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52-70

2006. 11. 10. 오전 7:53:56

글자

< 성서 -- 초대받은 당신 17 과 >

52. 성서에 대해서 처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성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성서는 우리가 한자로 聖書라고 씁니다. ‘거룩한 책’이라는 한자의 뜻을 빌어서 씁니다.  왜 거룩하다고 이름을 붙이는가?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바라보는 뜻이며 설명에 따라서 달라집니다만, ‘하느님의 뜻을 담은 글’이기에 그렇다고 먼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모든 내용이 다 거룩한가? 라고 우리는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각각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보다는 왜 그런 용어를 쓰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성서는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 보이는 성서가 지금의 형태로 자리잡는 데에 꽤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단편적이긴 합니다만,  글로 남겨지지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최소한 3400년 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지금의 형태로 차츰차츰 자리잡은 것은 기원전 900년경 전쯤으로 일반적으로 정합니다.  이 시대는 솔로몬 왕정시대입니다.  물론 이 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때부터 모세 오경부터 시작하여 글로 하나씩 둘씩 쓰여지기 시작합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역사적인 구별에 의한 것입니다.  구약성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글로 남은 것은 <마카베오서 상하권>정도로 일반적인 구별을 합니다.  역사의 배경을 보면, 기원전 140년 전 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53. 성서는 단순한 역사의 기록은 아닙니다.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자기 백성들은 하느님의 선민(選民)이라는 의식을 갖고 살았던 사람들이 기록한 ‘반성과 삶의 회고록’이라고 하는 편이 아마도 더 올바른 표현이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영광스러운 일은 물론이고, 사람이면 숨기고 싶을 만한 개인적인 일들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서는 믿음의 고백서라고 하는 표현도 가능할 것입니다.  자신들 민족의 기원과 그 흥망성쇠를 적고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역사와 흔적을 맞출 수 없는 ‘원역사’도 거기에는 적혀 있습니다.  이 원역사는 다른 말로 하면. ‘신화(神話)’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 원역사의 부분은 창세기 1-11장까지를 지칭합니다.


54. 성서는 또한  하느님의 계시를 적어놓은 책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몇 가지의 의미 외에도, 성서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알리는 이야기, 말씀, 예언에 관한 이야기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 직접 들었기에 쓴 내용은 아닙니다.  지금 말씀드린 몇 가지의 뜻을 담아서 짧게 이야기하면, ‘성서는 믿음의 기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내용에 따라서, 역사서, 예언서, 묵시록, 복음서, 서간서, 교훈서, 시편 분야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이야기만을 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자신들에 관한 역사와 삶의 이야기를 하느님의 뜻과 비교하고 그 반성들을 기록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세상에 남겨있는 그 어떤 역사서보다도 많이 읽히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비교하는 것은 성서에 비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55. 이 성서는 분명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언어로 쓰여졌습니다.  최초의 기록단계는 이스라엘 말인 ‘히브리어’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이 국가가 시간이 흐르면서 멸망하고, 그 민족의 백성들은 세계의 여러 곳으로 흩어집니다.  유배이후에는 다시 잠시 모이기도 합니다만, 그네들 민족이 분산되는 결과에 따라 기원 전 300년경에는 그리스말인 ‘희랍어’로도 번역이 됩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히브리어로 쓰여졌던 성서가 그리스말로 번역되는데는 72명의 학자들이 72일간에 걸쳐서 번역했다고 하여 이것을 약칭하여 ‘70인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70인 역(譯)은 구약성서의 제 1 경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제 1 경전만을 구약성서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천주교에서는 훗날 희랍어로 쓰여진 7권까지를 포함하여 성서로 인정합니다.  훗날 희랍어로 쓰여진 구약성서는 제 2 경전이라고 분류하여 부릅니다. 간단히 성서는 이렇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제 1경전=39권,  제 2 경전(외경)=7권, 합계 46권이 구약,  신약은 27권으로 구별합니다.   신약성서와 구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해서 구별합니다.


56.   이렇게 사람의 언어로 쓰여졌지만, 교회에서 이야기할 때 이 성서는 ‘하느님의 영감(靈感 : INSPIRATION)'을 받아서 기록되었다고 규정합니다.  순수한 인간의 이야기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의 힘, 영감은 단순히 인간을 그저 ’로보트‘로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 영감을 이해하는 참의미가 됩니다.  인간의 말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57.   이 성서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고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많은 논란거리였습니다.  성서를 누가 해석할 수 있고, 누가 읽을 수 있는지 하는 문제가 커다란 논란거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가톨릭에서 일반 신자들이 성서를 쉽게, 자신들의 언어로 대할 수 있도록 한 역사는 길지 않습니다.  잘못 해석되고 그 가르침이 잘못 적용되었을 때, 생길 수 있는 오류가 컸음을 알아보고 그랬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에 비교해서 가톨릭의 미사에서 ‘말씀의 전례’ 부분만을 강조하는 개신교에서는 일찍부터 성서를 자의적으로 번역해왔고 마음대로 적용시켜 왔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이 완벽하게 해석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서를 해석하기 시작하고 알아들으려고 노력한 것이 약 2000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지금도 새롭게 번역되고 새롭게 해석을 시도하는 글들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성서를 해석하고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은 ‘교회의 교도권(敎道權)’에만 인정돼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성서를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뜻은 하느님의 뜻을 정확히 알아들으려면 교회가 제시하는 가르침과 규정을 준수하면서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58. 우리가 성서를 대하는 자세도 거기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역사를 담고 있는 것,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에서 빗나가기만 하는 인간들을 향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고 있는 것이 성서라고 생각할 때, 우리가 성서를 올바로 대하는 방법은 그 성서를 통하여 하느님을 대하듯이, 하느님을 만나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내가 지금 이 순간 다시 듣는 마음과 자세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아들을 때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선물과 삶을 바르게 이끌어갈 수 있는 지혜를 거기에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   교재 18 과  ~   23과 >

59.   이제는 우리 신앙의 중심인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은 믿음의 고백이 주안점을 이룹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고 확인한 내용만을 사실로 여기고 그것만을 다루어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말씀드리기는 어렵다는 소리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인물과 그가 했던 역할이 신앙인들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갖고 다가오지만, 신앙인이 아니었던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기록은 일반 역사가들의 기록에 많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5과에서 언급했음을 기억시킬 것).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루게 되는 인물 예수는 신앙을 고백한 기록들인 성서를 중심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60.   예수는 처음부터 하느님에게서 예고된 분이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던 시대에 인간은 범죄를 통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집니다(==>원죄(原罪)). 그러나 최초의 인간들이 그렇게 멀어지긴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사랑의 손길을 거두지는 않습니다.  ‘뱀과 여인의 후손사이에 원수를 맺어주리라.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뒤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머리를 밟힐 것이라’는 예언을 통해서 인간에게 죄악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당신의 섭리를 예고하십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서 ‘원복음(原福音)’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서 7장 10-17절에 나오는 임마누엘 예언을 통해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61.   (임마누엘 예언)(이사야 7,10-17)

10 야훼께서 아하즈에게 다시 이르셨다.  11 "너는 야훼 너의 하느님께 징조를 보여 달라고 청하여라. 지하 깊은 데서나 저 위 높은 데서 오는 징조를 보여 달라고 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나는 징조를 요구하여 야훼를 시험해 보지는 않겠습니다."  13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들어라.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도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도 성가시게 하려는가? 14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 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 아기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할 줄 알게 될 때는 양젖과 꿀을 먹게 될 것이요, 16 그 아기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할 줄 알게 되기 전에 네가 원수로 여겨 두려워하는 저 두 왕의 땅은 황무지가 되리라. 17 야훼께서 아시리아 왕으로 하여금 너와 너의 겨레와 너의 왕실을 치게 하실 터인즉, 그 날은 에브라임이 유다와 갈라지던 날 이후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불행한 날이 되리라.  

:  임마누엘의 예언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유다의 왕으로 등장했던 아하즈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당시 그가 다스리던 때에 아시리아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집니다.  그러자 아하즈는 전쟁을 대비하여 저수지의 물을 확인하러 갑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얼마나 견딜 수 있겠는지를 계산하자는 의도였습니다. 그것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아하즈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만을 먼저 한다고 섭섭하게 여기시며 그렇게 불안해하지 말고 차라리 떳떳하게 하느님의 징조를 청할 것을 요구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느님을 따른다고 알아주겠고 네가 불안해하는 외국의 침공도 해소시켜 줄 수 있다고 하시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즈는 그러한 청을 하기를 거부하죠. 그렇게 한다면 자신의 위상에 먹칠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무식하게(?) 정면돌파를 하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의 잉태, 임마누엘 예언을 하십니다.  이 임마누엘의 예언대로 성취되었다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복음서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 1,22 : 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의 탄생>

62. 이렇게 태어난 예수에 대해서 그의 탄생에서부터 일생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간단하게 언급할 차례입니다.  이 예수는 기원전 4년경에 이스라엘이라는 땅에 태어납니다.  하느님의 선언과 예언자들의 예언을 따라서 탄생하는 일이었지만 그의 탄생은 행복하지 않았던 것으로 성서는 전합니다.  아기가 생길 때부터, 그 앞에 닥쳐온 시련은 남다른 것이었습니다. 먼저 다윗의 후손, 그의 혈통을 잇는다는 일이 급했었는지 어찌했는지 모르지만, 예수는 아버지를 ‘요셉’으로, 어머니를 ‘마리아’로 하는 가정에 태어나게 됩니다.   그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마태오 복음서 1,18-25에 나옵니다.  그것을 몇 마디의 말로 이야기하면, 천사가 전하는 바에 따라, 여인 마리아가 ‘혼전임신’을 합니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하기 전에 아기를 갖습니다.  요즘 이야기로 하면 ‘미혼모’라고나 할까요?   물론 성서는 그의 이러한 임신과 탄생에 관련된 소식을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태어날 준비를 하게 된 예수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누스의 치세 때에(루가 2,1-7 참조) 베들레헴이라는 동네의 마구간에서 태어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렸고(고향에 가서 인구등록을 하라는 조건 때문에), 고향에는 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적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처음으로 눕혀집니다.   그러나 이때에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게서 황금(=왕), 유향(=하느님), 몰약(=죽음)을 선물로 받고(마태 2,1-12), 동방의 박사들이 헤로데를 거쳐서 왔고 그에게 태어난 장소가 보고(報告)되지 않자, 동방의 박사들이 떠난 베들레헴으로 군사가 파견되고 이 사건을 천사를 통하여 미리 알게된  요셉과 마리아는 에집트로 피난길을 떠나게 됩니다(마태 2,13-15).   그렇게 피신했다가 헤로데가 죽고 난 다음, 나자렛이라는 동네로 와서 정착하게 됩니다.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니 다윗의 후손이 된 것이고, 성장은 나자렛에서 했으니 훗날 ‘나자렛에서 무슨 대단한 것이 나오겠소. 성서를 찾아보시오. 나자렛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온다는 소리는 없소’라는 소리까지 듣게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 I. N. R. I )


63.   이 예수는 아버지 요셉의 직업이 목수였던 관계로, 훗날 목수로 알려지기도 합니다.   이 예수가 12살(=유다인의 성년식 나이) 때에 성전에 가서 있었던 이야기(루가 2,41-52)가 루가 복음서에 전해집니다.  뚜렷한 교육도 받은 것 없이 율법을 공부하고 연구하던 학자들과 토론을 하고 뛰어난 인물이 될 가능성을 보였던 일이었습니다.   위대한 인물은 어릴 때부터 알아본다고 하나요?


<예수의 공생활 시작>

64. 이렇게 나자렛에서 자란 예수가 소년기를 거쳐 30살 가량(루가 3,23참조)에 전도생활을 시작합니다.  물론 이 예수에 앞서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선구자로서 예수를 알리고,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물론 예수도 처음에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있어왔던 의미에 따르면, 이 세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뒤쫓음에서 살아난 것을 기억하는 ‘홍해 도하(渡河)’라고 해석합니다.  홍해를 건넘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게 되었듯이, 세례를 통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세례자 요한의 세례식은 훗날 교회에도 같은 의미로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이 예비자 교육 과정을 마치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에게도 모양을 달리하여, 세례식을 거행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세례예절은 간단합니다만, 그것이 차지하는 의미가 워낙 다양하기에 가톨릭교회에서는 그 세례를 위한 과정이 복잡한 것입니다.

그 복잡한 과정 때문에 여러분과 함께 하는 이 예비자 교리 시간도 만들어지고, 제가 순서에 따라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65. 이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첫 선언합니다.  우리가 예비자 교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던지신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모든 내용을 축약(縮約)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다양한 뜻이 있기에 그것을 설명하는 내용과 여러분들이 할애해야 할 시간이 많은 것입니다.  하느님에 관한 소리를 인간이 하고, 그 소리를 우리가 알아듣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투자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66. 첫 선언을 하신 예수님이 하기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의 순서를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세례자 요한에게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이 때에 성서는 또 한가지의 신비스러운 모습을 전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을 때,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예수님에게 나타나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르 1,11)이라는 말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둘기의 모습을 본 사람도,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은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말을 전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이렇게 나타나는 모습을 ‘세례’때에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유지하고 있는 삶의 정신입니다.


<예수에 대한 악마의 유혹>

67. 예수님의 세례 후에 등장하는 과정은 40일간 광야에 나가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유혹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믿음의 기록인 성서는 세 가지 유혹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것은 마태오 복음서 4,1-11 (또는 루가 4,1-13)에 나옵니다.  그것은 인간의 배고픔에 대한 유혹, 남 앞에서 자랑하고픈 명예에 대한 유혹,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갖고 싶어하는 권력에 대한 유혹을 제시합니다.


68.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40일간 단식하면서 굶고 온 사람에게 먹을 것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유혹일 수 있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장발쟝은 빵 한 개 때문에 19년의 옥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유혹이라는 데는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장발쟝은 큰 유혹에 빠진 다음에 그렇게 인간적인 고생을 했지만, 예수님은 멋있게 그 유혹을 물리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는 말을 그 응답으로 제시합니다.  유혹자로 등장하는 악마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의 유혹을 거둡니다.  우리가 유혹을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서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삶의 열매는 달라집니다. 신앙인으로서 받는 유혹도 여기에 비길 수 있습니다.  반드시 눈에 보이는 빵으로만 비교하기보다는 다른 것으로도 충분히 바꿀 수 있는 말이 될 것입니다.


69. 성전의 한 꼭대기, 한 귀퉁이에 예수님을 세워놓고 한다는 소리,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이 두 번째의 유혹은 남 앞에서 자랑하고 싶은 명예에 대한 유혹입니다.  남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이 유혹입니다. 첫 번째 유혹에서 성서의 말씀으로 응답하는 예수를 보고, 두 번째는 성서의 말씀으로 유혹을 던집니다.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하지 않았소.  그러니 뛰어내려서 하느님이 정말로 그렇게 행동하시는가 시험해 보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럽고 뭔가 남다른 것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이 가진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를 높이거나 뛰어나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확인시켜 줄 것이 없다는 것이 이 유혹에 대한 본질입니다.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이 인간이지만, 우리가 제대로 판단하기만 하면 그런 유혹을 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유혹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하느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면서 하느님을 떠보는 태도는 용서를 하지 못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70. 두 번째 유혹에서 한방 먹은 유혹자는 세 번째 마지막 유혹을 준비합니다. 이렇게 해도 쉽지 않고 저렇게 해도 쉽지 않으니 한번 해 보자는 태도가 앞섰을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저는 다 읽지 못했지만) 자기 영혼을 악마에게 판 이가 ‘파우스트’인가요?  그 다음 이야기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이야기 중 한가지이니 그런 가상적인 것도 만들긴 했겠지만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세 번째의 유혹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갖고 싶어하는 권력에 대한 유혹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까짓 꺼 눈 딱 감고 한번만 절하면 되지. 그러면 온 세상의 것이 모두 다 내 것인데.....   보통이라면, 이렇게 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있고, 그래서는 안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혹자에게 마지막으로 호통을 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말이 있다는 소리로 말입니다.  (이상 유혹에 대한 것은 마태오 복음서를 중심으로 한 것임)

그러자 유혹자는 다음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루가 4,13)고 기록합니다. 한번은 실패했지만, 나중에 다시 한판 붙으면 패배하지는 않겠다는 다짐이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사명: 루가 4,16이하>

71. 이 과정을 겪고 난 다음, 예수 마음이 어땠을까?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겠다고 파견되어 인간 세상에 왔는데, 시초부터 이러한 일을 겪었으니 그의 앞길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세상에서 통하는 논리라는 것이겠구나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었습니다. 

유혹의 과정을 겪고 난 다음, 예수는 전도를 시작합니다.  그 전도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합니다.(루가 4,14-15). 훗날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갈릴래아는 이방인의 지역이었습니다. 이방인의 지역이란, 온전하게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곳이라고 알아들으시면 될 것입니다.  삶의 기준을 하느님보다는 인간적인 것들에 두고, 보다 현실적인 기준에 따라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부터 선포의 시간을 잡으셨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도 애초 복음의 선포를 기준으로 보면, 이방인의 지역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삶의 폭이 더 커질 것입니다.


72.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치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6-18)   이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당신 사명에 대한 요약문 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의 한가지입니다.  나는 이러한 정신으로 앞으로 행동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73. 이런 예수님은 무슨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셨는가?  그 주제를 말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주제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그의 선포 제 1성(第一聲)이 바로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였습니다.  이 세상에 이러한 모습을 세우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무엇을 알아들어야 하는가?  그 가르침들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음을 확신케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러 가지를 질문하고 여러 가지를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것들이 바로 예수의 설교의 내용이고, 기적이며 행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당신의 뜻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예수의 설교, 기적, 행적 그리고 교회: 98-99면>

74.   1998년 5월 7일 신구약 합본 작은 성서를 나누어주고, 장과 절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한 다음 몇 구절을 찾아서 함께 읽는 연습을 하다.  그리고 아래의 교리 내용을 계속 진행함.


75. 이 세상에 오신 예수가 이 땅에 선포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말을 하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성서가 언제 쓰여졌는지 연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성이 별로 없습니다만,)  신약성서에 나오는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고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선포합니다. 바꿔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관심사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음을 알리고 그 나라를 우리가 맞아들이기 위해서 뭔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회개(悔改)’라고 선언하십니다.  아직 설명하긴 이릅니다만, 예수님의 선포 사명은 우선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첨부하면, 여러분이 이 자리에 와서 말씀을 듣는 곳은 교회의 한가지입니다. 자세히 분류하면 가톨릭의 신앙을 따르는 구의동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의 사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왜 생겼는가를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구조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인간들만의 구조는 아니고, 이 교회 역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행동을 하고 있기에 하느님은 이 교회를 통해서 인간들에게 당신의 뜻을 알린다고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루가 복음서 4,16-19에 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해야 할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함께 읽어보시죠.   **루가복음 4,16-19까지 읽는다 **  예수님 사명의 강조점은 복음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복음서라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다가 수난, 죽음, 부활, 승천하신 뒤 빠르면 약 40년 후, 늦으면 70년 정도 늦게 글로 쓰여졌기에 시대가 흐르면서 당시 사회에 필요했던 하느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입을 빌어서 여기에 써넣은 것은 아니겠는가? 라는 게 성서 연구학자들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결론은 아무도 모릅니다. 


76. 복음서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 강조점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성서를 ‘학문(學問)’으로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정해진 결론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 듣는 내용이 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이야기하면 복음서 네 권은 각각 들려주고 싶은 대상이 달랐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랬기에 사용하는 언어라든가 말을 사용하는 습관이라든가 구성방식이 달랐다고 합니다.


77. 루가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 사명의 관심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는 것, 묶이고 눈먼 사람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것.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신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사상을 본받아서 요즘 교회에서는 2000년을 앞두고 은총의 해, 희년(禧年)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운동이 결실을 맺으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람이 변화되는 일이 앞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명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나라 선포와 그 나라가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거나 노력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78. 가장 간단하게 쓰여진 복음서이면서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서라고 이야기하는 마르코 복음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 가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의 첫 선포를 ‘하느님 나라’에 대한 것으로 하신 다음에 제자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악령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나병환자, 중풍병자 등을 고칩니다. 또한 중간 중간에 모여든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당신의 말씀도 하십니다. 안식일(=토요일)에 대한 이야기, 하느님을 따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마르 3,20-30), 하느님의 말씀이 참으로 뿌리를 내리려면 어떤 자세로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마르 4,1-34)를 이야기하십니다. 이런 내용뿐만 아니라 다른 말씀과 기적들도 하십니다.

모르긴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나지 않을까 물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응답은 들려오지 않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기적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만, 요즘 사람들은 그 일을 통해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머리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말하고자 하는 의미도 잃어버렸고 더 기적이라고 감탄할 만한 일도 보도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79. 뒤 이어서 드러나거나 실현되는 기적과 가르침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풍랑에 대한 기적을 통해서 제자들이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 예수의 옷에 손을 댔다가 깨끗해진 여인의 치유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의 힘을 보여줍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마르 5,34)는 말씀도 하십니다.  이런 기적들은 한결같이 자연의 순리를 완전히 바꾸어 놓거나 뒤집는 것들은 아닙니다. 만일 이러한 뜻으로 우리가 기적이라는 낱말의 뜻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우리 의학계에서 쓰는 말로 ‘참 기적같이 나았다’고 하는 말을 우리는 듣습니다.  의사들조차도 정상적인 과정이라면 변화가 올 수 없는 일에 변화가 왔고 그것이 건강을 회복하는 차원이었을 때에 우리는 그런 말을 씁니다. 그러나 그 말을 천천히 생각하면, 의사들조차도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렇게 변화되었는지 모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것이 기적의 말뜻이 되고 마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서에 나오는 기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그러한 방법으로 알아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80. 예수님이 행했던 기적들에는 한결같은 목적과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 의도는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거나 하느님의 뜻을 인간이 수용하게 하거나 할 때에 그 목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의도도 없는데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아니 나는 오히려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것이 성서에 나오는 대로 일어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예수님의 행적에도 같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도 즉, 가르침과 그의 움직임도 한결같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그런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에서 돌아서고 잘못된 마음이 있었다면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예수님의 이러한 의도를 세상의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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