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핵개발을 어떻게 했나

2011. 3. 17. 오후 3:05:55

글자

  필자는 '한국의 자위적 핵개발' 주제로 자주 강연을 하는데 북정권의 핵무기를 폐기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하면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다. 한 안보포럼에서 어느 예비역 중장도 아래와 같이 반박했다.

“그렇게 하면 미국에게 경제제재를 당합니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한국은 핵개발하면 망합니다.”

 

  필자는 물론 그러한 반론에 준비된 답변이 있다.

  “현대 역사에 핵을 개발하다 망한 나라는 없습니다. 핵무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한 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는 지금 미국에게 제재는커녕 막대한 원조를 받고 있습니다. 북한도 핵을 개발하면서 한국에게 100억 달러 이상의 금품을 받았고 미국으로부터는 10억 달러 이상의 중유와 식량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 매년 30억 달러를 받고 파키스탄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매년 20억 달러 이상의 무상원조를 미국에게 받고 있습니다. 인도와 미국은 밀월관계입니다. 인도에 가장 많이 투자한 나라가 미국이고 원자력 발전소와 무기까지 팔겠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핵을 개발하려다가 포기한 대가로 주한미군 잔류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대한 지원 등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미국의 국익을 지켜주고 파키스탄은 대테러 전쟁에 협조하고 인도는 중국을 견제하는 데 미국과 협조하므로 미국이 핵무장을 묵인한 것입니다.

동북아에서 한국은 이들 세 나라보다 미국에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한국의 몸값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한국처럼 경제적 지정학적 군사적 가치가 큰 나라는 핵개발을 해도 제재가 먹히지 않습니다. 과거 박 대통령이 핵개발을 포기한 것도 압력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얻을 것을 다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의 한국은 1970년대의 한국이 아닙니다.

  미국에게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동북아의 이스라엘' 수준 이상일 것입니다. 세계 5大 공업국, 5大 원자력 기술국, 7大 수출국, 8大 군사력(재래식), 9大 무역국에 드는 한국이 중국 편으로 기울면 일본도 버틸 수 없을 것이고 중국은 명실공히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국가가 됩니다. 그러한 한국이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 핵무기를 갖겠다는데 미국이 어떻게 제재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피원조국입니까?

  한국에 경제제재를 하면 미국도 손해를 봅니다. 한미동맹이 중요하지만 한국에게 미국이 소중한 만큼 미국에도 한국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게다가 미국, 중국, 유엔 등 국제사회가 북의 핵무장을 막지 못했습니다.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은 이미 찢어졌어요. 우리는 중국 미국의 무능에 의한 피해당사국이에요. NPT(핵확산금지조약) 10조도 이러한 경우 즉 적의 핵개발로 국가 생존 차원의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사전에 통보하고 탈퇴할 수 있도록 규정해놓았습니다.

  우리는 '6자 회담이 6개월 안에 북핵 폐기에 실패하면 NPT에서 탈퇴하겠다'고 폭탄선언해야 합니다. 그때부터 핵문제의 주도권은 대한민국이 쥐게 됩니다. 주도권을 북의 손에서 빼앗아오면 우리는 그만큼 선택의 여지가 넓어집니다. 핵게임을 즐길 수도 있어요. 국가가 결심만 하면 2년 안에 100개 이상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한국입니다. 그렇게 한 다음 북한에게 '야, 그 따위 장난감 같은 핵폭탄으로 불장난하지 말고 우리도 폐기할테니 똑 같이 폐기하자'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왜 안 됩니까? 핵확산의 피해당사국이 자위적, 평화적, 합법적 목적의 핵개발을 하겠다는데 누가 막는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이 미국의 반대와 방해를 무릅쓰고 어떻게 핵개발을 했는지 아래의 글을 읽으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 프랑스의 핵협력

  어느 나라든 핵무기 개발은 국가 지도부의 장기간에 걸친 계획과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직후부터 핵개발을 추진했다. 건국의 아버지 '벤 구리온'이 직접 핵개발을 지도했고 당시 서른 살에 국방부 국장이던 '시몬 페레스'(현 대통령)가 실무를 주도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핵개발을 지원해줄 나라는 프랑스뿐이라고 생각했다. 미국과 소련은 이스라엘에 무기 판매를 금지한 상태였다. 건국 직후 무기를 팔던 체코는 이집트의 나세르가 정권을 잡고 친소정책으로 전환하자 이스라엘의 숙적인 이집트에 무기를 팔기 시작했다.

  1956년 10월 말 프랑스 수상(기 모레)과 국방장관 이스라엘의 총리(벤 구리온)와 국방장관(모세 다얀)이 파리 근교에서 비밀리에 만나 영국과 프랑스가 관리하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을 상대로 3국(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공동작전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이스라엘이 먼저 이집트를 공격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이 비밀회담에서 또 다른 역사적 합의가 있었다. 프랑스가 이스라엘의 네게브 사막 '디모나'에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을 지어주고 우라늄을 공급해주기로 한 것이다.

  영불(英佛)과 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은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개입하는 바람에 전투에선 이기고 외교에서 지는 결과가 되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점령지를 내놓고 철수해야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핵무장한 소련이 위협해 오는데 핵무기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당한 그 때의 일을 잊지 않았다.

 프랑스 4공화국 시절의 국가 지도부는 2차대전 중 반(反)나치 저항운동 즉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나치의 대학살을 딛고 건국한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동정적이었다. 더구나 프랑스도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상태였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핵시설(원자로, 재처리, 폭탄 설계소)로 기술자를 파견했다.

수십 명의 이스라엘 과학자들이 프랑스 과학자들과 같이 핵개발, 특히 핵폭탄 설계에 참여했다. 이스라엘 핵개발의 실무 책임자 페레스는 급한 문제가 생기면 프랑스 각의가 열리는 의회에 가서 프랑스 수상을 중간에 불러내 “회의에서 이 사안을 꼭 의결해 달라”고 부탁했고 수상은 그 때마다 흔쾌히 승낙할 정도였다.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협력관계는 전면적인 것이었다. 프랑스는 미라주 전투기 등 재래식 무기도 이스라엘에 팔았다. 두 나라의 과학자, 군인, 관료, 정치인들이 서로 협력관계를 맺었다. 1958년 알제리 독립문제로 프랑스가 혼란에 빠지자 군부와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의해 정계에 복귀하여 총리가 된 드골(개헌 후 대통령)은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상호 유착이 너무 심한 데 놀랐다.

드골은 원자력 담당 장관 장 자크 수스텔을 불러 협력중지 명령을 내렸다. 수스텔은 친이스라엘 성향의 인물이었고 의회에 독자적인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드골의 지시를 무시했다.

 

  미국의 덮어주기

  이스라엘의 비밀 핵개발을 도운 것은 프랑스와 미국내의 유대인들이며 이를 알고도 덮어준 것은 역대 미국 정부였다. 이스라엘은 핵개발을 비밀로 하기 위해 개발에 들어가는 자금은 국가예산 항목에 넣지 않았다. 미국의 유대계 부자들이 모금해 개발자금을 댔다.

  1957년 말 미국의 U-2 정찰기는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서 건설 중인 수상한 시설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핵개발이 진행중이라고 판단한 CIA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는 이 보고를 묵살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백악관의 참모들도 친이스라엘 성향이 강해 비밀 핵개발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1960년 2월13일 프랑스령(領)인 알제리의 사하라 사막 지하에서 프랑스 최초의 지하 핵실험이 있었다. TNT 환산 6만5000t의 폭발력을 보였다. 대성공이었다. 핵전문가들은 이날의 핵실험으로 두 나라, 즉 프랑스는 물론 이스라엘도 사실상 핵무장국이 되었다고 말한다. 프랑스의 핵기술을 이스라엘이 공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핵실험 없이 핵폭탄을 만든 것은 1966년으로 추정된다.

  프랑스의 1차 핵실험 직후 드골 대통령은 친이스라엘 성향의 원자력 장관을 밀어내고 이스라엘과의 협력관계를 정리하라는 확고한 지시를 내렸다.

  1960년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 총리는 파리로 가서 드골과 담판했다. '구국의 영웅''건국의 아버지'는 만나자마자 서로 통했다. 프랑스는 정부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핵개발에서 손을 떼지만 프랑스 기업은 기존 계약에 따라 협력을 계속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프랑스 회사들은 디모나 핵시설을 다 지어주고 떠날 수 있었다.

  드골이 이스라엘에 대한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을 최종적으로 금지시킨 것은 1967년 6월 전쟁 직후였다. 드골은 전쟁 직전 “어느 쪽이든 먼저 공격하는 나라를 응징하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닉슨 후보가 민주당 케네디 후보에게 아주 작은 표차로 패했다. 그리고 정권 교체 작업이 진행 중이던 12월18일 미국의 원자력위원회 '존 매콘' 의장은 뉴욕 타임스 기자에게 이스라엘의 비밀 핵개발 정보를 흘렸다. 존 매콘은 아이젠하워 정부의 이스라엘 감싸기에 분노하고 있었다.

  벤 구리온 총리는 1960년 12월 21일 의회 연설을 통해 처음으로 디모나 원자로 건설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평화적 목적의 사업이고 이스라엘 전문가들이 주도한 공사라고 거짓말을 했다. 아이젠하워 팀은 케네디의 정권 인수팀에 정보를 넘기고 떠나면서 디모나 원자로가 곧 플루토늄 생산을 시작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핵확산 금지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스라엘 문제를 심각하게 취급하기 시작했다.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61년 5월 벤 구리온 이스라엘 총리가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이스라엘은 담수화 사업과 값싼 전력을 얻기 위해 디모나 원자로를 짓고 있다는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케네디 정부는 벤 구리온의 방미 직전에 조사관 두 사람을 디모나 시설에 보냈다. 그 중 한 사람인 라비 교수는 이스라엘의 와이즈만 과학 연구소 이사였다. 와이즈만 연구소는 이스라엘 핵개발 기술자들을 양성한 곳이다.

  두 사람은 이스라엘측이 엉뚱한 설비와 구조를 보여주는 것을 믿고(혹은 믿는 척하고) “핵무기 개발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댈러스에서 암살된 사건은 이스라엘로선 일종의 횡재였다. 후임 존슨 대통령은 유대계 인사들로부터 많은 정치자금을 거둔 이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핵개발에 눈을 감았다. 1963년 12월 드디어 디모나의 원자로가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원자로의 원료인 우라늄 원광을 프랑스로부터 수입하다가 나중엔 아르헨티나와 남아프리카에서 ‘옐로케이크'(원자로용으로 정제된 우라늄)를 사들였다. 1965년 이스라엘은 미국의 유대계 기업인 잘만 샤피로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원자로에서 나오는 물질의 처리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90kg의 농축우라늄을 빼돌려 이스라엘에 보냈다. 우라늄 핵폭탄 10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런데도 샤피로는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존슨 행정부 시절 주 이스라엘 대사 바부르는 대통령에게 이런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라. 그들을 만족시켜 주라.”

 

  1968년 벨기에 브뤼셀의 한 창고에 수백 톤의 우라늄 원광이 쌓여 있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회사로 위장하여 이를 수입하기로 했다. 원광을 실은 터키 화물선은 안트워프 항구를 떠나 공해로 나온 뒤 이스라엘 배에 그 원광을 옮겨 실었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와 공동연구를 한 경험이 있어 지하 핵실험을 하지 않고 핵폭탄을 제조했다. 1966년 가을에 네게브 사막 지하에서 핵폭탄 모형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 전문가들은 이때 이미 이스라엘은 수소폭탄과 중성자탄을 개발하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1967년 6월 전쟁 때는 이스라엘이 두 개 정도의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나세르가 6일 전쟁을 시작한 데는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핵무장을 하기 전에 끝장내야 한다는 강박심리가 작용했다. 그러나 6일 전쟁은 이스라엘 전투기가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추어 이집트 공군기지를 기습하여 300대가 넘는 전투기를 활주로와 격납고에서 파괴함으로써 사실상 30분 만에 끝났다.

 

  미국 - 이스라엘 '핵묵인' 비밀협정

  존슨 대통령에 이은 닉슨 대통령도 친이스라엘 노선이었다. 1969년 9월 '골다 메이어' 수상이 미국을 방문하여 닉슨과 회담했다. 메이어 수상은 25대의 팬텀기, 80대의 스카이호크 전투기, 그리고 2억 달러의 저리 차관을 요청했다. 닉슨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런 평을 했다.

  <메이어 여사는 극단적인 강고함과 극단적인 친밀감을 동시에 표현할 줄 알았다. 이스라엘의 생존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굉장히 강고한 태도를 보였다.>

  이 회담에서 두 나라는 비밀협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 공식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91년 이스라엘 언론에 의해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졌고 당시 닉슨의 안보보좌관이던 키신저의 메모가 비밀해제로 공개된 적이 있다. 비밀협약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공개적 선언이나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의 보유를 알리지 않으면 미국은 이스라엘의 핵 사업(Nuclear Program)을 묵인하고 보호할 것이다”로 되어 있다.

  작년 7월 6일 오바마 대통령은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한 직후, “이스라엘은 독특한 안보상의 필요성에 따라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해 안보상의 이익을 저해하는 어떤 조치도 취하도록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고 발표했다. 이는 1969년의 비밀협약이 유효함을 에둘러서 표현한 것이다.

  메이어 - 닉슨 비밀협약에 따라 이스라엘은 핵보유를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고 핵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켜야 했다. 플루토늄으로 만든 핵폭탄은 정밀한 내폭장치를 필요로 하므로 핵실험이 꼭 필요하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와 공동으로 핵폭탄을 설계하고 실험한 셈이므로 이 단계는 필요하지 않았다. 농축우라늄으로 만드는 핵폭탄은 분리된 우라늄을 임계질량 이상으로 합치기만 하면 터지게 설계되어 있어 별도의 핵실험이 필요하지 않다. 지금 북한이 이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수소폭탄과 중성자탄은 핵실험이 필요하다. 1973년 10월의 제4차 중동전쟁 때 혼이 난 이스라엘은 적의 기갑부대를 공격하는 데 적합한 중성자탄 개발에 착수했으므로 핵실험장이 꼭 필요했다. 여기서 남아프리카가 떠올랐다.

 

  이스라엘 - 남아공의 핵 커넥션

  1974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골다 메이어 수상이 물러나고 라빈이 수상으로 페레스가 국방장관이 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페레스는 '프렌치 커넥션'으로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성사시킨 사람이다. 그는 국방장관이 되자 남아공에 눈을 돌렸다. 남아공은 인종분리 정책 때문에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국내에선 흑인들의 무장 반란이 일어나고 이웃나라에선 친소 세력이 등장하여 쿠바와 북한군을 불러들였다. 국내외로 불안이 증폭되자 남아공 정부는 체제유지를 위해 핵무장을 결심하게 된다. 작은 나라가 핵무장을 하는 동기 중에 가장 큰 것이 체제유지에 대한 강박관념이다. 남아공은 우라늄 매장량이 많다. 농축우라늄 방식에 의한 핵폭탄 개발에 착수한 것이다.

  1974년 페레스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남아공의 존 볼스터 수상을 비밀리에 만났다. 여기서 핵개발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그 내용은 공개된 건 없으나 이스라엘은 핵무기 관련 기술을 포함한 군사기술과 장비를, 남아공은 우라늄 원광과 핵실험 장소를 제공하기로 합의했을 것이다. 1974년 여름 두 나라는 수교하고 대사를 교환했다.

  이스라엘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얻은 교훈에서 중성자탄 개발을 전략 목표로 설정했다. 이스라엘은 기습을 당할 경우 '자국 영토에서 핵폭탄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럴 경우에 중성자탄을 쓰면 적의 탱크부대 같은 집단 목표에 중점적인 타격을 주고 다른 시설물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

  1976년 소련은 남아공의 핵개발 계획을 탐지하고 미국에 대해 공동으로 발린다바의 농축우라늄 시설을 공습하자고 제의했다가 거절당했다. 1978년 1월 발린다바 시설은 무기용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79년 9월 22일 지구를 돌고 있던 미국의 인공위성 벨라는 남아프리카 남단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2000km 떨어진 프린스 에드워드 섬 근처에서 일어난 폭발 장면을 촬영했다. 이스라엘과 파키스탄 및 북한 등의 비밀 핵개발을 다룬 <핵특급(Nuclear Express)>의 공동 저자 댄 스틸만은 뉴멕시코의 로스앨러모스 핵폭탄 연구소 기술정보 담당 국장이었다. 1979년 어느 날 그는 다른 일로 CIA의 원자력 국장 잉글레이 박사를 만났다.

  박사는 광선 분석 자료를 내놓으면서 스틸만의 의견을 구했다. 평생 핵실험 자료를 접했던 스틸만은 즉석에서 “대기권 핵실험의 흔적이다. 틀림없다”고 대답했다. 잉글레이 박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라”고 했다. 스틸만은 “핵실험 이외의 가능성은 없다”고 확인했다.

  미국 정부는 9월 22일의 폭발이 핵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한번도 공식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이를 인정할 경우 미국은 이스라엘에 제재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그럴 배짱이 없었다. 그처럼 진실은 정책을 위해 희생되었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덮어주기 위해 여러 번 정부 차원의 거짓말을 해야 했고 법 집행을 유보했다. 안보상의 국익이 도덕과 법에 우선한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이 컨테이너에 넣은(음파 교란 목적) 작은 중성자탄을 바지선에 실어 폭파시켰다고 본다. 태풍이 부는 시기를 골라 터트린 것은 방사능이 바다로 쓸려나가 사라지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디모나 핵시설에서 일했던 기술자 바누누는 1986년에 한 폭로에서 1984년부터 이스라엘은 중성자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남아공 정부는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아 1983년부터 우라늄 방식의 핵폭탄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름이 60cm, 길이가 180cm인 폭탄의 무게는 약 1t이었다. 이 핵폭탄은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개발한 중거리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었다. 1989년까지 남아공은 약 400kg의 농축 우라늄과 여섯 개의 우라늄 폭탄을 제조했다.

  그러나 남아공을 둘러싼 정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냉전 종식, 앙골라에 배치되었던 쿠바군의 철수, 인종분리 정책의 재검토, 만델라와 정권 이양 협의 등. 1989년 남아공 백인주민은 클레르크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핵시설 및 폭탄의 해체를 명령하고 1990년에 옥중의 만델라를 석방했다. 백인정부가 핵무장 폐기를 결심한 것은 만델라가 영도할 흑인정부에 핵폭탄을 넘기기 싫었기 때문이란 해석도 있다.

  클레르크는 1993년 3월 24일 국회에서 한 보고를 통해 핵개발에 약 4억 달러가 들었다고 했다. 그는 어떤 외국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 - 이스라엘 - 남아공 커넥션이 끝났다. 남아공은 일단 핵무장을 했던 나라가 국내외의 정세 변화에 적응, 핵을 포기한 유일한 사례이다.

 

  이란 핵 과학자 암살

  이스라엘은 자신의 핵무기는 포기하지 않으면서 중동 이슬람 국가가 핵무기를 갖는 것은 반드시 저지한다는 전략도 확고하다.

  연평도 도발로 동북아 정세가 긴장되어 있을 때인 지난해 11월 29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선 연쇄 암살 시도가 있었다. 핵물리학자인 '마지드 샤리아리'는 부인과 경호원을 태운 푸조 승용차를 몰고 출근 길 정체가 심한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이때 오토바이 한 대가 옆에 오더니 푸조 문에 무엇인가를 붙이고 사라졌다. 직후 차는 폭파되었다. 샤리아리는 즉사하고 다른 탑승자들은 중상을 입었다.

  몇 분이 지난 테헤란의 주택가에 또 다른 핵물리학자인 '아바시 다바니'가 탄 차 옆에 오토바이가 따라붙었다. 다바니는 이란 혁명수비대 소속으로서 유엔 안보리의 대 이란 제재결의문에 ‘핵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관계하는 인물’이라고 특정된 사람이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차체에 무엇인가를 붙이는 것을 본 다바니는 차를 세우고 타고 있던 부인을 끌어내렸다. 그 직후 차가 폭발했다. 다바니는 목숨을 건졌다.

  작년 1월엔 핵개발에 종사하는 이란 과학자 '마수드 알리 모하마디'가 같은 방법으로 암살됐다. 이스라엘이 일련의 암살작전에 관련됐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에게만 보복을 하는 게 아니다. 적국의 핵, 미사일, 신형 대포 등 신무기 개발에 종사하는 과학자에 대해서도 국적을 묻지 않고 암살을 해온 경력이 있다.

  1980년 6월 이스라엘의 해외정보기관 모사드의 암살팀은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에 협조하는 이집트인 핵전문가 '예히아 엘 마샤드'를 파리의 한 호텔에서 발견했다. 발견 당시 암살팀은 총기를 갖지 않았다. 그들은 마샤드가 투숙한 방으로 들어가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옆방에 있던 창녀도 경찰에게 자신이 들은 소란에 대해 증언한 직후 뺑소니로 위장한 교통사고로 살해되었다.

  1980년대, 후세인의 이라크 정권은 캐나다 출생으로 벨기에서 활동하던 기술자 '제럴드 불'과 ‘수퍼 건’ 제작 계약을 맺었다. 사정거리가 수천 km나 되고 핵폭탄을 쏠 수 있는 대포를 만든다는 구상이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이 대포 제작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1990년 3월 모사드의 암살단이 벨기에 브뤼셀의 한 아파트 문을 노크했다. 제럴드가 문을 열자 다섯 발을 쏴 죽였다. 그들은 제럴드의 시신 사진을 찍어 대포제작에 관계하는 유럽 기술자들에게 이런 글과 함께 보냈다.

  <비슷한 운명을 맞지 않으려면 내일부터 일하러 가지 말라.>

 

  이스라엘은 북한정권을 이란의 핵 및 미사일 개발을 지원하는 적으로 간주한다. 북의 핵 및 미사일 개발에 종사하는 요인들도 모사드의 암살 리스트에 올라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암살과 보복의 경력이 화려하지만 민주국가이다.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가 매년 발표하는 국가별 자유도 랭킹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나라’로 분류된다. 민주주의는 정치에 적용되는 원칙이지 국방과 안보를 민주적으로 할 순 없다. 국가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안보 전선에선 자위의 원칙이 가장 유효하다.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은 대가로 미국 정부로부터 매년 30억 달러이 무상원조를 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핵무장을 하지 않았다면 평화협정은 맺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평화협정은 이스라엘의 자신감과 이집트의 무력감이 결합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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