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이 성령이 내려오자 제자들의 삶의 태도가 바뀝니다. 스승 예수가 승천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부활하신 다음 40일만에 그들을 떠난 뒤, 10일 후 성령이 내려오시자 그들은 더 이상 예전의 그 자리에 숨어있지 않고, 현실의 삶에만 만족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그들 앞에 놓여진 현실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을 전파합니다. 복음을 선포합니다. 외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나서 사람들이 변화에 동참하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술 취한 사람들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사도행전 2,13),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놀래서 별 말을 하지 못하고 지냅니다. 성령을 받아 이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일 때문에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에게 다가온 선물(?)은 박해와 투옥 그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에 감정을 보였던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여기 사도행전 2장에서는 ‘불 혀’모양으로 내려오셨다고 전합니다. 혀란 말을 하고자 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로 등장하는 12명의 사도가 말로써 복음선포를 확실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이 성령이 사람들 앞에 보이는 방법은 성서에 몇 가지로 나옵니다. 마르코 복음 1,10에 보면, 예수님의 세례 때에 성령은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옵니다.
또한 창세기 1,1-2에 보면, 성령을 묘사하는 용어로 학자들이 일치된 견해를 보이는 내용이 나옵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하느님의 기운은 말씀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기운은 ‘바람, 영, 혼, 얼’이라는 낱말로도 번역이 될 수 있다고 적습니다.
103. 하느님의 기운인 이 성령은 어떤 일을 하셨는가? 하느님의 기운이라고 했으니 하느님의 일, 하느님이 이 세상에 하시고자 작정하신 일들을 하셨을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바로 등장하는 성령은 예수님을 광야로 곧바로 인도하죠.(마르코복음 1,12) 40일간의 외로운(?) 고행을 하도록 이끄시는 힘으로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는 힘으로 등장하는 모습이 바로 성령입니다.
마르코복음 3,20-30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악의 힘을 제어(制御)하고 그 악의 확산을 막는 힘으로도 등장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논쟁에서 나타납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질시 속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기적을 행하고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 악령의 기수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서 한다는 오해를 받게되자 성령의 역할을 확실히 알아듣고 선언합니다. 한가지 덧붙여 강조하는 내용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을 욕하지 말 것,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선언하십니다.
부활 승천 다음에 이어지는 성령의 강림 사건으로서 사도들은 복음전파의 기수가 되게끔 만듭니다.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복음전파에 뛰어듭니다. 대단한 열성이 함께 하던 모습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서 14장 이후에는 성령의 오셔서 하실 일들에 대하여 길게 설명합니다.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읽어보시도록 권한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성령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는 부분이 이곳이라고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그것은 성서 내용의 길이에 따른 기준이라고 하기보다는 성령이라는 특별한 주제로 그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말의 설명이라고 할 것입니다.
14,1-14의 내용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신다는 것을 주제로 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비해서, 14,15-26의 말씀은 다른 형태요, 다른 모습인 성령의 강림으로써 드러나게 될 하느님의 모습을 이야기함으로써 돌아오는 내용을 주제로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들으려면 어쩔 수 없이 구별해서 알아들어야만 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으로서 성부이신 분, 성자 예수그리스도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신 분, 이 자리에서 말씀 드리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하느님이신 성령으로 나누어서 알아들을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알아들으려면 구별되는 것 같지만, 같은 하느님이시기에 예수님은 자신은 떠나가고 성령은 오시는 일을 말함에 있어서 마치 당신이 그 모습 그대로 오시는 것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알아듣는 세 분의 역할을 신앙을 설명하는 신학에서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것을 잠시 후에 말씀드리기는 하겠습니다만, 설명은 어렵습니다.
새로운 형태로 우리에게 오시는 이 ‘협조자<Counsellor> 성령’이 오셔서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성령은 제자들과 함께 머물 것이고, 제자들을 사랑하실 분입니다. 그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가르쳐 알게 해 주실 분(요한 14,26)이십니다. 또한 성령은 믿음을 강하게 해 주실 것(14,29)이라고 하십니다.
105. 사도행전 1,8에는 성령의 역할 한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받게 될 사람들이 ‘예루살렘, 온 유다, 사마리아, 땅 끝에 이르기까지 증인이 되게 하는 역할’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4,31에 나타나는 것처럼,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대담하게 전하게 됩니다.
106. 이 성령은 올바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 자신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사도행전 8,9 이하에 보면, 성령을 이용하여 한 몫을 보려는 ‘시몬’이라는 이름의 마술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행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고 나서 돈을 내고(8,18이하) 성령을 주는 힘을 사려고 합니다. 잘못된 행위라고 우리는 판단합니다. 훗날 신앙인이 되면 여러분들도 똑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돈으로 환산하려는 일이 그것입니다. 내가 하느님께 제물을 많이 바치면 인간의 욕심에 해당하는 선물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겠거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무상으로 내려옵니다. 선물이라는 것은 본래가 내가 무엇을 받겠거니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기분 좋은 것입니다. 그렇게 다가온 선물은 제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좋은 결과를 냅니다. 특히 하느님의 성령은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신앙입니다.
107. 구체적으로 성령이 주시는 선물에 대한 이야기는 고린토 전서 12,8-11(신약성서 328면)과 갈라디아서간 5,22이하(365면)에 나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책, 성령의 활동을 구별하는 능력,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溫柔), 절제>등으로 나타나는 선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훗날 다루게 될 견진 성사에서는 이 성령을 통하여 <슬기, 통달, 의견, 굳셈, 지식, 효경, 두려워함>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내리는 성령의 은사들은 누구 개인의 영광이나 영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그 공동체의 선익(善益)을 위해서 오는 것(1고린토 12,7 = 성서 328면)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즘 볼 수 있는 ‘성령의 은사 체험운동, 부흥회, 성령세미나’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런 운동들이 어느 한 사람의 명성을 날리게 하거나, 단순한 기적만을 찾게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일이므로 반드시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08. 이렇게 성령이 내려오신 힘을 받은 사도들은 이제 더 이상 의기소침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아 그들은 자신들의 머물고 있던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하지만 이렇게 달려나가는 사도들, 즉 성령을 받은 사람들을 향하여 다가오는 인간의 평가는 실망을 던져 주이게 충분한 것입니다. 그 중에 첫 머리에 등장하는 것이 ‘저 사람들 대낮부터 술에 취했군’(사도행전 2,13)하며 빈정대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란 참으로 묘한 동물 아닌 동물이 돼 놔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파괴해야 직성이 풀리고 험담을 해야만 그 본성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 것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109.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든 간에, 성령의 힘으로 교회는 유지되고 발전합니다.
술에 취한(?) 베드로의 설교로 인하여 첫 날에 3천명 가까운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됩니다(사도행전 2,41).
예수를 죽인 일에 대하여 마음 켕기고 있었던 의회의 사람들은 부활한 예수를 선포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놓고 으르고 협박을 하며 자기들의 규정을 들어 ‘선교행위를 금지’(사도행전 4,7; 4,18)하지만, 그렇게 박해받는 일을 하느님을 전하기에 받는 특권으로 알아듣는 사도들(사도행전 5,41)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을 보면서, 율법교사 한 사람이 편리한 제안을 합니다. 가므리엘의 말(사도행전 5,35-39 = 230면)을 읽어보시면 아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서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훗날 닥칠지도 모를 재앙을 두려워하여 피하자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되시려고 이 예비자 교리를 듣는 여러분들에게 그런 일은 없으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 뿐만이 아니라, 훗날 신앙인의 통과 의례인 세례(洗禮)예절을 마친 다음에도 말입니다. 그것은 신앙인의 정신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110. 미사 때에도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는 기도를 합니다. 신자들의 헌금봉헌이 있고 신자들이 일어서고 감사송이라는 부분을 한 다음, 복사들이 종을 치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나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감사기도 2양식)
제물에 대한 기도의 첫 머리에서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하며 기도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후 기도에서는)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성령의 힘을 통한 일치(一致)하게 하는 힘을 강조합니다.
이상으로서 성령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삼위일체에 관하여>
111. 이제부터는 28과에 나오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인간의 세계에는 사람의 지식과 과학의 수준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그것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설명이 안되긴 하지만 그래도 그 대상은 굳건하게 존재합니다. 이제부터 짧게나마 말씀드릴 삼위일체에 대한 것도 그 범위에 속합니다. 설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준에서 먼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본보기를 들어볼까요?>
112.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경우를 먼저 본보기로 들지요. 혼인을 하고 남자와 여자가 첫 날밤을 잘 지내고 나면--물론 때를 잘 만나야 하겠지만-- 자녀가 생깁니다. 그저 생기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과학에서는 설명을 합니다. 난자와 정자가 합쳐진 다음 세포분열이 생기고 사람으로 발전하는 거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왜 난자와 정자는 자석과 쇠의 관계처럼 서로 끌어당기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합쳐진 다음에는 왜 분열을 하고 우리 몸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기관으로 발전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물론 DNA, RNA 어쩌구 하면서 그것들이 가진 특성이라고 설명을 할 수 있기는 해도, 그렇게 설명한다고 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문들이나 궁금증이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면 나무들에 물이 오르고 꽃을 먼저 피우는 녀석들도 있고 잎사귀를 먼저 내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일관성이 없죠.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인간이 보기에 그런 것뿐이고 자체로는 충분히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물질 내에서 이루어지는 삼투압현상이다 뭐다라고 우리가 설명은 해도, 그 역시 그런 설명만으로 우리가 갖는 의문이나 궁금증들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하루를 움직이고 밤이 되면 잠을 잡니다. 온통 사람들이 다 똑같은 시간을 잠으로 소비하는 것은 아니지만 잠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우리가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 역시 세포가 쉬기 위한 수단이고 뇌에서 그렇게 명령하니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해도 그것으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궁금증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못사는 것은 아닙니다. 궁금하긴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어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은 없습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한 것을 이렇게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신비스럽게 남겨놓아야 할 것은 그래도 있을 거라고 봅니다.
113.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몇 마디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을 이야기할 때도 말씀을 드리기는 했겠습니다만, 우리가 따로 따로 알아듣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사실은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고 한 분이시다’라는 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더 어렵게 설명하면, 성부라는 위격(位格)과 성자라는 위격, 그리고 성령이라는 위격이 따로 따로 활동하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분들은 셋이 아닌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의 이 부분에 이르면, 설명이 본래의 주제보다 더 알아듣기 힘들어집니다.
인간과 자연 세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들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이 삼위일체 부분은 계시(啓示)라 해서 하느님의 고유영역이라고 규정합니다.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은 그 하느님의 속성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므로 하느님이 알려주시는 한계 안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28과의 내용을 읽어봐도 애매모호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114. 아우구스티노 성인이라는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모니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이 아들이 당시에는 매우 똑똑한 인물이었습니다. 법학, 철학, 수사학, 논리학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이름을 날린 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바램과는 달리 아들은 방탕의 길에 첨단을 달리던 분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32살 경에 이르러 회심(悔心)의 길을 갑니다. 그렇게 바뀐 생활을 지낸 다음 그는 주교가 됩니다. 그렇게 뛰어난 지혜와 학식으로 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그분의 삶의 체험가운데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회심의 길을 간 다음,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아듣기 위해서 바닷가를 거닐며 고민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신비라는 판단을 했으면서도 그는 알아듣기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바닷가 물이 치는 곳에 소년이 앉아서 모래구멍을 파놓고 조개 껍데기로 물을 퍼 넣고 있었습니다. 얘야,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냐? 아저씨는 지금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아들으려고 그렇게 고민하고 계시는데, 제가 이 조개 껍데기로 이 구멍에 바닷물을 다 퍼 옮겨 담을 수는 있어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아듣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신비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를 다시 물어보려고 소년을 쳐다본 순간 그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고, 그 이후로 아우구스티노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탐구하기를 중지했다는 고백 아닌 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개인이 체험한 일화이기는 합니다만, 사람의 세계에는 그 머리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115. 올해<1998년>의 경우에는 다음 주일 (6월 7일)이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이날 우리는 독서와 복음의 내용을 통해서 몇 마디 말씀을 듣습니다.
첫 번째 독서 잠언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지혜<=구약성서에서 사용하는 성령의 칭호, 초대받은 당신 131면>가 고백하는 하느님 찬미를 듣습니다. 세상 시초에 만들어진 그 힘은 하느님의 창조 때도 함께 있었다는 신앙고백의 한가지입니다. 단순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활동의 조수역할을 수행했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독서,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서는 하느님 성령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기쁨의 원천은 성령이 우리에게 작용해서 생기는 결과라고 알려줍니다.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하고 이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끈기를 낳고 끈기는 희망을 낳는데, 이런 과정의 원천은 성령이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신 결과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을 통해서는 예수님과 살면서 들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재확인시켜 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언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령의 역할은 모든 것을 완성시켜 준다는 교회의 정신을 그대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돌아오는 주일에 듣게 될 삼위일체의 역할에 대한 것입니다.
<성총(聖寵)을 얻는 방법(方法) 편>
116. 지난 시간까지는 교회의 구성요체를 이루는 믿어야 할 교리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반복이 되긴 합니다만, 제목이라도 다시 말씀드리면, 지난 시간까지 말씀드린 예비자 교리의 내용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서 말씀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배경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도 다루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적고 동시에 자신들 삶을 돌이켜 본 반성의 기록 성서를 여러분들이 가깝게 대하는 방법도 배웠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사용도 했습니다.
믿을 교리에 대한 내용을 다 말씀드린 다음에, 노파심에서 말씀을 드릴 한가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교리를 통해서 강조하는 교리의 내용을 다 기억하고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삶의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앞서 한 행동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우고 익히는 것은 삶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삶으로 드러내는 일에 대해서 다룰 것이 오늘 이후의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커다란 제목으로는 <성총을 얻는 방법>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 교회 >
117. 사람은 홀로 살지 못합니다. 태어나는 것은 혼자이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생하고 앓는 것도 혼자이며, 결국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혼자이긴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합니다. 이것은 몸의 움직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로 살아가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공동체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동체는 ‘가정’일 것이고, 자라면서 겪는 과정의 하나로 ‘학교’도 있을 것입니다. 회사라는 단체도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국가도 아마 공동체의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구성은 개인 선택의 여지(餘地)없이 형성되는 경우도 있고, 개인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시작한 공동체에 대하여 내가 마음 닿는 대로 들어갈 수 도 탈퇴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신앙이라는 공동체는 한번 들어가겠다고 다짐하면, 생각처럼 쉽게 나오거나 깰 수 있거나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없는 특성을 지닙니다. 이것은 사람이 가질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이익의 차원이 아니기에 더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교회공동체에 들어오겠다고 다짐을 하고 지금 이 시간을 내는 것이니, 여러분의 자세가 일반 공동체와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들어오기도 어려운 공동체가 신앙의 공동체이지만 탈퇴하기도 어렵다는 특성을 지닌 것이 이 공동체의 특성가운데 한가지입니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한 단계 위인 하느님의 힘, 영(靈)의 힘으로 가능한 공동체이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교회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야기할 순서는 교회란 무엇인지, 그 교회라는 공동체의 특성은 무엇인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공동체 역사의 삶의 과정 즉 역사는 어떠했는지를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교회의 어머니요 모범으로서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묵주의 기도>도 알려드리겠습니다.
< 교회란 무엇인가 ? >
118. 교회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라는 말은 애초에 한국말이 아니고, 이 말은 희랍어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말의 번역어입니다. 희랍어 <에클레시아>라는 말의 의미는, “집회, 모임, 교회”라는 뜻을 갖는 말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하느님께서 친히 모으신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1고린토 1,2<=311면>에서 이 말을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이룬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들<백성>’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며,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골로사이 1,24;1,18)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교회는 언제 형성되었는가?
이런 의미를 갖는 교회의 시작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서부터 유래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에집트에서 탈출한 백성들,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그렇게나 당신의 뜻으로 이끌어들이려고 노력했고, 그 뜻을 따랐던 사람들, 모세와 여호수아의 인도를 통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했던 사람들이 그 원형(原形)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원형을 이루었던 사람들 모두가 같은 길을 걸어간 것은 아닙니다. 인도자의 뜻을 실천한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의 이야기 대상에서 실천하지 않은 사람들은 빼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시초의 역사를 갖는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이후에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삶의 모습을 보였는지는 제가 여러분들에게 지난 시간들을 통해서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다음, 머물러 있던 2층 방에서 나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나옵니다. 이 복음 전파는 교회라는 단체가 보여준 드러난 일에 해당합니다. 죽음에 대한 위협도 비방도 두려워하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던 삶의 원천이 성령이긴 했지만 그렇게 움직이는 일의 결과로서 교회는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모인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동참(사도행전 2,42)합니다. 또한 물건들을 팔아서 모두 가져다 놓고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는 무리(사도행전 2,45)를 이룹니다.
교회에 해당하는 직접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이러한 초대교회의 움직임은 훗날 ‘사회주의의 원형’이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가리켜 ‘공생적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사회주의라는 말이 시대가 흘러서 색깔있는 용어가 돼버리긴 했습니다만, 사실은 전혀 색깔없는 권장할 만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키부츠’라는 것을 새롭게 드러나기도 하고, 요즘 우리 나라에도 그런 공동체가 생긴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공동체를 이루고 필요한 것은 나누어 쓰는...... <이름을 모르겠다>....아파트단지에 물건 배달해주고.... 새로운 신앙촌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 교회의 정의 - 니체아 신경에 나오는 >
119.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이렇게 표현하는 정의(正義)는 니체아(325년) 콘스탄티노플(385년) 신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 - 교회는 하나뿐이다.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한 신앙을 고백하며, 한 세례로 태어나 한 몸을 이루고 한 분의 성령에 의하여 생명을 받는다.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도 표현되었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던 곳에 사도들은 하느님의 업적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각기 자신들의 말로 알아듣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을 연상시키는 표현입니다.
<거룩> - 이 교회는 거룩하신 하느님이 창시자라는 소리이다. 이 거룩하다는 말은 구약성서 이사야 예언서 6장에 나오는 말로, 천사들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고백할 때 나오는 말입니다.
<보편> - 그리고 전 세계 어디서나 항상 같은 말과 의미로서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인 미사를 봉헌해왔는데, 1968년 바티칸 2차 공의회가 끝난 다음, 각 국가의 모국어로 미사를 봉헌하게 되어 지금은 그 통일성이 사라진 듯 보이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사도로...> - 가톨릭교회에서 믿고 따르는 교회는, 예수님은 교회를 이루는 최초 원인제공자였고, 그 후계자들인 12명의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인 주교를 통하여 유일한 것으로 맥을 이어내려 온다고 가르칩니다.
< 세계 교회의 역사 >
120. 이런 네 가지 특징을 갖는 교회는 자신의 역할을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펼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이후에 나오는 신약성서의 나머지 내용들은 이렇게 형성되고 발전하는 교회 공동체의 변화모습을 적고 있습니다. 발전하는 모습, 그 공동체들 사이에서 생긴 문제와 그 문제들에 대하여 설명하는 사도들의 가르침, 예수님이 남기신 말씀(마태오 10,23)을 따라서 여기서 박해하면 저기로 피하고 거기서도 박해하면 또 다른 곳으로 펼쳐져 나가는 교회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렇게 해서 세계의 여러 곳으로 알려지게 된 교회와 그 역사를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수 차례 언급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3일만의 부활, 40일만의 승천, 10일만의 성신강림에 이어서 제자들의 모습이 완전히 바뀐 모습을 보였다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 때가 교회의 시작입니다. 교회가 되기 위한 싹은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대로, 스승 예수에게서 배운 그대로 실천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하는 말에 가장 가까웠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초대교회(初代敎會)’라고 부릅니다. 물론 그들의 뛰어난 생활상을 가리켜서 ‘초대교회 신자들의 생활’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생활모습은 사도행전 2-5장에 나와 있습니다. 물론 잘못 나가는 모습을 보인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만 어쨌든 우리는 당시의 역사를 가리켜서 모두가 본받아야 할 초대교회의 역사라고 합니다. 가장 하느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정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말씀과 그 정신에 가장 가까이 움직여 나간 공동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스승 예수를 가장 가까이 뵈었던 ‘그들’은 삶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기뻤던 삶의 모습이고, 환희와 즐거움의 모습이었고 어떤 역경이라고 하더라도 과감히 떨쳐 버리고 다시 움직이겠다고 하는 그런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죽임[살해=殺害]의 위협 앞에서도 굳건했던 그들의 모습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더라도 자신의 생활은 떳떳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깁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서의 내용과 말씀들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역사는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공동체, 즉 그리스도교회의 처음 출발지는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입니다. 교회 초창기의 역사에 이 지역은 지금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로마’라는 국가의 정치적인 식민지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문화지배는 지금의 그리이스 지방에 있던 국가 그리이스였습니다. 그랬기에 성서는 그리스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구별에 따르면, 성서가 담고 있는 역사의 가장 늦은 배경은 길어야 기원 후 110년경으로 잡습니다. 즉,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약 70년 후까지 기간이지요. 그 이상의 역사적인 상황이나 모습은 성서에서 우리가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서 기록 이후의 일을 알아보는 것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릴 교회의 역사가 되는 거구요.
성서가 담고 있는 시기 이후의 역사는 여러 가지 면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요즘은 그런 일이 좀체 없습니다만, 초창기에는 신앙을 갖는 것도 지금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제약이 많았다는 소리가 되겠지요.
로마라는 국가와 그 정치이념을 생각해 보면, 종교는 대단히 크고 중요한 일에 속했던 시대였습니다. 특히 이 국가 로마는 자기들의 민족신, 조국 신들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엄격하게 관리하였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그 조국 신들에는 황제에 대한 숭배가 있었습니다. 따르면 살지만 거부한다면 죽음의 길로 가야하는 그런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이 로마라는 국가에서 볼때, 그리스도교인들은 국가적인 종교, 예배를 멀리하는 무신론자들의 집단이었고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찬제(聖餐際)’라는 것을 통해서 인육(人肉)을 먹는 집단으로 모함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 그리스도교인들은 신을 따르지 않기에 질병들(=페스트, 홍수, 기근, 이민족의 침입)의 원인이 된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온 것은 박해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렇게 해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박해들은 상당수 로마의 정치지도자였던 황제들에 의해서 시행되었습니다.
125. 기원 후 112년경에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칙령을 반포, 박해하는 기준을 만듭니다. “크리스챤들을 일부러 색출할 필요는 없지만, 만일 그리스챤임이 드러나고 또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 드리기를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은 벌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칙령은 훗날 로마 관리들이 그리스챤들을 다루는 한가지 기준이 됩니다.
126. 밀라노 칙령과 교회의 로마종교(國家宗敎)화(化)
로마 황제중 한사람으로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라고 있습니다. 일설(一說)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그는 황제권 다툼으로 인한 ‘막센티우스=막시미누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렇게 승리하기 전 그는 꿈에서 십자가<†>와 그 표시를 앞세운 사람들의 무리를 보았고, 길(吉)한 징조라 생각하여 그는 자기의 병사들에게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쟁에 임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자 ‘그리스도교 박해’를 끝내고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합니다. 이 밀라노 칙령(313년 6월) 이후에 그리스도교는 지하(地下)교회에서 지상의 교회로 모습이 바뀌게 됩니다. 박해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이 반환되고, 그리스도교인들을 속박하던 모든 법률이 폐지되었습니다.
이 회의는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장인 에우띠체스가 주장한 그리스도의 단성론 <그리스도는 천주성(天主性)만 가졌지 인성(人性)은 없다는 주장>을 인정한 회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교황 레오 1 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플라비아누스에게 교서를 보내어 정통 가톨릭 교리수호를 역설하고 에우띠체스의 이단을 반대한다고 천명했으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를 움직인 에우띠체스 일파가 에페소 회의를 열게 한 뒤, 주교들을 위협하여 지시 서명을 받아냈고, 플라비아누스 총주교를 살해하였다.... 이것이 강도회의의 전말이다...
451년 : 교황 레오 1세에 의하여 칼체돈 공의회가 열림... 콘스탄티노블 맞은 편에 위치한 칼체돈에서 에페소 강도 회의를 유발시킨 에우띠체스의 그리스도 단성론을 단죄함....
<신자들이 미사 중에 받아 모시는 눈으로 보이는 성체는 천주성과 기묘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따르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굳이 표현하자면, 천주성(天主性)-인성(人性)의 양성론(兩性論)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현재 가톨릭 교회는 양성론을 수용한다. .>
726년 : 레오 3세 황제가 성화상과 유해 공경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함.. 이것이 소위 성화상 파괴주의 인데, 843년까지 동방에서 큰 혼란을 야기시킴....
731년 : 그레고리오 3세는 로마 시노드를 개최하여 성화상 파괴주의를 단죄하고, 성화상 공경은 가톨릭 전승과도 일치함을 명백히 선언함..
787년 : 제 2차 니체아 공의회 개최........주로 성화상 파괴주의를 단죄함.......
밀라노 칙령(313년)이후에 황제는 로마를 교황에게 맡기고<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의 수도를 천도-시오노 나나미, 콘스탄티노플 함락 83면> 자신의 권력 중심지를 동쪽의 지역인 비잔틴(=콘스탄티노플)으로 옮겨갑니다. 그리하여 후일에는 상업적인 중심지였던 도시들을 중심으로 해서 5개의 커다란 도시가 생겨납니다.(로마, 비잔틴=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 5세기경.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네스토리우스, 그리스도안에 신성과 인성이 함께 있음을 주장, 431년 에페소공의회에서 단죄. //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하는 에우티케스는 인성이 신성에 흡수돼 버리는 단성론주장,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 단죄.
한편,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쪽의 교회는 당시의 시대상황과 사상의 발전에 따라 신앙에 대한 학문적인 것이 발전해 나가지만, 다른 네 개의 도시를 중심으로 한 동쪽의 교회는 과거의 모습 그대로 남습니다. 또한 주된 언어였던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차이, 관습과 제도의 차이, 그리고 비잔틴 총주교들이 로마 교황과의 동등권을 주장하는 야심 때문에 교회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857년 포시우스 총주교 때엔 한때(864-868년) 로마와 분리되었다가 다시 화해하기도 하였으나, 미카엘 체룰라리우스 총주교는 콘스탄티노플내의 ‘라틴계 교회와 수도원을 폐쇄하고, 라틴교회가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한다, 사제의 독신제와 신경에 필리오꿰를 삽입하였다’고 공격하였다.
이에 대하여 레오 9세 교황은 특사를 파견 담판을 시도하였으나 결렬되고, 사절이었던 훔베르트 추기경은 체룰라리우스에게 파문선고(현재는 그의 행위가 월권<越權>이라는 견해가 지배적)하고, 체룰라리우스는 로마교황을 파문(당시는 공석이었지만)함으로써 동․서방 교회는 분열되었다(1054년). 그 뒤 루마니아, 조지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러시아의 정교회들이 로마 교회에서 속속 이탈하였다. 이것이 1961년쯤에 와서 상호파문을 취소함.
분열된 동․서방 교회는 더 큰 대립을 하게된다. 분열한 후 동로마 제국은 점점 약해지고 증대해 오던 이슬람교도가 제국의 아시아지역, 북아프리카를 석권하여 성지를 점령하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다. 이에 서방교회는 7차례(1079년-1265년)에 걸친 이 십자군 운동을 일으킨다. 이 운동의 목적은 성지회복 및 크리스챤들이 성지에서 자유로운 순례였다. 제 1회 십자군은 교황 우르바노 2세가 1095년에 클레르몽 회의에서 제안했고 원정군의 옷에 †자 표시를 했으므로 십자군이라고 불렸다. 몇 번에 걸친 원정에 따라 한때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라틴 제국을 건설(1204-1261)하고, 라틴교회 총주교좌를 설치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크리스챤들이 자유롭게 순례하는 권한을 얻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