141.   위에서는 세계 교회의 역사와 한국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간단하지 않은 역사를 교회라고 하는 무형의 형체가 갖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으로는 이 교회의 사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교회의 사명’을 말씀에 대해 드리기 전에 다시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강조하겠습니다.  짧게 말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를 인류의 구원자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와 성서에 나오는 말을 정리하면,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교회의 역사가 이제까지 있어왔던 삶의 발자취를 말씀드린 다음, 이제는 그 교회가 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하는 공동체인지를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는 ‘초대받은 당신’ 31과(142면이하)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말을 몇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는 것 정도로 하겠습니다.  그 교회의 사명을 표현하는 예언직, 사제직, 왕직으로 말하는 것은 옛날의 분류방식입니다.  의미는 현재의 것으로 번역해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142. 예언(豫言)직무(職務)는 말 그대로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전하는 임무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성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이제는 필요 없다고 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너무나 현명해졌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듣는 사람들이 없다고 하는 것도 옳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전하는 직무를 가리킵니다.  각자의 개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듣는 방법은 성서를 통해서, 전례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들려오는 소리 경청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신앙을 가짐으로 해서 우리가 삶의 활기를 얻었다면, 그것이 우리로만 끝나지 않게 다른 이웃들에게도 널리 퍼져 나갈수 있도록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언은 단순하게 지붕에서 고함을 지르는 말로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행동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행동 방법에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같은 <협박>이 포함될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삶의 활기를 주고, 나도 역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삶의 활기를 얻는 방법이 바로 이 예언직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3. 성화의 사제(司祭)직무(職務)는 대충 이야기하면 주교와 신부에게 적용되는 용어로 알아들을 우려가 있습니다. 공동체를 하느님의 뜻에 맞게, 거룩하게 하는 일차적인 임무는 그들에게 있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들 역시도 평신도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성화의 임무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봉사라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봉사라는 임무와 그 역할은 그리스도 신앙인이면 누구나 부르심 받은 역할입니다.


144. 봉사를 실천하는 왕(王)직무(職務)는 구체적인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할에서 이야기하는 왕(王)이라는 말을 흔히 우리가 아는 전제군주 시대의 그 왕(王)과 혼동하면 잘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5천 명을 먹게 하신 기적 다음에는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로부터 왕으로 추대 받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합니다(요한복음 6,15).  마음에 들지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것이 당신이 나가실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정치 권력자로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한 폰티우스 지방 출신 빌라도의 고민은 더했을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15장에 나오는 것처럼 빌라도는 사형선고의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마르 15,2)’라는 질문에 올바른 답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로마에 대한 반역자의 죄목이라면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없었기에 예수님의 사형선고 명패에는 그 말이 적히고 맙니다.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IESUS NAZARENUS REX IUDAIOS)-마태 27,29'이라는 죄명을 쓰고 죽은 예수님에게 적용된 말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왕이었으면 이러한 모습으로 죽으려고 했을까?  모르긴 해도 우리가 왕으로서 직무를 이야기할 때 알아듣는 말의 의미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왕으로서, 12군단이상을 호령할 수 자격을 갖춘 분(마태 26,53)이 무력하게도 그렇게 죽고 맙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에서 갖는 용어와 일상생활에서 갖는 용어의 의미를 구별해서 알아들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이러한 자격을 갖추었던 분이 산 자세가 바로 왕으로서의 직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것을 알아듣는 우리도 올바른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참된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고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서 참된 삶이요 그 길을 알려주었던 직무를 우리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힘을 서로 잃지 않도록 격려해야 한다는 소리도 될 것입니다.


<마리아. MARIA>

이제는 교회와 직접 관련되는 인물에 대해서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앞서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으니, 성서에 나오는 인물 하나를 통하여 교회와의 관련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인물은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그가 했던 역할은 대단히 커다란 의미를 지녔다고 하는 편이 올바를 것입니다.  인물의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여인, 마리아를 가리켜서 교회의 어머니요, 신앙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에서는 남들이 이상한 시각을 갖고 쳐다 볼 정도(?)로 마리아를 공경하고 그를 통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45. 마리아에 대하여

먼저 본론에 이야기 드릴 마리아를 이야기하기 전에, 마리아라는 이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이름은 대단히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우리 이름에 영희, 철수라고 이름 붙이듯이 아주 보편적인 이름이었고, 속된 말로 길에 돌멩이가 있듯이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흔한 이름을 가진 여인을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역사를 시작하셨고 삶의 본보기를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성서에는 우리가 이 시간을 통해서 보고자 하는 마리아라는 여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탄생은 어떻게 되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등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몇 부분 언급되어 있는 것을 골라서 봐도, 그녀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분량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성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결론 한가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혈통은 모계혈통제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역사에서 남성과 여성에 대한 중요성을 따지고 역사를 이끄는 주체는 일반적으로 남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세계에서 여성에 대한 역할을 이렇게나마 성서에 담고 있다는 데서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 분으로 설명을 합니다.  현대의 시각으로 봐서 마리아라는 여인에 대한 언급 분량이 적은 것이지, 결코 적은 분량이 아니라는 공통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그 마리아에 대해서 4개의 복음서에 기록하는 내용부터 보기로 하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

1,16에는 예수의 족보에 대해서 나오는 과정에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는데서 등장합니다.

1,18-25에서는 예수를 잉태하는 여인으로 나옵니다. 

12,46-50에는 복음선포에 나선 아들을 찾아보는 한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마르코 복음 :

아들을 찾아보는 경우에만 언급됩니다.(3,31-35)


루가복음 :

1,26이하, 예수를 잉태하게 되는 과정에서 천사의 방문을 받고, 

1,39이하에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2,22-40에서 아기 예수를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봉헌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2,41-52에서 예수나이 12살에 일어난 사건을 가슴속에 새기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

2,1-11에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 기적을 요청하는 자상하신 어머니로 등장하고,

19,25-27에는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대상으로 언급하는 중요성(?)과 견주어 보면, 성서에 나와있는 분량은 적은 편입니다.

<초대받은 당신에서는 ‘구약에 예언된 마리아, 구원의 협조자로서 마리아, 구세주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로서 마리아, 교회의 모범으로서 마리아’를 언급한다. >


146. 마리아에 대한 호칭 1 -- 교회의 어머니

성서의 내용에 위와 같이 많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아들을 가장 가까이 보아왔고, 인류의 구원사업을 처음부터 지켜보았다는데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 예수를 믿고 따른 사람들로써 교회가 이루어졌으므로 그 믿음을 처음부터 간직했던 분으로서 ‘교회의 어머니’라고도 부릅니다.  즉 믿는 자들, 신앙인들의 삶의 모범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또한 모든 일을 가슴에 품고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생각과 자세를 먼저 앞세우기보다 하느님의 자리를 먼저 생각했던 여인, 마리아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47. 마리아에 대한 호칭 2 -- 신앙인의 어머니

이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이 죽었다고 부활, 승천하신 뒤에서 꾸준히 제자들의 모임에 함께 합니다(사도행전 1,14).  이것은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신 경우라 할 것입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데서도 아들을 꾸준히 믿은 결과로 일어난 가나의 혼인잔치의 경우를 보면서 우리도 신앙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새로운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향하여 ‘이 분은 네 어머니(요한복음 19,25-27)’라고 하시며 맡기십니다.  마리아는 분명 특별한 신앙심을 가지고 아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모든 것을 간직하고 가슴에 새기신 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분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 분을 우리의 어머니로 공경하는 것입니다.


148. 마리아 공경은 우상숭배인가? -- 가장 커다란 반발에 부딪히는 질문

가톨릭, 천주교는 마리아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종교인가?  가장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부딪히는 질문이며 동시에 가장 대답을 하지 못하는 질문입니다.  물론 이 질문을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목사들에 의해서 교육을 받은 개신교 신자들입니다.


올바른 답을 먼전 말씀드리면, “그렇지 않다. 그것은 제대로 모르며 덤비는 사람들이 하는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몇 가지의 방법으로 말씀드리죠.

149.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부모가 어리석고 바보 같고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한다고 해서 멸시하는 자식치고 제대로 되는 놈이 없는 법입니다. 혹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는 편이 올바를 것입니다. 좋든 싫든 그러한 부모가 있었기에 그 사람들을 바탕으로 해서 그 잘난(?) 자식이 있을 수 있게 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모가 못났으면,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죠.  거기서 내 부모가 엉터리요, 바보요, 나를 사람 대우 해주지 않는다고 말해야 ‘그 사람 참 똑똑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갈 데까지 다 간 세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좋든 싫든 간에 개신교의 뿌리는 천주교입니다.  프로테스탄트의 뿌리는 가톨릭입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개신교가 태동할 때에 천주교에 잘못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정리가 되었고 지금은 그러한 요소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비판의 대상이었던 일들에는 ‘가톨릭 신앙이 마리아와 관련된 요소’는 없었습니다.


150. 이런 사람들은 신앙이란 무엇인지 그 내용부터 다시 공부해야 합니다.  우상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숭배가 무슨 뜻인지, 신앙의 대상은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덤비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무서워서 피하거나, 몽둥이로 맞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죠.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이나 말을 듣는 사람이나 똑같은 인격체인데 말입니다.  인격체는 인격체로 대우 해야죠.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는 그저 돌아서는 일밖에 다른 대응책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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