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71-100

2006. 11. 10. 오전 7:55:08

글자

<예수의 사명: 루가 4,16이하>

71. 이 과정을 겪고 난 다음, 예수 마음이 어땠을까?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겠다고 파견되어 인간 세상에 왔는데, 시초부터 이러한 일을 겪었으니 그의 앞길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세상에서 통하는 논리라는 것이겠구나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었습니다. 

유혹의 과정을 겪고 난 다음, 예수는 전도를 시작합니다.  그 전도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합니다.(루가 4,14-15). 훗날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갈릴래아는 이방인의 지역이었습니다. 이방인의 지역이란, 온전하게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곳이라고 알아들으시면 될 것입니다.  삶의 기준을 하느님보다는 인간적인 것들에 두고, 보다 현실적인 기준에 따라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부터 선포의 시간을 잡으셨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도 애초 복음의 선포를 기준으로 보면, 이방인의 지역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삶의 폭이 더 커질 것입니다.


72.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치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6-18)   이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당신 사명에 대한 요약문 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의 한가지입니다.  나는 이러한 정신으로 앞으로 행동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73. 이런 예수님은 무슨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셨는가?  그 주제를 말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주제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그의 선포 제 1성(第一聲)이 바로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였습니다.  이 세상에 이러한 모습을 세우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무엇을 알아들어야 하는가?  그 가르침들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음을 확신케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러 가지를 질문하고 여러 가지를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것들이 바로 예수의 설교의 내용이고, 기적이며 행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당신의 뜻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예수의 설교, 기적, 행적 그리고 교회: 98-99면>

74.   1998년 5월 7일 신구약 합본 작은 성서를 나누어주고, 장과 절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한 다음 몇 구절을 찾아서 함께 읽는 연습을 하다.  그리고 아래의 교리 내용을 계속 진행함.


75. 이 세상에 오신 예수가 이 땅에 선포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말을 하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성서가 언제 쓰여졌는지 연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성이 별로 없습니다만,)  신약성서에 나오는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고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선포합니다. 바꿔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관심사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음을 알리고 그 나라를 우리가 맞아들이기 위해서 뭔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회개(悔改)’라고 선언하십니다.  아직 설명하긴 이릅니다만, 예수님의 선포 사명은 우선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첨부하면, 여러분이 이 자리에 와서 말씀을 듣는 곳은 교회의 한가지입니다. 자세히 분류하면 가톨릭의 신앙을 따르는 구의동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의 사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왜 생겼는가를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구조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인간들만의 구조는 아니고, 이 교회 역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행동을 하고 있기에 하느님은 이 교회를 통해서 인간들에게 당신의 뜻을 알린다고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루가 복음서 4,16-19에 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해야 할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함께 읽어보시죠.   **루가복음 4,16-19까지 읽는다 **  예수님 사명의 강조점은 복음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복음서라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다가 수난, 죽음, 부활, 승천하신 뒤 빠르면 약 40년 후, 늦으면 70년 정도 늦게 글로 쓰여졌기에 시대가 흐르면서 당시 사회에 필요했던 하느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입을 빌어서 여기에 써넣은 것은 아니겠는가? 라는 게 성서 연구학자들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결론은 아무도 모릅니다. 


76. 복음서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 강조점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성서를 ‘학문(學問)’으로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정해진 결론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 듣는 내용이 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이야기하면 복음서 네 권은 각각 들려주고 싶은 대상이 달랐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랬기에 사용하는 언어라든가 말을 사용하는 습관이라든가 구성방식이 달랐다고 합니다.


77. 루가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 사명의 관심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는 것, 묶이고 눈먼 사람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것.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신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사상을 본받아서 요즘 교회에서는 2000년을 앞두고 은총의 해, 희년(禧年)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운동이 결실을 맺으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람이 변화되는 일이 앞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명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나라 선포와 그 나라가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거나 노력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78. 가장 간단하게 쓰여진 복음서이면서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서라고 이야기하는 마르코 복음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 가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의 첫 선포를 ‘하느님 나라’에 대한 것으로 하신 다음에 제자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악령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나병환자, 중풍병자 등을 고칩니다. 또한 중간 중간에 모여든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당신의 말씀도 하십니다. 안식일(=토요일)에 대한 이야기, 하느님을 따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마르 3,20-30), 하느님의 말씀이 참으로 뿌리를 내리려면 어떤 자세로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마르 4,1-34)를 이야기하십니다. 이런 내용뿐만 아니라 다른 말씀과 기적들도 하십니다.

모르긴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나지 않을까 물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응답은 들려오지 않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기적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만, 요즘 사람들은 그 일을 통해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머리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말하고자 하는 의미도 잃어버렸고 더 기적이라고 감탄할 만한 일도 보도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79. 뒤 이어서 드러나거나 실현되는 기적과 가르침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풍랑에 대한 기적을 통해서 제자들이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 예수의 옷에 손을 댔다가 깨끗해진 여인의 치유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의 힘을 보여줍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마르 5,34)는 말씀도 하십니다.  이런 기적들은 한결같이 자연의 순리를 완전히 바꾸어 놓거나 뒤집는 것들은 아닙니다. 만일 이러한 뜻으로 우리가 기적이라는 낱말의 뜻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우리 의학계에서 쓰는 말로 ‘참 기적같이 나았다’고 하는 말을 우리는 듣습니다.  의사들조차도 정상적인 과정이라면 변화가 올 수 없는 일에 변화가 왔고 그것이 건강을 회복하는 차원이었을 때에 우리는 그런 말을 씁니다. 그러나 그 말을 천천히 생각하면, 의사들조차도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렇게 변화되었는지 모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것이 기적의 말뜻이 되고 마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서에 나오는 기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그러한 방법으로 알아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80. 예수님이 행했던 기적들에는 한결같은 목적과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 의도는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거나 하느님의 뜻을 인간이 수용하게 하거나 할 때에 그 목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의도도 없는데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아니 나는 오히려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것이 성서에 나오는 대로 일어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예수님의 행적에도 같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도 즉, 가르침과 그의 움직임도 한결같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그런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에서 돌아서고 잘못된 마음이 있었다면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예수님의 이러한 의도를 세상의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81. 간단하게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것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길게 이야기하는 것도 한계는 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한 사람에 대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도 어렵지만, 신앙의 근거에 따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살고 움직이신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의 말로 끝낸다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분에 관한 기록을 우리가 세세하게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서에 기록된 것, 그리고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전승에 관한 것이 전부입니다.  사정이 이렇게 어렵긴 해도 간단하게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순서는 마르코 복음서의 순서를 따라가며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몇 가지의 가르침과 기적 외에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활동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과 활동을 바라볼 때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의 행동과 가르침은 그저 생각나는 대로 즉흥적으로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서 첫머리(1,14-15)에서 예수님이 선포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관심사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와 그 가르침을 선포하고 사람들이 그 정신을 받아들여 살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느님과 당시 사회지도층들이 알아듣고 백성들을 상대로 해서 가르치고 있었던 하느님 대한 내용사이에는 묘한 긴장관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일반 사람들과 함께 하는 하느님을 이야기했던 데 비해서, 사회지도층의 인사들은 정치권력과 적절히 타협하면서 그들이 전공하고 다루었던 법에 의한 하느님의 활동만을 생각하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행동에 관한 것이 누락된 이론에 의한 하느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하느님을 이야기해도 서로 방향이 달랐고, 그래서 충돌은 계속됩니다.


82. 시기심에 가득 찬 마음으로 예수님의 행위를 본 당시 사회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위를 가리켜 ‘사탄의 행위’라고 규정합니다.  마르코복음서 3,20-30에 나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세상에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 싸우면 제대로 설 수 없다(3,24)”는 말씀을 통해서 잘못된 시각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 말로 그들이 변혁되었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곧 세워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렇지 않았습니다.

4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확장’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사회 지도층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작은 씨앗이 훗날에는 어떤 결과를 맺는지,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제대로 된 길을 말씀하시며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십니다.  실제로, 약 2000년이 지난 지금에는 그리스챤 신자가 꽤 많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가 죽었겠지만, 가톨릭 신자만 해도 약 10억 가량, 개신교신자도 그와 비슷한 숫자만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면 당연하겠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에 대해서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따르기보다는 사람은 재산에 묶여 사는 경향이 강합니다.   5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놓아기르던 2천 마리의 돼지 떼가 졸지에 죽어버린 다음에 당연히 예수를 향하여 자기의 고장에서 떠나 줄 것을 요청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넓히고 악의 세력을 축소시킨다는 작업의 내용은 좋은 일이었지만,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중요성과 사람들이 알아듣고자 하는 중요성과는 평행선을 달립니다.  그런 일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시선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비운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긴 하지만(5,33참조-하혈하던 여인), 단순히 기적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완전히 마음을 닫고 살던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게는  기적은커녕 자신을 변호하는 말씀도 하지 않으려 하십니다. (6,1-6).  마음이 열려 있어야만 한가지 일을 해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라는 소리가 된다는 뜻일 겁니다.

공생활 시작에 당신에게 세례를 베풀었던(1,9-11) 세례자 요한의 죽음(6,14-29)이 있은 뒤, 예수님은 몸을 피하면서도 당신을 찾아온 5천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빵을 배불리 먹게 하는 기적을 행합니다.  이 결과로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고 했다고 적기도 합니다(6,15). 자신들의 육체적 필요를 해결해주는 인간으로서 특별한 기적을 할 줄 아는 왕으로 말입니다.  물론 예수는 정중히 거부하고 산으로 피신합니다.  사람은 먹는 것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는 악마에게 받았던 첫 번째 유혹에 대한 응답을 여기서 한번 더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교회에서는 이 기적의 의미를 살려 최후만찬 이야기(14,12-26)와 함께 그리스도교 성사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중추(中樞)를 이루는 ‘성체(聖體)성사(聖事)’로 설명합니다.

결국 유다인이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고 따르던 하느님을 알려주었건만 받아들이지 않은 유다인들을 뒤로하고,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으로 활동의 장소를 옮깁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을 고치고(7,24이하), 데카폴리스에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치기도(7,31이하) 합니다.  그리고는 거기에서부터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며{예루살렘 고지 870미터정도} 하느님의 나라를 외곽에서부터 점차로 형성시킵니다.


이 밖에도 예수님이 하신 일의 요약은 더 많은 설명으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우선은 재미 삼아서 성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작은 재미있게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머리 속에 많이 담기거든 그렇게 읽으신 내용들의 의미도 한번씩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83.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부활후의 영광이 어떠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의 모습(9,2-8),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기적(악령 들린 아이에게서 악령을 쫓아냄)과 가르침(참으로 높아지려면....), 혼인에 대한 교회 입장의 원천이 된 이야기, 그리고 결국에는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호산나<HOSANNA, 히브리말, 구원하소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11,10), 그런 다음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소였던 성전에서 일어난 부패상에 대해 엄한 호통(11,15-19)을 칩니다.  그 행위는 훗날 예수의 육체적인 죽음에 한몫을 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12,1-12)를 통하여, 하느님의 선택만 믿는다고 달라질 역사는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에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결국 이러한 권위에 대한 도전은 죽음으로  결말을 유도하고 맙니다.  때를 느끼신 예수님은 최후만찬(14,12-26)으로 당신의 끝을 준비하고, 예루살렘 성의 동쪽 편 게쎄마니에서 밤중에 기도하다가 제자의 배반으로 잡히게 됩니다.

이런 예수의 죽음은 결국 신성(神性)모독(冒瀆)이라는 죄명으로 결론을 맺게 됩니다. 마르코 복음 14,61-64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신성모독은 즉결심판형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에 의해서 훗날 붙여진 죄목의 형태는 INRI<예수, 나자렛, 왕, 유다인>입니다.  일개백성으로서 로마에 대항한 사람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자기민족의 왕이라고 사칭했다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84. 위 이야기 가운데 좀 더 강조할 것은 십자가와 수난, 그리고 죽음, 부활과 승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잠시 그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예수님의 이러한 행적과 교회에 대한 관계를 반복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이 교회는 훗날 그분의 말씀을 따랐던 제자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세워진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서 벗어날 때에 교회는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것이고 비판을 받고 개혁되어야 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눈에 쉽게 보이는, 벗어나는 방법은 교회의 움직임이 인간의 욕심으로 가득 찰 때를 말할 수 있습니다.


85. 다시 십자가와 수난,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 슬픔의 크기는 죽는 사람보다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에게 더 크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왜 일까요?  죽는 사람은 자신의 할 일을 다하고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비해서 살아있는 사람은 그 사람을 통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가 사라져버리면 그가 자리했던 크기에 따라 공간이 클수록 빈 공간의 허전함이 더 크게 느껴지기에 그럴 것입니다.


86. 이 예수의 수난의 과정을 거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원인에 대하여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될까 묻고 대답하는 것이 ‘죽음의 원인’에 대한 신앙적인 접근 방법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보면서 왜 예수가 죽어야만 했을까? 죽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할 수 없었을까?  하느님이시라면서 그 전능(全能)의 힘으로 확 변화시켰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 하며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곤혹스러워 합니다. 


87. 인간적인 입장에서, 당시 사회의 입장에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원인과 그 과정을 성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찾아보죠.

먼저, 예수는 신성(神性) 모독(冒瀆) 죄(罪)를 지은 사람으로 판단됩니다.  마르코 복음서 2,7에 “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하며 비판하는 율법학자들이 나옵니다.  이 율법학자들은 성서를 연구하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성서에 근거하여 알려주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는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알아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죄는 당연히 사형을 당해야 할 죄였습니다.

안식일에 남의 손을 고쳐주고 나서 받는 대접도 나옵니다.  마르코 3,6에 보면,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서 예수를 없애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고 합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의 삶의 지주였습니다.  우리로 비유하면 헌법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 율법을 어긴 사람은 더 이상 유대인의 소리를 들을 자격이 없었고, 그런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3장의 부분은 예수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입니다.  처음부터 험난한 길을 가는 예수가 한편으로는 불쌍해(?)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는 미친 사람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마르코 3,22이하에 보면 사람들(=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의 시각이 나옵니다. 그리고 가족들조차도 그가 미쳤다는 소리 때문에 그를 찾으러 나서기도 합니다.

예수가 하는 일은 온통 스캔들 투성이 입니다. 재산에 대하여 엄청난 손해를 끼친 그를 향하여 ‘우리 동네에서 떠나 달라고 간청(마르 5,17)’하기도 합니다.  물론 재산을 중요시하던 입장에서 보면, 이와 같은 사람들의 자세는 십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88. 예수님의 죽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33년간을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살았던 기간을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생애 기간을 33년이라고 말하는데는 요한복음에 따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일어나던 1년 주기 행사가 예수의 생애기간 동안 3번이 나오기에 그렇게 33년이라 이야기합니다만, 자세한 것은 역시 알 수 없습니다. 


89. 이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애석하게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서에 적혀진 것  뿐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생애동안 3번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일명 ‘수난예고’라고 알려져 있는 부분들입니다.  마르코 복음서를 기준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린다고 했으니, 함께 찾아보죠.  첫 번째는 성서의 79-80면, 8장 31-38에 나오고, 두 번째의 것은 82면 9장 30-32에 나옵니다.  세 번째는 85면 10장 32-34에 나옵니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는 수난예고로 알려져 있는 부분은 사실상 부활예고라고 말하는 게 더 올바른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죽음의 종교가 아니고 수난만을 이야기하는 종교가 아니라, 부활을 바라고 부활의 정신을 우리가 현재에 적용시켜 사는 방법을 찾아보고 그것을 적용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에 걸친 예고에서도 마지막에는 항상 ‘부활’에 대한 예고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이 항상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성서에서는 그 마지막에 강조점이 실려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90. 이렇게 예수님이 표현하시는 수난과 부활 예고를 기준으로 말씀드린다면, 예수는 죽음을 억지로 당한 것이 아니라, 애초의 하느님 계획대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계획대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올바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드리는 이것은 신앙의 차원에서 정리하는 표현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들어간 차원에서는 그 대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91. 제자들마저도 예수를 유령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가 살았던 삶의 모습이었고, 제자들이 바라본 스승의 모습입니다.  마르코 복음서 6,49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갈릴리 호수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다가간 기적을 보인 다음에 제자들에게서 예수가 받은 평가입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제자들마저도 스승의 참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결국에는 제자에게 배반당하여 죽음의 길을 갑니다.(마르코 14,10-11; 14,44-46)

또한 당신의 수제자(首弟子)로 임명한 제자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씩이나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인합니다.(마르코 14,66-72)  이렇게 생각한다면, 인간적으로 볼 때 예수는 철저하게 실패한 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영양가 없는 삶의 결실을 맺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 달린 사람마저도 조롱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보시오!”(루가 23,39--165면)라고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몇 개의 항목에 걸쳐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92. 다음으로는 사회지도층의 인사들은 예수를 왜 죽음의 길로 몰았는지를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초대받은 당신 교재 21과에 보면, 그 몇 가지가 나옵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발, 유다인이 가졌던 신관(神觀)의 차이,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메시아관(觀) 차이 때문으로 그 원인을 찾기도 있을 것입니다. (함께 읽어보고 연구하기)


93. 102면에 나오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신앙의 내용이 우선합니다.  예수를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보기에, 그를 통하여 하느님이 일으키신 일들을 생각해보고 정리한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그렇게 잘 알고 예견하고 있었던 예수의 죽음 의미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신앙도 형성되는 것입니다.

성서에 나타나는 바를 우리가 아무리 자세히 뜯어봐도, 지금 우리가 갖고 살아가는 신앙을 모두 해석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종교의 믿음의 근간은 성서(聖書)와 성전(聖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서는 말 그대로 글로 쓰여진 ‘성서’에 대한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전통에 해당하는 것, 뛰어난 삶을 살았던 성현(聖賢)들이 정리한 것들을 가리켜서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94.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

예수님이 정확하고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은 당신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는가?  그의 죽음에 대하여 하느님은 어떤 판단을 내리셨을까?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아무 것도 표현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하느님이 받아들이셨을 모습은 우리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입니다. 다시 살아남이죠.  인간의 손에 의해서 비참한 모습으로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하느님이 그의 죽음에 대하여 판정승을 내리셨다고 신앙에서 해석하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금요일 오후 3시경에 돌아가셨고, 무덤에 안장되었다가, 토요일 안식일이 끝나고 몇몇 여인들이 무덤을 방문했을 때 예수님의 시신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나타난 젊은이는 “겁내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자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에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여라”(16,6-7)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것은 신앙입니다.  눈으로 본 사람의 기록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육체의 눈으로 확인은 되지 않지만, 나 혼자 나 홀로 느낀 특별한 일 때문에 내 생활이 바뀌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을 따랐고 가까이 뵈었던 제자들의 경우가 그랬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삶의 변화를 이루게 되었고, 그들의 행동에는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로 훗날 기적도 하게됩니다.  이 기적은 그들이 흔히 가졌을 인간의 능력범위를 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얻게될 신앙인의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95. 여러분 앞에서 제가 이야기를 드립니다만, 제 이야기가 재미있고 여러분에게 피와 살이 되기 때문에 듣고 시간을 내시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 갖는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말씀을 저보다 더 잘하실 수 있고, 이 사회에 공헌하시는 일의 역량이 더 크신 분도 많겠지만 그분들도 지금 이 시간만큼은 제게 시간을 내주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신앙이 우리에게 힘이라고 봅니다. 


96.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의 결론을 맺기 위해서는 부활후의 삶과 승천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3일만에(정확한 시간은, 금요일 오후 3시 이후-토요일(=안식일)-토요일 밤 자정을 넘어선 직후의 날까지, 계산상 3일.  최대시간은9시간+24시간=33시간에서 안식일 다음날 해뜰 때까지 39시간이내) 부활하신 다음, 40일간 제자들과 더 생활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서에 이 기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이 기간은 복음서 다음에 나오는 사도행전 1,3에 나옵니다.  40일만에 예수님은 아예 당신의 모습을 이 지상에서 감추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50일째 되는 날)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내려옵니다.


<성령 언급>

97.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들 몸에 모두 있는 내장기관들로부터 시작해서, 정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족 사이의 사랑이라든가, 친구사이의 우정이라든가, 이웃을 서로 연결시키는 또 다른 사랑들도 모두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우리 생활가운데서 없어서는 안될 것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우정이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종교에서 쓰는 용어로 바꾸면 그것을 믿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이라고 간단히 표현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중요하고 다양한 의미를 갖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해도, 중요하다는 말을 쓸 때, 우리는 보이는 대상에 쓰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정이라는 것과 사랑이라는 것을 설명하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다들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말로, 내용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설명하는 것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면서 큰 역할을 하는 힘 가운데, 가톨릭 신앙에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늘부터 다루고자 하는 성령(聖靈)입니다. 


98. 세상 어느 종교든지 중요하게 강조하지 않는 내용이 없겠습니다만, 가톨릭 교회에서 이 성령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중요하다고 해서 상대적이거나 절대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하지는 말 것을 먼저 부탁드립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말로 표현하지 못할 내용이 더 많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한번에 다 설명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훗날 여러 번의 교리를 통해서 신앙인의 삶을 통해서 강조될 것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말하는 순서를 대충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이란 누구이며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성령은 사람보기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성령의 역할과 작용은 무엇인지, 짧게는 이야기할 수 있어도 교회에서 성령이 차지하는 역할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예수님의 생활 곳곳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제부터는 순서에 따라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령의 강림, 성령은 누구인가?>

99.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 드리는 첫 번째 과정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 성령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부분의 이야기는 신약에서 일어난 사건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 다음으로 커다란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인류의 구원을 이루는 출발점이 된 사건이었고, 부활은 하느님이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시어, 의인의 죽음으로 인정하시는 의미에서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판정승(判定勝)을 내리신 사건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기억하고 우리의 생활가운데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일을 우리가 이루겠다는 자세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이나, 신앙인들이 되고자 준비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라 할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중요성을 갖는 것이 성령의 강림이라는 사건이었습니다.  성령의 강림이 이루어지던 때를 기준으로 본다면, 예수의 탄생과 부활은 단 한번으로 끝난 과거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기억하는 성령의 강림에 대한 것은 유일한 단 한번의 행위로 치부(置簿)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홀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사람들을 매개체로 해서 하느님의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당신의 삶을 통해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삶의 본보기를 남기긴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한 번으로 끝난 일이고 우리는 새로운 그리스도가 돼야 할 본보기로 남는 것에 비교할 수 있지만, 성령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그러한 의무와 역할이 남아있고 새롭게 부여됩니다. 


100. 성령이 사도들에게 내려온 것은 오순절에 내려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은 지 50일째 되는 날, 그날이 오순절(五旬節)이었습니다.  이 오순절은 단순한 날짜의 셈에 의한 절기라고 하기보다는 ‘유대인의 절기로 따지면, 농작물이었던 밀을 수확하고 난 후, 하느님께 봉헌하는 축제일’ ‘첫 번째 추수일’이었습니다  창세기 처음에 나오는 것처럼, 처음 태어나는 것과 처음 수확하는 것은 하느님의 것(출애굽기 13,2 =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모태를 열고 나온 맏아들은 모두 나에게 바쳐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이며, 이 수확물 가운데서 곡식을 예물로 바치는 축제일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흥겨워 덩실덩실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그런 축제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축제일이 신약시대에 와서는 성령의 강림이라는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에게 복과 기쁨을 내려주시는 선물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전례력에는 부활 대축일부터 계산해서 여덟 번째 되는 주일(1998년의 경우, 5월 31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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