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한잔.
며칠 전 한낮의 태양볕이
초여름처럼 내리쬐던 날이었다.
볼 일을 끝내고 충무로의 뒷골목길을 걷고 있었는데
인쇄소가 밀집해 있는 곳이라 오토바이, 지게차, 자전거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 시끄럽고 복잡했다.
더욱이나 근처의 오피스텔 공사로 소음이 더해져
은근히 짜증이 나던 때였다.
바로 그 때
길가의 어느 인쇄소 사무실 입구의 열린 유리창문에
정갈히 쓰여진 큰 글씨가 눈에 띄었다.
' 목 마르신 분은
물 한잔 드시고 가세요.'
갈증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일부러 그 사무실로 들어갔다.
주인 아저씨가 어떤 모습의 사람일까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 입구 안쪽의 냉온수기 위에는 커다란 생수통이
졸린 듯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는데
그 옆에는 스위치를 누르면
종이컵이 하나씩 빠져 나오는 장치가 되어 있었고
안은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과 의자가 가지런히 줄지어 있었다.
물 한잔 마실께요.
내 목소리에 의자에 앉아 일하고 계셨던 분이
일어서서 반갑게 나를 맞이하며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네, 드시고 가세요.
시원한 물 한잔을 맛있게 비우고 나서
얼굴이 둥근 편인 60대 초의 평범한 주인에게
공손하게 감사의 인삿말을 드렸다.
좋은 일 하시네요.
지나가던 목 마른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겠어요.
뭐, 이런 것 가지고........
있는 물 나누어 마셔야지요.
칭찬 섞인 내 말에 겸언쩍어 하시면서
주름진 얼굴로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런 초로의 아저씨였으나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 부자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그마한 것이지만
스스럼없이 나누어 주실 줄 아시는
그 주인을 바라보며 속으로 부끄러워졌다.
그 사무실 문을 나서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마음에 일었던 짜증도 가셨다.
그 분의 아름다운 마음과 시원한 한잔의 물이
사람의 기분을 이렇게 달라지게 하다니!
나눔의 삶은
서로에게 참 기쁨을 주는 것 같다.
이레네오.
물 한잔.
2008. 6. 3. 오후 5:3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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