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자 교리교안 32조목 해설-이철희 신부 1-52

2006. 11. 2. 오후 5:44:26

글자

1998년 3월부터 10월 7일까지 했던

예비자 교리교안입니다.

 

작성한 다음 수정해서 올리려고 했으나, 처음 작성한 그대로 올립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은 수정해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아래한글로 만든 것입니다...

 

교안의 내용은 전통 교리서인 320조목’을 해설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철희 신부-

 

 

예비자 환 영 식

1. 창세기 12, 1-3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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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떠남의 의미 -- 나이 75세에.

무엇을 바라고 떠났을까?  ** 여기에는 그 목적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순종하는 것밖에는.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이 자리에 왔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여기에서 다 순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3. 지금 시대와는 다른(1850+1998=3848년, 약 4000년 전쯤, 우리의 단군시대에 해당?) 이 시대에는 부족사회요 씨족사회였다고 한다.  이때 한 부족의 구성원이 그 곳을 떠나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아브람은 떠난다. 그는 무엇을 믿고 떠났을까?  오직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 하나뿐이었다.  이렇게 떠난 행위의 결과는 여러분들이 예비자 교리반을 통해서, 그리고 훗날 성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4. 말 한마디를 믿고 떠난 일의 결과가 엄청난 열매를 맺었는데, 이 자리에 함께 하는 여러분들의 떠남도  같은 결과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그렇게 준비할 수 있도록 우리도 더 노력할 것이고, 예비자 교리를 담당하는 분들도 도움을 주실 것이다.


5. 여기에서 이야기되는 하느님의 축복선언과 저주선언을 먼저 기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삶의 결과로 우리가 알아듣는 결과일 뿐이다.  우리의 삶, 이 순간의 시작이 나로 인하여 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축복이 될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법에 따라 다른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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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첫 만남을 위하여

6. 선택된 날의 의미:  오늘은 교회가 정한 날 중에서 ‘성모영보(聖母領報) 대축일(大祝日)1)’입니다.  더불어 여러분들이 함께 예비자 교리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중요한 의미를 두자면, 오늘보다는 이 예비자 교리의 마지막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세례 받는 날에 일치해야 더 의미 있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을 전하는 천사의 말에 대하여 ‘몇 마디의 말이 오고 간 다음, 그렇게 되도록 이끌어 주신다면 고맙고 좋겠습니다’라는 순응의 결과를 통하여 이 세상에는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가톨릭의 신앙인들은 받아들입니다.  물론 똑같은 ‘예수를 삶의 중심’으로 두고 있는 ‘개신교’는 강조점이 좀 달라서, 이 사실을 전혀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가톨릭과 같은 자세를 이단으로까지 치부합니다. <물론 개신교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안 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시작하는 이 날의 의미도, 오늘의 시작으로 인하여 얼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 여러분들의 삶의 모양을 바꾸어놓았다면, 오늘 그 출발점의 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신앙을 바꾼다?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말의 의미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믿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이 되었든, 미신이 되었든, 자신의 두 주먹이든 간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믿고 의지하는 그것 때문에 사람의 생활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게 됩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우선 순위가 바뀌는 것이죠.  형체가 있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 또는 그 반대로, 유한한 것에서 무한한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서 그렇지 않은 것으로,  그러나 가톨릭의 신앙을 한번 받아들인다면 죽기까지 충실을 다하라고 다짐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받아들이고 생활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결코 혼자만의 신앙은 아닌데도, 가톨릭의 신앙인들은 매우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삶과 죽음을 함께 보기 때문에 겁을 먹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정 없다는 소리도 들리고, 성당이라는 모임에 누가 왔는지, 모임이 끝나고 누가 가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도 합니다.  그것은 분명 바뀌어야 할 것인데도 아직은 그렇습니다.

종교를 한문으로는 ‘宗敎’라고 씁니다.  특별히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가르침에 해당되는 것이 ‘만사의 줄기’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쓰고 듣는 말 중에 종가(집), 종손, 종마 등에도 같은 종(宗)자를 씁니다.  사람이 서 있게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니,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어쩌면 삶의 새로운 탄생, 이전 것에서부터 완전한 죽음 등을 의미하는 말이 되고 또한 그렇게 하려면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한옥의 대들보를 바꿀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집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한번쯤 생각해 보시면 알 것입니다.  사람의 육체 세계에는 힘들다 어렵다 할지 몰라도 그것이 꼭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믿음을 바꾸고 새것을 배운다는 의미 이상을 갖는 것이 바로 종교에 대한 것입니다.


8. 예비자 교리반의 과정 -- 초대받은 당신을 따라서.

오늘 짧은 이야기를 드린 다음에, 앞으로의 윤곽을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성서 중심적인 면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는 알아야 성서도 이해하고 우리 삶에 적용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신앙의 근간이 된 인물, 하느님으로서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룰 것입니다. 더불어 삼위일체(三位一體)로서 성부이신 하느님, 성령이신 하느님의 부분도 다룰 것입니다 -- 믿을 교리 편

사람은 이 세상을 살고 지내면서 여러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끼리의 도움을 물론이고, 하느님의 도움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을 가리켜,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서는 성사편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 성총(聖寵)을 얻는 방법 편

다음으로는 인간의 행동을 통하여 행할 삶의 지침을 이야기하는 지킬 계명(誡命)편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삶을 마치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신앙이 이야기하는 것, 우리 삶의 최종목적에 대해서,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일치하기 위해서 거쳐할 마지막 과정인 죽음-정화와 조명의 기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9. 부탁의 사항

저도 노력하겠습니다만, 기왕에 시간을 내서 시작하신 일, 한 분도 낙오되는 분 없이 끝까지 함께 같은 길을 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10. 지난 시간에 종교를 바꾼다는 말에 대한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제가 많이 알아서 드리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새로운 형태의 삶을 소개하는 차원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 인간에 대한 피상적(皮相的) 관찰>

11.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存在)라고 생각한다.  남을 돕는 일로써 다른 사람에게 활기를 느끼게 하는 건설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든 말든 자기 중심적으로 살고 그 이념(理念)에 따라서 움직이기에 생명에 대해서 하찮게 생각하는 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이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결코 혼자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자기 중심적으로 일을 생각하고 처리하는 데에는 문제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자신만 대우받기를 원하지, 내가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귀중하게 여길 줄 모르는 마음이 자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런가?


12.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무엇을 많이 알아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보다 인생의 경륜이 더 많고 뛰어나고, 사회에서 더 큰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이 자리에 함께 하실 것이다.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러므로 제가 이야기 드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자리가 형성된 과정을 먼저 떠올려야만 그 의미가 규정될 수 있다.


13. 이 자리는 여러분이 시간을 내서 함께 하신 자리이고, 시간의 주도권이 다분히 제게 있으므로, 제가 생각한 대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이 시간이 마련된 목적은 다름아니라,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알려주고, 여러분들을 거기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구성은 종교와 신앙 지향적일 수밖에 없음을 미리 알려둡니다.


14. 첫 번째 순서로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너도나도 모두 다 인간이라 불립니다.  한자로는 人間이라 쓰는데, 사람을 설명하는 데에 사람인(人)을 쓰고 그 사이에 뭐가 있는지 또한 간(間)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홀로 살 수 없고 공동체(≠무리)를 이루어야만 제대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시작한다면, 첫 머리에 말씀드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가 조금은 축소되지 않을까 합니다.


15. 이러한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를 제기하고 신앙에서, 종교에서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오늘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목적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뛰어난 존재입니다.  태어날 때는 무척이나 약한 존재이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단 몇 순간도 견딜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 인간이 이 세상에 대해서 갖고 있는 자의식(自意識)이란 참으로 대단합니다. 이 지구상에서, 우주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알려고 하고, 해석하고 원인을 규명하고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방법으로 자꾸만 정리를 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그때뿐이지요?


16. 이런 사람이 갖는 첫 번째 문제가 삶의 의미를 묻습니다<16면>. 왜 사는지, 사는 목적은 무엇인지, 왜 그렇게도 정신없이 움직이고 먹고 배설하고 싸우고 쌓고 이름을 세우고 만들어내고 소비하고 사는지,  그렇게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 물론 이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기도 쉽지 않지요.


17. 대답은 없습니다.  쉽게 인간에게 그 응답이 주어지지를 않습니다.  ‘열심히 살고 그냥 아름답게 죽기 위해 산다’고 대답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런 심각한 내부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은 그래도 위대합니다. 비가 언제 올지 미리 알아내서 준비하기도 하고, 사람에게 해(害)가 되는 것을 피하려고도 하고, 지구를 지배하고, 자동차를 만들어서 쉽게 움직이기도 하고, 내 의지(意志), 의사(意思)를 전하기 위해서 전화, 팩스 등도 쓰고 만들어냅니다. 가끔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가 아닌 곳에서 벌어지는 운동경기를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이런 요소가 위대함의 한가지 본보기가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고 치죠. 그것으로 끝납니까?  사람이 찾는 다른 요소가 또 생기기 마련이고 그것은 지금까지 개발되고 나열된 것만으로는 해답이 되질 않습니다.  그런 뜻에서 또 다른 대답을 우리는 찾는 것입니다.


18. 이렇게 인간의 실상(實相)에 대해서 생각할 때, 더 안타까운 것은 ‘영원히, 내가 마음먹은 만큼 오래도록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 시편 90장 10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좋아야 80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이 바라는 문제, 그 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일만큼은 그 어느 인간도 지금까지 해결한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지구상의 인구가 50억 명이 훨씬 넘지요. 아마 유사(有史)이래 지금까지 있어왔던 사람의 숫자를 모두 계산한다면 천억 명이 훨씬 더 넘을 지도 모를 겁니다.  이렇게 많았던 인간들 가운데 오래 살고 싶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겠죠.  중국에 있었다고 하던 진시황이 그랬죠.  불로초(不老草)를 얻으려고 어쨌다나 그러나 결국 땅속으로 사라진지 오래됐죠.  혼자 죽기 안타까워서 수많은 사람들도 함께 매장하기도 했다고는 합니다만.


19. 이렇게 인간이 갖고 있는 최대한의 근본문제를 생각하면, 인간처럼 비참하고 안타까운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아는데 도대체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진 한계입니다.  뭔가 탈출의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직까지 해결을 위한 방법이 제시된 것은 없습니다.


< 종교 언급 >

20. 여기에서 종교라고 하는 말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분히 인간으로서 느끼고 고민하는 문제에 대하여 답을 제시하려고 애를 쓰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문제로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문제를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래야만 할 필연성이 없는 거겠죠.  그렇다고 해서 답을 제시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답이 있게 마련입니다. 출제자의 의도에 따라서 그것이 맞는 답이 되는지, 아니면 부족한 답이 되어 새로운 보충을 해야 하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더불어 제가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제시하는 답을 여러분이 액면 그대로 수용해야 할 필연성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종교와 신앙에 근거한 답을 제시하고 여러분이 수용할 수 있도록 할뿐입니다.  한가지 바란다면, 제가 앞서 제시한 것과 같은 문제를 여러분이 떠올리신다면 적어도 제가 제시하는 답이 한가지 응답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21. 종교와 신앙이라는 것의 특성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갖고 고민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답이 될 수가 없죠.  사람이 겪는 문제가 그만큼 다양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하는 그 순간 또 다른 의문의 요소가 바로 그 자리에서 생길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다만, 사람이 갖는 문제와 고민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만들어주는 것뿐입니다.  어느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나름대로의 대답을 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22. 원시종교도 그런 것의 하나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두려운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원시시대라고 하는 때에는 사람 스스로 설 수 있는 토대가 약했기에 ‘인간보다 힘이 센 모든 것’이 다 신(神)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神)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인간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거기에 제사를 지내는가 하면 그가 노여워했다고 화(禍)를 삭혀주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요즘 현대의 시각(視覺)으로 보면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 것도 상당 수 있습니다.


23. 잘은 모르지만, 불교와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시자가 인간이다’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 대한 말이고, ‘한가지 윤리규범을 설명하는 것이지 종교는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유교에 대해서 내리는 피상적인 평가요 판단입니다.  이 자리가 불교와 유교에 대해서 설명하는 자리도 아니고, 제가 그것을 설명할 만한 능력도 없는 사람이기에 간단하게 언급하겠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던 인도 카팔라 왕국의 왕자 석가가 특별한 수행을 거쳐 거기에 덜 집착할 수 있는 수련의 방법으로 제시한데서 시작된 것이 불교입니다.  불자(佛子)라고 해서 인간이 겪는 그런 문제들을 겪지 않고 건너뛰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수도정념(修道情念)하는 것이 스님들의 생활입니다.   승(僧)이 되어 법을 깨치고 석가(=깨달음을 얻은 자)가 되어 해탈하고 열반에 드는 것이 그분들의 목표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잘못 설명했다면, 양해해 주시기를)


24. 유교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바탕으로 하는 삶의 윤리라 합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유교에는 내세라든가 인간 삶의 완성을 목표로 한다는 설명은 따로 없지 않을까 합니다.  다분히 살아있는 사람이 지켜야 할 삶의 규범들을 설명합니다.  살아서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 잘못 공경한다면 벌받는다는 것은 좀 단편적이고 과장된 ‘부분인용’일지 모르겠습니다.


< 그리스도교 >

25. 또 다른 응답을 제시하는 종교의 하나인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모인 신앙인의 집합체’를 통칭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1517년이래 둘로 갈라졌고 지금까지 일치를 위한 많은 방법들이 제시되긴 했습니다만 아직은 머나먼 평행선입니다.   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기름으로 축성된 자)’라고 불리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써 인간이 겪고 있던 문제들에 대하여 답을 주었고, 그 답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삶의 변화를 이룬 뒤 그 삶을 일정한 형태로 형성시킨 종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누군지, 하느님은 누군지, 그 예수가 살았던 삶의 본보기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생활은 어땠는지, 예수가 활동한 시대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은 어땠는지를 알아보고 우리의 현실과 비교해 보는 것이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알아보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만을 다루지는 않습니다.  더 많은 내용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합니다.


26. 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골자를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과 하느님사이의 중재자이시다.  그는 하느님이면서도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약 30여 년을 살며 복음을 선포하다가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화해시키신 분입니다.  그리고 훗날에는 그 삶을 본받아 공동체가 생겼고 그 공동체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지속적인 구원의 가르침을 이어 내려오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창시자(?)가 행한 것을 반복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종교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제2, 제3의 그리스도가 되어 살 수 있는지 생각하고 노력하고 이 세상에 체현(體現)하도록 노력하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더불어 간단히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으로서 탐구하지만 해결책을 얻을 수 없고 그 과학에 의한 응답에 만족하지 못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답을 주기도 합니다. 


27. 종교라는 것이 그렇듯이, 현실의 생활과 떨어져 생긴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사람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습니다.  그런 면에서 주어진 이 시간, 이 장소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언급될 그리스도교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특정지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짧게라도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그리스도교를 설명하는 앞으로의 시간에도 역사 이야기는 꾸준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지난주간의 간단한 요약 >

28. 지난 주 수요일에는 여러분들에게 사람의 생활에서 ‘종교가 자리하게 되는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 인간이 주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살고 싶기는 하지만, 세상의 일을 한 부분이라도 자세히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사람이 주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보다는 그렇지 못한 일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런 나약한 인간의 마음에 삶의 중심을 세워주는 역할을 종교가 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일을 과학의 잣대와 기준을 가지고 해석하고 재는 사람에게는 그것마저도 자리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 세상에 있는 종교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드렸습니다.  불교와 유교, 그리스도교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만 말씀드렸습니다.


29. 이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한계 내에서, 그리고 굳이 설명이나 인용이 필요할 때만 말을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면, 이후의 과정은 그리스도가 누군지, 무엇을 한 인물인지, 그 인물의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30. 먼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사람들을 향하여 했던 말과 행동, 가르침, 기적을 통칭하여 복음(福音, GOSPEL)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복된 소리’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다양합니다.  그(=예수)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은 물론이고, 그의 행위로 인한 사람들의 변화, 그리고 그를 따르며 살았던 보여주었던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의 기쁨과 희망을 갖게 해 주었던 모든 것, 다른 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인간대우를 받지 못했던 비천한 계급(?)의 사람들마저도 ‘아! 나도 사람중의 하나였구나! 그렇다고 한다면 나도 나 자신을 귀중하게 여겨야 하겠는데......’하는 영향까지를 불러일으킨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더 확장되는 의미는 다른 시간을 통해서 강조될 것입니다.


<믿을 교리 편>

< 역사상의 예수 >

31. 이 예수는 언제 태어났는가?  먼저 복음서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복음서>라는 말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 <복음서>라는 용어는 예수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사실 보고서,  신앙고백서를 의미합니다.  눈앞에 일어난 사건을 일기로 쓰더라도 사람은 자신이 관심 갖는 일을 더 강조해서 다루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의 기록도 그러합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에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는데, 그 각각은 저자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전해지는 방식에 따라 불립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의 복음서라고 편의상 그렇게 부릅니다.

이 네 가지 복음서 중에서 루가 복음서는 그중 연대기적으로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루가 복음서 2,1-7사이에 그 시대 언급이 나옵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누스가 호구(戶口)조사령을 내렸을 때......’라고 기록합니다.  신앙고백서인 루가 복음서에 언급된 시대를 역으로 계산하여, 역사가들은 시대산정을 하기를 ‘아우구스티누스 황제가 호구 조사령을 내린 때’를 가리켜서 기원전 약 4년경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계산하는 ‘서기 원년’은 훗날 잘못된 계산(로마제국 건국 754년)에 의하여 달라진 것입니다.


32. 우리가 사는 생활에서도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의 탄생이라는 사실이 당시의 역사가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은 되지 못했는지 동시대의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 사정은 요즘에도 비슷합니다. 누군가 태어났으면 그뿐이지, 그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군가 역사로 기록하겠다고 덤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그 특정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게 부각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탄생 때는 어떠했는지, 성장과정에는 어떠했는지, 자라면서 누구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는지 법석을 떨면서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예수에게 적용된 과정도 같을 것입니다.  훗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공동체, 그리스도교가 이름을 얻게 되자 몇몇의 기록이 나오긴 합니다.  그 몇 가지 예가 <초대받은 당신> 책의 29면 하단 3줄-30면 상단 8줄까지 나옵니다.  함께 보시면 더 참조가 되리라 봅니다. (함께 살펴본다)


33. 이 예수에 대한 역사성에 대한 이야기는 차후에 또 다룰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 예수가 비중이 있는 인물은 된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인물의 존재성만큼 논란이 있었던 인물이 또 없기 때문입니다.  덜 중요하거나 무시할 수 있었다면, 논란거리도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인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만 따져도 가톨릭 약 10억, 개신교 ??억. 그리고 그 인물이 남겼던 행위와 그 인물을 중심으로 해서 구성된 여러 단체의 역할들이 그것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흐르면서, 예비자 교리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간단하게 언급은 할 수 있겠지만, 새삼 존재의 여부에 대한 논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오히려 거기에 들이는 시간과 힘의 소모보다는 그 인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알아듣고 달라져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 여부가 더 필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34. 이 인물 예수는, 지금부터 약 2000여 년 전, 이스라엘(=당시에는 국가의 명칭도 없었습니다. 로마의 속주였고 변방이었으므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속주 정도로 알려졌습니다)이라는 나라에서 매우 흔한 여인의 이름이었던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으로 이루어진 가정에 태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나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과거의 나라와 그 역사를 통해서 준비해온 결과에 따라서 ‘약속의 때’가 다 되어 이 세상에 인간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나신 분이라는 것이 가톨릭의 신앙,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신앙에서 분명히 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지만, 아버지는 요셉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아버지를 지칭할 때 말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가리켜서는 기르신 아버지라 해서, 양부(養父)라고 부릅니다.


계시

35. 인간으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제 6과 ‘하느님과 계시’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가톨릭 신학의 한가지 용어인 ‘계시(啓示)’라는 말의 의미는 영어로 'REVELATION'으로 씁니다.  낱말을 분해하여 설명하면, ‘닫혀있던 장막을 걷어내어 감췄던 것을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행위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느님뿐입니다.  주체도 하느님이시고, 보일 수 있도록 해주는 객체(=대상)도 하느님이라는 소리가 됩니다.   그럼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하느님을 볼 수는 없는가?’  대답이야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습니다만, 성서에 나오는 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20에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고 선언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3,23에 하느님은 한가지만은 인간에게 허락하십니다.  “뒷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36. 그래서 신학에서 설명하고자 할 때 인간은 하느님을 직접 볼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자연의 사물, 우주 만물의 신비, 천체의 조화, 인간의 양심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고 체험하고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에 대한 설명이 <초대받은 당신> 제 6과의 다른 부분들 설명입니다.

세상이 저절로 생긴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질서를 지켜서 운행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느님이 정하신 법칙과 규정이 담겨있다는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만물의 생성부터 관련되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인간의 탄생 역시도 하느님의 작품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의 이야기를 ‘창조론’이라고 하는데, ‘진화론’과는 배치가 됩니다.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는 것은 보류하고, ‘창조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귀중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거나 인간 생명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도구로 흔히 생각하고 다루는 동물들에서 진화되었다고 믿는 ‘진화론’을 일부러 나쁘게 볼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만, 인간을 진화론보다 상대적으로 귀중하다고 보는 것이 창조론 입니다.  인간이 쉽게 접근하지 못할 최고 지성의 존재가 인간의 근원이라는 믿음이 바로 창조론 입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들도 역시 기원을, 출발점을 하느님에게서 찾는 것이 창조론 입니다.


37.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잘못을 했을 때 가책을 느끼게 하고, 선을 행했을 때 격려의 마음을 갖게 하는 ‘양심’을 통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이러한 보조수단을 넘어 당신의 아들이 직접 인간 세계에 내려와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화해시키는 작업을 했는데, 그 인물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이 인물을 통하여 움직이신 하느님의 행위는 하느님이 직접 움직이시는 것이라고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인간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훗날 다시 한번 더 반복이 되기는 하겠습니다만,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개념을 들어서, 하느님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창조주이신 하느님,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화해하기 위하여 인간으로 이 세상에 임하신 성자로서의 하느님,  우리 인간들과 교회를 이끄시는 힘으로서의 성령 하느님으로 하느님이 나타나시는 모습(=양태,樣態)을 구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쉽게 알아듣고자 하는 방법과 하느님이 당신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계시(啓示)에 의하여 구별하는 것뿐입니다.


38. 이 예수는 하느님이 정하신 때가 되자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십니다.  역사적인 배경으로 이 인물 예수에 대한 것을 다루는 간략한 이야기가 <초대받은 당신> 책 7과 8과의 내용입니다.

예수는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져 우리에게 번개처럼 나타난 것이 아니고, 세례자 요한도 예고했던 것처럼, 과거의 예고가 실행된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선구자였습니다.  예수님에 앞서서 그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복음서에 소개됩니다. 마태오 3,11-12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 분은 나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라고 요한은 예수에 앞서 오면서 예수를 그렇게 소개합니다.


39.   이 예수가 이야기한 것을 주제로 소개하면, 그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이 누구인지 따로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만,  하느님의 뜻이 통하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을 사람들 사이에 널리 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표현하면, ‘하느님 나라의 건설’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씀을 통하여, 가르침을 통하여, 기적을 통하여, 결국에는 당신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죄인으로 처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따른 인간으로서의 예수, 당신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에서 살려내시고 승천하게 하시고, 그 뜻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펼쳐 가십니다.  그 공동체의 이름은 ‘교회’입니다.  제대로 된 의미에서의 교회라고 한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보고 나서 실망할 수 있는 그런 나약한 모습을 지닌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지난 주간의 교리내용 정리>

40. 지난 주 수요일에 저는 가톨릭 교회의 시초와 그 출발점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차지하는 사람으로서 예수의 위상(位相)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시대적인 상황에 맞춰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예수에 대한 것은 반복하여 말하자면, 역사를 우선으로 해서 볼 것이 아니라, 신앙을 우선으로 해서 봐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마련한 과학이라는 것으로 해석 또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뒤로 미루긴 했지만, 간단한 말씀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신앙과 신약의 중심인물인 이 예수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바탕을 간략하게라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역사의 구별을 위한 개관>

41. 역사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역사,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이 남겨진 흔적들을 이용하여 과거의 생활을 추정해 볼 수 있게 하는 역사가 있고, 두 번째는 구전(口傳)역사라 할  만큼 이 세상의 흔적과 비교하여 연구할 수 없는 ‘무형의 언어로 전해진 역사’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중요성은 인정하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크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단군신화와 고조선에 해당되는 부분이 후자의 ‘무형의 언어 역사’가 될 것이고, 삼국시대 이후에 대한 것이 전자의 ‘흔적을 남긴 역사’가 될 것입니다.  이 양자는 서로 충돌이 되지 않습니다.  서로 보완을 하지요. 하지만 한가지 기준을 가지고 다른 것을 재고 연구하면 그 존재의 의미가 쇠퇴하게 됩니다.


42. 성서에 대한 역사도 마찬가지로 크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성서에도 앞서 말씀드린 두 가지의 성격의 역사관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구별하기 전에, 먼저 한가지를 정리하겠습니다.  전에도 강조한 경우가 있었지만, 성서는 ‘신앙고백서’라는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랬기에 과학으로 바라보고, 흔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려는 사람들의 기대에 걸맞지 않게 그들의 역사기록인 성서에는 하느님이라는 용어가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또한 그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예언자들의 소리도 나타납니다.  그들이 역사를 기록한 방식은 간단하게 말하면 이러합니다.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잘 된 일이 있었으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랐기 때문이고, 혼란과 걱정과 전쟁이 닥쳤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과 행동이 하느님의 뜻에서 멀리 떨어진 생활을 했다는 소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다소간 실망감이 앞서겠지만,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고 이스라엘의 역사인 성서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 이스라엘의 역사 >

43.   이 시간에 제가 여러분에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언급하는 목적은, 특별한 목적이 있는 역사언급이요, 역사공부입니다.  우리가 가서 살 나라도 아니고, 개개인의 구체적 생활과 별반 관련도 없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섭리를 우리가 깨닫고 우리 삶의 역사에서 반복하거나 축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찾아보기 위해서 공부한다는 것뿐입니다.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목적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우리가 안다고 해서 우리 지식의 면에서 크게 달라질 것도 불편할 것도 없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44. 성서를 보면서 앞서 말씀드린 ‘유형과 무형의 역사’구별과 그 적용은 이렇게 합니다. 구약성서의 첫째 권인 <창세기 1-11장>까지를 무형의 역사로 구분합니다.  그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는 흔적이 있는 역사가 될 것입니다. 이 흔적이 있는 역사에 나오는 많은 것들의 바탕에는 물론 무형의 흔적이 자리를 잡습니다.  무형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 뒤에 흔적을 이룬 삶의 기록도 참된 의미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45.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는 기원전 1250년경에 등장합니다.  흔적이 있는 역사의 모습으로서 말입니다. 이때는 우리가 구약성서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출애굽기의 역사가 이루어진 때로 추정합니다.  성서의 역사에도 그렇게 나오고 이집트 역사에도 간략하지만 그 언급이 나옵니다.  시초의 역사란, 이집트에서 고난을 겪던 셈족과 그 후손의 한 부류들이 고난과 압제를 피해서 그곳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느끼기에 그렇게 떠난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었고,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고난과 억압에서 하느님께 부르짖으니 그 하느님이 구원이라는 선물로 응답해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체험은 훗날 그들의 역사를 이루는 근간이 됩니다. 즉 그들은 모든 것의 시작을 하느님과 관련시켜서 생각했고 그분의 섭리와 인도에 따라서 자신들의 삶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들을 향하여 ‘왜 그렇게 옹졸하게 보는지, 그렇게 보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할 수는 없는지를 물어도’ 아마 대답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 역사의 시작이고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46.   그렇게 해서 시작한 그들의 역사를 간단하게 시대별로 언급해 보겠습니다.

일반적인 역사가들의 분류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인도에 따라 기원전 1245년 경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그리고 약 40년의 광야생활 후,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의 경계에 도착합니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는데(버스를 타고 이집트의 경계에서 이스라엘 땅의 경계까지는 약 9시간이 걸립니다. 대략 400킬로 정도), 그렇게 가까운 거리를 두고 약속의 땅이라는 곳에 들어가기까지 왜 40년을 광야에서 헤매야 했는지는 신앙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관련된 신앙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광야 생활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반항합니다.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던 모세마저도 믿지 못하겠다고 덤비며, 결국 시나이 산 아래에서는 하느님을 눈에 보이는 동물의 형상인 ‘금송아지’로 바꾸기까지 합니다. 그 잘못으로 인하여 반항하거나 항거했던 성년(成年)층의 사람들이 모두 죽기까지 40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이 기간이 지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서 가나안 땅에 진입하고 약 100-150여 년에 걸쳐서 그 땅을 조금씩 점령해 나갑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간간이 활동했던 하느님의 대리자들을 가리켜 판관들(또는 사사)라고 합니다. 그들의 이런 인도에 불만을 느낀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변의 민족을 따라 왕정(王政)을 세웁니다.   이 왕정을 세운 것을 하느님의 예언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싶지 않아서 인간에게 마음이 돌아선 것>이라고 말입니다.  급기야는 이 지도자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편의와 생각에 따라 노역, 병역에 동원합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언급하셨던 결과대로 이루어갔다고 성서는 언급합니다.  자세한 역사에 대한 것은 우리가 성서를 읽어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워진 첫 왕이 ‘사울’이었고, 다음 왕이 ‘다윗’이고 그 다음이 ‘솔로몬’이었습니다. 이 솔로몬은 세상에서 그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없었을 만하다고 칭찬을 받은 지혜 있는 왕으로 통합니다.  그가 지혜를 받은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고 열왕기(상권, 3장)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받은 지혜가 끝까지 지켜지지 않았기에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나라는 남과 북으로 기원전 935년에 갈라집니다.  그리고 북쪽의 왕국은 기원전 722/721년에 아시리아라는 국가에 멸망합니다.  <성서는 이 왕국의 멸망을 가리켜, 북쪽 이스라엘 왕과 그 백성들의 마음과 정신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소개합니다.  한 왕국의 흥망성쇠를 그들은 그렇게 신앙을 중심으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요즘 역사를 바라보듯이 군사력이 부족해서거나 정치권력자가 부패했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에게서 사람들의 마음이 멀어졌기에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멸망할 때까지 북쪽 왕국 이스라엘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마음을 돌릴 것을 간절하게 호소하지만 그 소리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이 되고 맙니다.

그로부터 약 240여 년 후, 남쪽 왕국 유다 역시도 바빌론(기원전 587년)에게 멸망합니다.  그래도 남쪽의 왕국은 나았지만, 그들도 역시 마음과 삶의 정신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기에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예언자들은 설명합니다.  국가의 힘이 약했다거나 주변 민족의 힘이 강했다고 하는 것은 순수 역사적인 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판단이고 성서의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요즘의 사람들처럼 과학을 우선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성서는 역사 변형의 원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서는 순수한 역사기록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록한 신앙고백서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멸망했던 남쪽 유다 왕국을 50년 정도 후인, 기원전 538년에  이방인의 왕 고레스의 칙령을 통하여 해방시킵니다. 이것 역시도 고레스라는 페르시아 왕, 이방인의 왕이 한 일이었는데, 성서는 그를 통하여 하느님이 당신의 역사를 준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이방인의 왕, 하느님을 몰랐던 그가 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켰는지는 모릅니다.  성서는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렇게 시행했다고 적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 역시 현대 시각으로 볼 때 해석할 수 없는 역사의 순환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방되어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여기저기에 흩어지는 운명을 겪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하에, 그리스의 지배하에, 기원전 63년에는 로마의 지배하로 들어가고 맙니다. 이렇게 로마의 지배를 시작으로 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의 이름을 앞세우고 다시 등장한 것은 기원 후 1947년입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난 다음입니다.  약 2000년이 훨씬 지나고 난 다음의 일입니다.  그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그들이 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사실은 모릅니다.  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삶의 중심으로 해서 돌아오려고 했기에 그랬다고 적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몇 마디로 구별하면, 순수한 역사는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안에 일어난 모든 사건과 일에 대해서 그 기원과 잘․잘못의 모든 기준을 하느님께 두었습니다.  그렇게 신앙 중심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바라보았고, 그들은 그 정신에 따라서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았다고는 했지만, 그것은 순수한 역사가 아니라 그들이 역사에 대해서 바라본 시각을 익혔을 뿐입니다. 


< 우리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의 비교 >

47.   이 땅에 나타난 역사의 기록은 가장 빠른 것이 삼국유사, 삼국사기로 고려시대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흔적을 남기는 역사이지만 서로 기록의 시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약 900년 정도가 채 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에 기록을 남길 줄 알았고, 기록을 남기면서도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라든가 기록의 나열이 아니라, 이미 반성과 비판을 겸한 그런 역사의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이스라엘 백성을 우리보다 특별히 낫게 보고 싶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한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찌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삶의 기준을 잡는다면 어디에다가 해야 하는지 신비로울 뿐입니다.  역사의 기록이나 반성의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것처럼 이 세계에 널리 읽혀지고 쓰이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모르긴 해도 하느님이라는 대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돌아보는 기준으로 세웠던 그 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이 세상의 그 어느 것에 견줄 수 없을 만큼 남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원역사(原歷史), 신앙에서만 설명 가능한 역사 >

48. 이처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기록할 줄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의 기원과 그 발전에 대한 시초의 믿음도 기록합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것이므로, <흔적이 남지 않는 역사, 原歷史>입니다.  원역사 부분에는 세상과 만물의 기원<창세기 1장-2장>, 인간사이에 죄악이 들어오게 된 과정<인간의 욕심-선악과, 첫 살인><창세기 3장>, 전설적인 이야기인 노아의 홍수얘기<창세기 6장-9장>, 이라크에 있다고 전해지는 바벨탑(=지구라트 유적)<창세기 11장>과 인간 세계에 다양한 언어가 생긴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성서의 첫머리에는 인간과 만물이 생긴 출발점이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학문 세계에서는 ‘창조론(創造論)’이라고 합니다.  이 창조론을 몇 마디의 말로 설명하면 ‘만물의 기원은 하느님’이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흔히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진화론’이라는 이론과는 배치관계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면, 진화론보다는 창조론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진화의 발전 단계에 있는 중간동물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 (꼬리뼈의 흔적이 있다고 해서 꼬리 있는 동물에서 진화되었다고 말하는 허구성)

* 우리들의 원시조상에 대한 동종(同種)들을 함부로 대하는 면(잡아먹고, 가두고 째고 봉합하는 행동에서)

*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구체적인 사안을 비교하면 인간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지 않다는 면에서 

* 동물에 비해서 세상에 떨어진 다음에 홀로 서는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비해서

* 인간을 그저 동물의 한 종류에서 변종된 돌연변이로 설명하는 진화론--왜 모든 것을 지배하는지 설명할 수 있나?


* 하지만, <창조론>은 하느님이라는 대상을 설정하기만 하면 모든 의문점이 풀린다. (식물먹고 -->동물도 양식으로)

*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模像)을 닮은 귀한 존재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동물을 지배하는 존재로 설명, 하느님을 빼고서는 인간의 생명 좌우지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음


< 세상만물의 창조와 인간에 대한 하느님에 대해서>

49. 빛 어둠,   창공 위아래의 물,   땅과 바다 식물,   해 달 별,   물고기 새,   동물과 사람 의 순서에 따라 창조합니다. 이 내용에 따르면 과학이라고 하는 잣대로 설명은 하지만, 진화론을 중심으로 하는 이론보다는 인간을 더 진실하고 가치 있게 대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서의 세계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에 대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창세기 11장까지는 역사의 바탕을 찾을 수 없는 원역사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노아의 방주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서의 본래의도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입니다.

한없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이 발동하여 인간은 범죄하고<우리가 사는 세계도 비슷하지 않을까>, 악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베풀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느님을 볼 수도 있습니다 <--원죄(原罪)-->.  이처럼 인간이 끊임없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려고 발버둥을 쳐도 하느님은 무시하지 않으셨다고 성서는 그 믿음을 고백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에 인간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고, 원죄라고 칭하는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에서 쫓겨나는 인간에게 가죽옷을 해 입히시고 구원의 구세주를 약속하시며, 동생을 죽인 형님 카인을 쫓아내면서도 다른 이가 함부로 죽이지 않도록 표를 하겠다는 보호약속도 하시고, 노아의 홍수로 인구가 별로 남지 않게 되었을 때도 계속해서 종족이 늘어날 수 있도록 해주시고, 먹을 양식도 늘려주시고<최초에는 풀과 씨가 든 과일나무(창세 1,29)--> 훗날 고기까지 허락(창세 9,3)>, 하느님이 계시는 곳까지 한없이 교만해지는 인간의 잘못을 보면서도 언어를 섞어놓는 일만을 하시는 하느님의 참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50. 이 하느님에 대한 내용이 여러분의 교재 16과에 나옵니다.  사실 하느님이라고 하는 개념은 진화론이 아닌 창조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모든 것을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풍조에 젖어든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알려고 도전하다가 쉽게 지치고 맙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면서 하는 말, ‘하느님은 인간 세상에 일어나는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 별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때때로 가끔씩 주무시거나 졸음에 겨워 눈을 비비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내가 고생을 하고 고통을 겪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고약한 분이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신다).’고 정리를 하고 맙니다.


51. 그러나 하느님을 일찍이 자신들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공경해왔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에 가장 가까운 계시는 분으로 성서는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시는 분(신명 4,7), 야훼여 당신은 가까이 계시며(시편 119,151),  그랬기에 인간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노심초사하며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까 끊임없이 걱정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이 세상을 구원할 방법을 찾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것이 구약성서에서는 ‘정의를 지키고 이끄시는 하느님’으로 신약성서에서는 ‘사랑의 하느님’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마음대로 개념을 정하고 정리합니다.  그렇게 정리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것은 ‘진화론,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을 파악하고 설명할 때 생기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과학이라는 이름과 하느님이라는 두 가지 개념은 병존(竝存)할 수 없는 용어입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은 영원한 평행선을 긋는 것이며,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저것을 판단하고 규정하려고 해도 안될 것이고 그 반대로 안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은 혼란만 더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고 그 하느님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이야기한다면, 인간은 결코 하느님을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재간이 없습니다.  만일 가능하다고 우긴다면, 그것은 물이 없어도 물고기가 숨쉬고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거나, 동그란 네모가 존재할 수 있다는 우격다짐과도 같은 일이 될 것입니다.  애초에 그럴 수 있는 개념은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처음부터 그렇게 정했으니까 말이죠.


< 성서 -- 초대받은 당신 17 과 >

52. 성서에 대해서 처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성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성서는 우리가 한자로 聖書라고 씁니다. ‘거룩한 책’이라는 한자의 뜻을 빌어서 씁니다.  왜 거룩하다고 이름을 붙이는가?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바라보는 뜻이며 설명에 따라서 달라집니다만, ‘하느님의 뜻을 담은 글’이기에 그렇다고 먼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모든 내용이 다 거룩한가? 라고 우리는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각각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보다는 왜 그런 용어를 쓰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성서는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 보이는 성서가 지금의 형태로 자리잡는 데에 꽤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단편적이긴 합니다만,  글로 남겨지지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최소한 3400년 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지금의 형태로 차츰차츰 자리잡은 것은 기원전 900년경 전쯤으로 일반적으로 정합니다.  이 시대는 솔로몬 왕정시대입니다.  물론 이 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때부터 모세 오경부터 시작하여 글로 하나씩 둘씩 쓰여지기 시작합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역사적인 구별에 의한 것입니다.  구약성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글로 남은 것은 <마카베오서 상하권>정도로 일반적인 구별을 합니다.  역사의 배경을 보면, 기원전 140년 전 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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