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숭배(偶像崇拜-Idolatry)라는 말은 우상(偶像)과 숭배(崇拜)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이 ‘우상’의 뜻은 ‘어느 표상(表象)이나 사물로 표현되는 거짓 신(神)에게 그 신이 그런 곳에 내재(內在)한다고 믿고 하느님께 드릴 예배를 바치는 행위’입니다. 또한 ‘하느님이 아닌 어떤 피조물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그것을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아 추구하는 행위’도 가리킵니다.
성서에 나오는 우상숭배의 대표적인 행위는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황금송아지 경배사건입니다. 광야를 탈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90일만에 시나이 산에 도착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일에서 이집트 병사에게 쫓기고 광야에 들어와서는 물이 없어 고생하고 먹을 게 충분하지 않아 고생하면서 노예생활이라도 좋으니 과거의 생활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던 차에 그들의 영도자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들은 자신들의 불안한 마음에 중심을 잡는다면서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금붙이로 황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외치는 소리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 온 우리의 신이다’이라고 선언합니다. 물론 순리에 어긋난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공경의 자리에 인간이 만든 조물(造物)을 놓고 하느님께 드려야 할 예를 드렸으니 그것을 가리켜 우상숭배라 합니다.
무식한 사람은 본래 용감합니다. 잘 모르면서 가톨릭 교회를 향하여 외치는 소리 ‘우상숭배 종교’하는 소리에는 대꾸할 필요조차 없는 무고죄에 해당하는 것이고 무식한 소리입니다. 본래 남대문을 보고 직접 보지 못한 사람과 말씨름이 붙으면 못 보고 설명하는 사람이 이긴다고 했습니다.
한편으로 마리아를 우리가 공경하면서 ‘우상숭배’의 소리를 듣는 것이 슬프기는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제대로 된 삶의 중심, 믿음의 중심을 가져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특히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많은 경우 구태의연하기도 합니다. 그 소리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심이라는 것이 공부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절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그렇게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만 골라서 그런 질문을 하니 대답을 못하죠. 그러면서 성당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하죠. 그러다 보면, 자신의 생활에 확실성을 두지 못하고 이 종교, 저 신앙으로 흘러갑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흘러가는 종교가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거기 신자의 90%가 ‘옛 신앙은 천주교였다’고 한다는 웃지 못할 소리가 있습니다. 여호와 증인의 주(主) 선교대상은 천주교 신자라는 소리도 있습니다.
153. 그러므로 천주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비판받을 소지가 있는 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제대로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당연한 공경을 받아야 할 성모님이 우상으로 전락하지는 않는지 정확히 가릴 필요는 있습니다.
분명히 마리아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만 드리는 공경을 받을 수 있는 인물, 역할, 중요성을 가진 분은 아닙니다. 보통의 인간보다 뛰어나고 남다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공경하는 것은 보통의 인간이 하기 힘들만큼 하느님의 뜻에 일치했고 그 분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셨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154. 성서에 나타난 마리아의 행동은 어떤 것이 있는가?
율법에 따라 미혼모는 돌에 맞아 죽어야만 할 상황에서 아기를 임신하겠다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분,
성전에 아기를 봉헌하면서도 모진 소리를 들어야 했던 분,
12살 사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전혀 몰라보는 듯한 섭섭한 소리를 듣고도 그대로 참으신 분
장성한 아들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나섰는데도, 전혀 어머니로서 대우하지 않은 슬픔을 감내하신 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의 견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데도 그래도 굳은 신뢰심을 가졌던 분,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어 그 슬픔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분(=삐에따 상) >
이러한 모습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에 모범이 되기에 ‘가톨릭 신앙’에서는 신앙인의 모법으로 그녀를 공경하고 특별한 예우를 바치는 것입니다. 흔히 모르고 말하는 이들의 견해에 현혹되지 말고 우리 삶의 중심을 올바로 잡아야 할 일입니다.
흠숭= adoratio(n)--숭배,존경,숭경 공경=veneratio(n)--존경,숭배,경의
155. 물론 가톨릭에서는 특별한 삶의 본보기를 가졌던 마리아를 가톨릭교회에서는 특별한 예우로써 공경합니다. 같은 공경의 차원이긴 하지만, 교회는 그 용어를 달리 씁니다. 이렇게 달리 쓰는 것은 불란서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흠숭지례<欽崇之禮-천주께만 드리는 최고의 공경, 마리아에 대해서는 상경지례<上敬之禮-성인이나 천신의 지위보다 훨씬 높은 성모마리아에게 대한 특별한 공경>, 성인들에 대해서는 공경지례(恭敬之禮-성인에게 드리는 공경) 용어를 사용하며 그 격을 달리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알지 못하면 마리아 공경을 우상 숭배하는 것과 구별하지 못하고 잘못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들이 무식하다는 소리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1) 교회전승을 통하여 이어져 온 교회 영성(靈性)의 한 요소. -- 성서에는 명백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는 소리입니다.
2)트리덴틴 공의회(1545-1563년 사이 개최)에서는 종교개혁자들에게 성인공경에 관하여 설명하고 신자들에게 그 남용이나 지나침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DS984-988). 종교개혁자들은 성인의 전구(轉求)가 하느님 말씀에 반대되며 하느님과 인간사이에 한 분의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1디모2,5)의 영예를 해치는 것이라는 주장을 배격하면서, 우리의 주님 홀로 우리의 구원자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성인들을 불러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마땅하고 유익한 일(DS 984.989)
3) 성인들을 존경하고 도움을 청한 사례가 폴리카르포의 순교록(2세기)에 처음 나타난다.
4) 성인공경은 절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지는 흠숭을 약화시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욱 완전케 한다. (2차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51)
** 신앙인의 성모님 공경은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길에 도움을 주는 분이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157. 이러한 마리아는 왜 그리도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가? <성서와 성전에 근거하여>
성서를 많이 이야기하는 종파-특히 개신교-의 입장을 이해하면, 성서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 이 여인을 가톨릭에서는 왜 그렇게도 중요한 취급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응답은 삶의 신조가 성립된 배경의 차이에 따른 것이므로 가톨릭에서 설명하는 말을 그들은 다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먼저 가톨릭의 신앙신조에 대한 것은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적인 신앙신조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성전(聖傳-Tradition)에 근거해서 생긴 것이 많습니다. 성서도 어쩔 수 없이 역사가 흐름에 따라서 사람의 손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사람의 자의(自意)에 의해서 마음대로 쓰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가톨릭에서는 영감(靈感-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과 그 인도로 성서가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사람들이 성서를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며, 마음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성서를 마음대로(?)해석하고, 성서 해석의 차이와 그 방식에 따라서 파(派)가 갈리는 입장에서 본다면, 도대체 성서의 중요성을 어디에다 두고 있는지 성서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혹시 밥 벌어먹는 수단이상의 것은 아닌지>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해석은 저희들 맘대로 하고, 알아듣기 어려운 내용은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자가당착이죠.
가톨릭의 역사는 짧지 않습니다. 근 2000년에 가까운 역사입니다. 사람이 자기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하고 자기 생각을 펴는 시간은 기껏해야 40년 혹은 60년 미만입니다. 좀 더 긴 사람도 있겠죠. 그리고 성서에 나오는 바에 따르면, 인생은 기껏해야 70년이고 근력이 좋아서야 80년(시편90,10)이라고 습니다. 겨우 그렇게 짧은 인생의 길이 가지고서 하느님의 모든 신비와 업적을 알아들으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행동이죠. 그러다가 결국 자기논리에 부딪히면,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도 맞는 소리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해서 해결될 것이 있고 해결이 되지 않는 일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많이 아는 사람은 자기 삶에 많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사람도 역시 그 행동에 훗날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저 때가 이르자 ‘내가 다 잘못했으니, 용서해주오!!!“하는 소리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인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마리아를 공경하고, 그를 통해서 기도하는 것은 성서에 근거한 기록이라고 하기보다는 성전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람의 세계에서조차도 글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펴보기 이전에 글로 쓰여진 것이 없다고 해서 그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너무 속보이는 이야기입니다.
158. 마리아를 통하여 드리는 기도 - 로사리오 기도(=묵주기도)
교회는 마리아를 공경합니다. 그러나 그 격(格)이 다르다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이렇게 공경하는 마리아를 통하여 드리는 기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묵주기도, 혹은 라틴말로 로사리오<Rosarium-장미꽃다발>입니다. 이 로사리오 기도가 생긴 데에는 몇 가지 유래가 있습니다. 하지만 확정적인 것은 없고 이런 영향을 받아 형성된 기도입니다.
첫 번째는 도미니코(1170-1221) 성인이 선교하는데 어려움을 당하여 성모께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던 중 성모님이 나타나시어 묵주를 주시고 묵주의 기도를 널리 전하라고 하셨다는 설이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12세기에 문맹자(文盲者)들이 전례에서 시편의 구절을 읽는 대신 주의기도 150회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암송하던 관습에서 발전되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묵주 기도가 현재의 모양을 갖추는 데는 교황 비오 5세의 칙서(1569년)에 따른 것이라 합니다. ‘성모송 10번과 주의 기도와 영광송 각 한번이 모여 한 단을 이루고, 그 한 단이 모여 5단 또는 15단을 이룬다’. 이 묵상기도의 내용은 구원의 역사이며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로 구분하였다. 또한 각 신비는 5개의 묵상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로사리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며 염경(念經)기도를 드리는 것이요, 가장 먼저, 가장 깊은 체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신 성모를 통하여 그분의 신비를 묵상하는 것이므로, 로사리오는 그분의 신비에 접근하고 친밀해지며 구원의 신비에 일치하면서 성모처럼 인류구원의 협조자 구실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성모는 1858년 루르드에서, 1917년 파티마에서 각각 발현(發顯)하여 로사리오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였다. 교회는 로사리오 축일을 지내고 로사리오 성월(聖月)을 정하여 로사리오에 의한 신심을 장려한다.
159. 단순한 일을 반복하는 의미? -- 묵주기도는 아주 단순한 일의 지속적인 반복입니다. 전체를 통하여 사도신경 한번, 주의기도 6번에 성모송 53번, 영광송 6번입니다. 때로는 이렇게 단순한 일을 반복하는 의미가 무엇일까 궁금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의 의미를 완벽하게 알면서 사람이 하는 일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습니까? 일단 일을 먼저 하고 난 다음에 그 의미를 깨닫는 일은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인들이 하는 기도도 대표적인 것입니다. 예전에 선참후계(先斬後啓)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군율(軍律)을 어겨 잘못을 범한 이를 먼저 처벌한 다음 보고한다는 의미로, 먼저 행동하고 그 의미를 나중에 찾는 것에 조금은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죄인이 죄를 범한 다음 도주할 것을 우려해서 하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생각으로 논리로 따진 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하고 난 다음에 그 의미를 따지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훗날에도 기도<초대받은 당신 35과 언급>편에서도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기도는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로 시작한 우리의 행위는 다소 정성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이 받아들이시는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로사리오를 실제로 해 보기>
기도의 순서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오늘 5단의 기도를 한번 하겠습니다. 시간이 정 바쁘신 분은 먼저 가셔도 좋겠습니다. 마침 기도로 여러분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기에 앞서, 여러분들이 제대로 배우면서 하는 일은 오늘이 처음 일테니까, 잠시 이 기도를 통하여 여러분들이 얻고 싶은 은총의 선물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린다면, 돈이라든가 부귀영화는 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의 기도> - 1열왕기 3장 3절 - 15절 : 구약성서 1경전 524면-525면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제사를 봉헌한 다음, 잠을 자다가 하느님을 꿈에서 만납니다.
하느님은 솔로몬이 정성을 다해 봉헌한 제사가 맘에 들었는지, 그에게 무엇을 해주었으면 좋겠는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왕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먼저 청합니다. 그러자 하느님 하시는 말씀이 재물이나 부귀영화를 먼저 청하지 않은 자세가 기특하여, 청하지 않은 그것까지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런지, 훗날 이 솔로몬에 대한 평가는 ‘그보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왕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당대에 그만큼 화려하게 부유하게 살았던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가 됩니다.
기도를 위한 올바른 자세의 본보기의 한 사람입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마음속으로 한번씩 청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가리켜 교회에서는 지향(志向)이라고 합니다.
묵주의 기도 후에는 방사(放赦)의 개념을 설명하기.....
161. ** 방사<Consecration : 신성하게 만듦. 신에게 바침> ** : 영신적 이익을 위해 성직자가 십자가, 상본, 묵주 등에 기도해주는 것을 말하며, 준성사의 하나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봉사를 위해 정해진 사람이나 사물을 축복함으로써 이들을 세속에서 분리하여 하느님께 속하게 하는데, 방사는 사물을 축성하여 하느님 예배에 전용되게 할 뿐아니라 이에 대사(大赦)를 붙여 그것을 사용하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사들을 예비하고 신앙생활의 성화에 도움이 되게 한다. 방사의 효력을 얻기 위해서는 믿고 사랑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성사(聖事). SACRAMENT>
162. 오늘부터 시작하여 다루게 될 성사에 관한 이야기는 쉽고도 어려운 부분입니다. 쉽다는 뜻은 예비자 교리에 임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당장 적용되는 부분이 많지 않기에 길게 이야기드릴 성격이 아니라는 뜻에서 쉽다는 것이고, 어렵다는 이야기는 표현이나 말은 분명 사람의 말을 쓰지만, 인간사(人間事)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기에 어렵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본래 그렇게 아리송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성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63. 먼저 ‘성사’라는 말의 뜻부터 말씀드리고 나서 이 부분을 시작하겠습니다. 가톨릭 대사전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사(聖事)’란, ‘감각적 상징을 통해 효율적인 은총을 낳게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것’ 또는 ‘외적행위로 나타나는 증표로 인간의 감각이 도달할 수 없는 감추어진 하느님의 은총이 감각적인 형태를 통해 전달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감각적 상징이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거나 다른 기관으로 느낄 수 있는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164. 이렇게 사람의 일이지만,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는 특별한 일, 즉 성사에 가톨릭 교회는 일곱 가지를 정하고 설명합니다. 이 성사라는 통로(通路)를 통하여 사람은 하느님께 보다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얻게 됩니다. 예비자 교리서에도 나오겠지만, 순서라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요하니까 여러분들이 외우지는 않더라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례성사, 고해성사(화해성사), 성체성사, 견진성사, 혼인성사, 신품성사, 병자성사의 일곱 가지 입니다. 이 일곱 가지의 성사에는 앞서 말씀드린 사전에 나오는 말대로, 사람의 행동과 더불어 교회에서 정한 방법에 따라서 진행되는 예절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일곱 가지 말고도 ‘성사’라는 용어가 붙는 말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준성사, 판공성사, 등의 말은 이 예비자 교리의 ‘하느님의 성총을 얻는 방법’편에 나오는 성사는 아닙니다. 다만 비슷한 성격이나 뜻은 있습니다. 훗날 말씀드릴 기회가 따로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165.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는 성사입니다. <BAPTISMUS>
이렇게 태어난다고 하는 의미에는 상속자가 된다는 것도 포함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고 자라면서 하느님을 ‘호주(戶主)’로 모신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따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만, 세례성사는 하느님과 한 가족이 된다는 의미가 있는 성사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한가족이 되기 위해서 여러분은 이 예비자 교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린아이들<=초등부 2년 학생이전>에게는 여러분들처럼 이렇게 하는 예비자교리를 거치지 않고 먼저 세례를 주기도 합니다. 물론 적당히 성장한 후<3학년이후>에 기초에 해당하는 교육을 받는다는 조건이기도 하고, 부모님들에게 부탁드리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어린이에게 조건부 형식(?)으로 세례성사를 주는 것은 여러분이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자녀들에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이 세례성사를 이루는 예절에 대해서 간단히 말하면, 전례예식 가운데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에게 세례를 줍니다’하며 축성한 물을 이마에 붓고, 십자표를 세 번 긋습니다. 물론 집전자는 사제입니다. 이 예절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며,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상속자가 된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세례성사를 가톨릭 교회의 입문(入門)성사(聖事)라고도 합니다.
이 세례성사를 표시하는 구약성서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역사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모세의 인도를 받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 죽음의 위협에서 생명의 땅으로 들어섭니다. 물을 가르고 바다를 건넜고 그렇게 물을 건넌 것이 생명으로 건너가게 된 것임을 의미하는 의미로 이마에 물을 붓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례성사는 예수님이 세우신 것이라고 하며,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기원을 두 군데에서 정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5의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야한다는 것, 요한복음 19,34의 ‘군인하나가 창으로 그(=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를 말합니다.
마태오 복음서 3,11-14에 보면, 세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가장 먼저 세례를 베푼 사람은 요한이었지만, 그는 파견을 받고 온 사람으로서 세례의 원천이 예수라고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십니까?”
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각 신자의 이마에는 인호(印號)가 새겨진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지워지지 않는(=세례를 물릴 수 없는) 하느님의 표식을 가리킵니다. 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신자가 된 이들은 훗날의 다른 성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최초로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166. <우리의 신앙을 굳게 해주는 견진성사> <SACRAMENTUM CONFIRMATIONIS>
두 번째로 초대받은 당신에 기록되어 있는 성사는 견진성사입니다. 이 성사도 입문성사로 분류하곤 했습니다만, 지금은 그 의미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견진성사의 의미를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고, 따로 교육할 내용들을 분리하지 않았기에 일반적으로 세례성사를 거행하면서 함께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분리합니다.
견진성사는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에게 성령과 그의 선물을 주어 신앙을 성숙시키고 증거하게 하는 성사’입니다. 이 견진성사의 의미는 신앙을 성숙시키고 증거하게 한다는 의미 말고도 ‘신앙인으로서 성인(成人)이 되게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성인(成人)이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이라야만 신앙인의 성인이 되고 세례받은 사람들의 대부(代父), 대모(代母)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춥니다.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성령의 선물은 ‘슬기, 통달, 의견, 굳셈, 지식, 효경, 두려워함’입니다. 이것을 견진성사의 일곱가지 은혜라고 합니다. 또한 성서에 나와있는 성령의 선물들로는, 갈라디아서5,22<365면>에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를 이야기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견진성사의 모습 한가지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의 강림’사건입니다.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혀 모양을 가진 불’이 내려오고 제자들 삶의 형태를 완전히 뒤바꿔놓은 사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은 제자들의 모습이 사도행전 2장 이후에 잘 나옵니다.
현재, 교회에서는 세례성사를 받은지 1년 혹은 2년 사이에 견진성사를 받도록 권유합니다. 물론 견진성사를 받기 위해서 준비가 필요합니다. 짧게는 한달, 길게는 6개월 정도의 지속적인 교육을 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을 통하여 신앙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나는 그 의미를 삶에서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 그 방법들을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봅니다.
견진성사는 일반적으로 교구에 계시는 주교님이 오셔서 본당 주임신부와 함께 공동으로 집전합니다. 견진성사의 특징은, 기름을 이마에 바르면서 “**** 성령 특은의 날인을 받으시오. 평화가 그대와 함께....”하는 예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67. 틀어졌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용서와 화해의 성사<SACRAMENTUM POENITENTIAE: 뉘우침,화해>
고해성사<=화해의 성사>는 ‘자신의 삶을 뉘우치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성사’입니다. 말은 간단하지만, 이것처럼 많은 반대를 받은 성사가 드문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신부가 뭔데 죄를 용서해 주는가하는 질문과 반대에 끊임없이 부딪힌 성사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질문의 전부는 개신교의 고명(高名)하신 목사님들과 골수 신자들에게서 오는 질문들입니다.
그 질문에 응답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이 말에 대해서 응답을 할 필요는 있습니다.
이스라엘 과거 역사(=구약의 역사)에서 하느님 모독은 죽을죄에 해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하자 그 하느님의 말씀(=구약의 율법)을 연구해온 율법 학자들이 반발합니다. 마태오 복음서 9,3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온 중풍병자에게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합니다. ‘사람에게 병이 생긴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구약의 사상이었습니다. <민수기 12,1-16: 하느님이 모세에게만 이야기하시고 우리에게는 아무말도 하시지 않는줄 아느냐? 아론과 미리암이 이렇게 항의하자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생긴다.-->하느님께 반항해서 병이 생긴다. 모세의 기도로 하느님께서는 그 병이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다--진지 밖에 7일간 거주 >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죄용서라는 말로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을 견지(繭紙)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양도하십니다.(마태오 18,18 --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이러한 권한을 행사하셨던 예수님이 선택한 제자들에게 그 권한을 맡기고, 그렇게 받아들인 권한과 의무가 많은 세월을 지내면서 교회에 의하여 선택된 사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고해성사를 집전합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죄의 용서를 위한 절차는 교회에 의해서 다소 복잡하게 변형되었습니다. 예비자 교리를 하는 여러분들에게 따로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만, 용서 청하고 용서받으려면 일정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정한 방법은 이 화해의 성사를 집전하는 방법을 다섯 가지 단계로 설명합니다. 성찰, 통회, 정개, 고백, 보속의 다섯 가지 단계입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번째 단계인 통회입니다. 사실상 통회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다른 것은 그저 통과하는 의례일 뿐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되 좋은 것을 먹고 내 몸이 건강하다면, 그것의 소화흡수와 더불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내가 힘을 쓰게 되는지 몰라도 좋은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사제의 말은 다만 교회의 선언일 뿐입니다. 이 교회증인의 선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고백자(告白者)의 마음 준비이고, 그것을 가리켜 통회의 자세라 칭합니다.
이런 과정을 겪는 교회에서 정한 화해의 성사를 단계별로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1)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행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성찰(省察)이고,
2) 진정으로 반성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통회(痛悔)이며,
3) 잘못으로 인정한 것을 최대한 노력으로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고치기로 정하는 것이 정개(定改)이며,
4) 교회를 통하여 죄를 용서해주는 사제 앞에 들어가서 그 잘못한 것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고백(告白)이며,
5) 사제의 판단에 따라 정하여 주신 일을 실천하여 죄를 용서받는 대가로 행하는 것이 보속(補贖)입니다.
이런 정도로만 말씀드리고 훗날 고백에 대한 단계를 따로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또한 아주 부수적인 일이겠지만, 신자들은 대단히 크게 생각하는 예절에 대한 연습은 따로 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 교리의 이론적인 것이 대부분 끝난 다음, 실제 연습할 시간을 따로 만들기로 하겠습니다.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인간의 죄를 씻는 방법이 목욕하는데 있습니다. 자와할랄 네루가 쓴 세계사 편력 1권의 52면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마흐멜라<힌두력 마흐달의 축제> 첫 번째 축제일인 산크란티 날에, 수천명의 순례자들이 떼를 지어 갠지스 강과 줌나 강이 만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라바스티 강도 합류한다는 산감에서 아침 목욕을 하기 위해 간다. 이런 내용을 소개하면서 힌두인들의 신앙에 대해서 네루는 기록하고 있다)
168. 예수님의 몸이 있게 하고 우리가 받아 모실 수 있게 하는 성체성사 (----->미사에서 따로 설명한다)
이 부분은 미사에 대한 것으로 합쳐서, 맨 끝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신앙인들에게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몸을 이 세상에 있게 하고, 그 몸을 우리가 준비된 마음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성사입니다. 하지만, 이 성사는 단순하게 우리의 입으로 성체(聖體)를 받아 모시는 일로 끝나는 것은 아니고 더 깊은 의미가 있는 성사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모든 성사의 기본으로, 모든 전례의 중심과 바탕으로 정하는 성사가 바로 이 성체성사입니다. 이 성체성사에 대해서는 성사 뒤에 분리해서 따로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169.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들의 부분을 할 수 있게 하는 신품성사<SACRAMENTUM ORDINIS>
신품성사(神品聖事)는 이 지상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신권(神權)을 주는 성사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 신권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히 교회의 일 안에 제한됩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성사를 집행하는 권한과 의무를 말합니다. 즉 세례성사, 고해성사, 성체성사인 미사, 그리고 조금 있다가 말씀드릴 교회혼인 성사의 증인역할, 병자성사등 입니다. 그 각각의 세부사항은 따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성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남자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서울 교구의 경우에는 미혼남자, 나이 28세이하, 신체와 정신이 건강한 자가 교구의 몇 가지 규정에 의거, 선발되어 교구 신학교에서 7년 또는 10년간의 교육을 마친 다음 사제로 서품됩니다. 말로는 간단하게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을 간단하게 요약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사제로 서품되는 사람들의 활동 분야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가지는 수도회 소속으로 움직이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교구소속으로 움직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자세한 구별이야 여러분에게는 필요하지 않겠지만, 각 본당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교구소속의 사제들과 그 역할이고, 병원과 교육기관등 몇 종류의 특수분야에서 주로 활동하는 분들이 수도회 소속의 사제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보실 수 있는 수녀님들은 이러한 수도회 소속에서 여성들의 활동분야입니다.
170.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이어나가는 혼인성사<SACRAMENTUM MATRIMONII>
‘남편과 아내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관계를 성화(聖化)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설정한 성사’가 혼인성사입니다. 이 혼인성사는 단순하게 살아야 할 의무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 행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창조사업을 계승, 유지,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19,1-12에 보면 혼인성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부분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하여 구약의 율법을 잘 알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묻습니다.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이러한 질문은 철저하게 왜곡된 사회, 남자들만을 중심으로 살던 세계에서 잘못된 삶의 습성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요구하는 질문에 고지식하게 답하는 것은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인정하는 율법을 무시하거나<--아내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한다면>, 자기 멋대로 하느님의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으로 판단받을 수 있는 함정을 파놓고 그들은 예수가 그 함정에 빠지기를 그들은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법을 제정하게 된 정신에 대해서 먼저 묻습니다. 왜 그런 법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법은 엄격하게 해석해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교회에서 인정하는 혼인에 대한 정신이 나옵니다.
혼인하면 남자와 여자는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것<5절>, 혼인은 하느님이 짝지워 주시는 일이라는 것<6절>, 한 남자는 한 여자와 결혼해야한다는 것<어기면 간음><10절>, 결혼하거나 하지 않을 수 선택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11절>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내용과 관련하여, 여러분들에게 예비자 교리를 시작하면서 혼인에 관한 이야기를 드렸던 것입니다. 열심히 예비자 교리에 다 나오셔도 만일 이러한 혼인에 관해서 규정된 법에 위배되는 생활을 여러분들이 현재상태 하고 있다면 세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별 사항 없었습니다. 따로 제가 시간을 내어 개별적으로 면담을 하겠습니다. 그때라도 확인되면, 애석하지만 세례성사를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정한 혼인은 복잡합니다. 다른 성사를 설명할 때와 혼인성사를 설명할 때는 주체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성사는 신자들이 전부 대상이지만, 이 혼인성사에 대해서는 혼인 당사자가 주체(主體)입니다. 또한 교회의 사제는 단순히 ‘교회의 증인’ 역할 이상을 맡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정한 혼인 예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양쪽 당사자의 동의(同意)입니다.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겠는가? 그것을 모인 하객들 앞에서 큰 소리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합니다. 그 동의로써 혼인은 성사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 혼인제도만큼이나 복잡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매번 혼인 때마다 확인하고 또 확인하여 잘못된 일이 없도록 몇 차례 강조합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가질법한 내용 한가지만을 말씀드리고 혼인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혼인제도에는 ‘이혼은 없습니다’. 교회에서 정한 법 규정에 따르면, 혼인 무효<나는 혼인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혼인이 아니었다>는 있을지언정, 결코 이혼이라는 것은 없고, 또한 조건부 혼인도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계약결혼과 같은 모습도 없다는 것입니다. 기타 혼인에 관련된 다른 내용들은 따로 다루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