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화는 독특합니다. 내용이 쉽고 이야기 전개도 단순합니다. 그래서 읽고 난 후 곧바로 느낌이 와 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루이틀 지나면서 숨겨진 의미를 하나씩 알게 되는데, 그 맛이 일품입니다.
이 우화는 확실히 영성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을 통한 ‘상처의 치유와 상승’이라는 점에서 많은 성찰을 얻어 낼 수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삶을 돌아 봅니다.
처녀로 잉태하셨습니다. 멸시와 위협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습니다.
아기들을 다 죽인다 해서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피신중에 춥고 어두운 마굿간에서 예수님을 낳습니다. 아이를 성전에 바칠 때,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란 예언을 듣습니다.
장성한 아들은 홀연히 어머니 곁을 떠났고, 얼마 후 미쳤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친척들과 아들을 찾아 나섰으나 얼굴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란 말이냐’라고 했다는데 정말 미쳤나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들은 심판을 받고 처형장으로 끌려갑니다. 그 뒤를 어머니가 따릅니다. 아들 손목에 박힌 못은 어머니 손목에 박힌 못이요, 아들의 심장을 찌른 창끝은 그 어머니의 심장도 찔렀고, 아들이 쓰신 가시관은 그대로 어머니의 가시관이 되었습니다. 아들의 처참한 시신을 끌어안고 목놓아 우는 어머니 마리아.
은총 가득한 어머니의 삶이 이러했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슬픔’과 ‘고통’을 끼고 삽니다. 그런 삶을 우리는 ‘기쁘게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참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성장은 삶의 모든 경험, 삶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장 경계할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마음 속 뿌리깊은 ‘두려움’을 뽑아내야 합니다. ‘비겁하게’ 피해서는 안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넘어설 수 있다고 ‘자존심’을 내세워서도 안됩니다. ‘자기한탄’, ‘원망’, ‘씁쓸함’, '우울함', '심술궃음' 따위의 감정들도 이겨내야 합니다. 지난 날의 상처도 외면하지 말고 쓰다듬고 어루만져야 합니다. 우리가 목자를 믿고 부르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목자는 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사실 이번 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절뚝거리지 않고 걸었다. 광야에서의 체험 뒤에
사라지지 않는 어떤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내적이고 비밀스런 느낌으로 겉으로는
별다른 점을 알 수 없었지만, ‘두려움’의 일생에 새로운 단계를 나타내는 내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두려움'은 믿어지지 않지만 그 깨달음을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자, 자기 안에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 사이에 어떤 커다란 틈이 생기는 것을
느꼈고, 그 틈을 다시 메울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두려움'은 자기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변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목자가 한 말이
자기 안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높은 데서 사슴처럼], 85-86쪽)
이 은총의 사순시기에,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이들이, 주님의 크나 크신 자비로 ‘새로운 단계를 나타내는 내적변화 ’를 얻어, '기쁨'과 '평화' 속에 머무를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일무적(主一無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