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열정적인 국가관, 연구에 대한 욕심, 더 배우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던 마흔 둘, 국방분야의 선진관리
실태를 연구하기 위해 미국에 갔다가 오늘 길이었다. 창가 쪽으로 나 있는 세 개의 좌석, 공교롭게도 내 양쪽에
두 여인이 앉아 있었고, 복도 쪽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발랄한 여인이 앉았다. 발랄한 여인이 스스럼 없이
내게 말을 건냈다.
"아저씨는 무어 하시는 분이라예?"
"저요? 그냥 오파상에요."
"장사꾼 같지는 않은 데예?"
"그래요? 그럼 뭐 하는 사람 같이 보이세요?"
미국에서 사는 이야기, 한국에서 부모와 일가들이 사는 이야기 등으로 한동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두 여인
모두 생각이 리버럴하고 막힌 데가 없었다. 시간이 가면서 창가에 앉은 30대 후반의 여인이 아프기 시작했다.
에어컨 때문인지 계속 코를 풀며 추워했다.
코가 주체 없이 흘러나오자 민망스러워 했다. 식사 때 확보한 두꺼운 냅킨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스튜어디스를 불러 사정을 말하고 냅킨을 많이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제는 한기가 든다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스튜어디스를 또 불러 담요를 여러 장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재미 있던 대화는 끊기고 괴로워 하는 환자에게
신경이 집중되었다. 그 여인은 더 이상 앉아 있는 것이 괴로운 모양이었다.
"누우세요. 우리들 무릎 위로 다리를 올리세요."
발랄한 여성이 그 여인에게 편하게 발을 뻗으라고 제안했다.
"체면이 말이 아니지만 그래야겠어요. 용서하세요."
나는 담요 한 장을 내 무릎 위에 깔았다. 그 위에 그녀가 다리를 얹고 눕자, 다른 담요들을 합쳐 두껍게 그녀를
덮어 주었다. 그녀의 다리가 자꾸만 밑으로 흘러 내렸다. 나는 밑에 깔린 담요 자락을 두 손으로 움켜 잡아
그녀의 다리가 더 이상 흘러 내리지 않게 했다. 그녀는 편안해 하면서 깊은 잠에 빠젔다.
어느 듯 비행기는 동경에 도착했다. 그녀가 황급히 일어나 가방을 챙기더니 출구를 향해 뛰듯이 달려나갔다.
정신이 없어선지 아니면 민망해서 그랬는지, 우리에게 고맙다 잘 가라는 인사도 없었다. 트랩을 내려 가려던
그녀가 갑자기 돌아서 오더니 명함 한 장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잡아 채듯이 가지고 나갔다.
"고마웠어요. 잘 가세요."
나는 서울에 오자마자 설악산에서 열리는 경영학회 세미나에 며칠간 갔다. 그 사이에 사무실로 전화가 몇 번
온 모양이었다. 설악산에서 돌아와 사무실에 출근은 했지만,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전방과 국방부를 부지런히
다녔다. 사무실 여비서가
"어느 여성분의 전화가 여러 번 왔었는데 오늘도 왔었습니다."
"그래? 내가 피한다고 오해할지 모르니, 다음에 전화 오면 내가 전화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남겨달라고 해."
어느 날 전화번호가 남겨져 있었다.
"여기 언니 집이에요. 제가 서울 스케줄이 매우 바빠요. 오늘 저녁 같이 식사할 시간 있으세요?"
미8군 영내 장교클럽, 희미한 불빛에 마주 앉아 와인을 곁들여 식사를 했다. 처음 갖는 식사 기회였지만 두
사람은 금방 친숙해졌다.
"이게 오파상 명함이야?"
기내에서 받았던 명함을 던지며 눈을 흘겼다. 그녀는 미국 어느 직장의 중견 간부였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그녀는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 하면서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우리 나갈래?"
"나가서 뭐 하게?"
"산보"
"그래"
나와 두 살 차이였다. 장교클럽 마당 한쪽 코너에는 고목의 은행나무가 있었다. 밑에서 올려 비친 불빛을 받은
나뭇잎들이 황금색 발광체처럼 아름다웠다. 나무 위에서 불빛을 내려 비추면 나뭇잎이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밑에서 위로 조명을 쏘아주면, 나뭇잎들이 발광체로 변해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
소리는 작게 냈지만 그녀는 신나해 하는 동작으로 노래를 몇 곡 불렀다. 스스로 자랑했던 그대로 그녀는 마치
가수 같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멋있고 근사한지에 대해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았다. 며칠 후
북악산 팔각정에 올랐다.
당시 포니 차를 몰고 올라가는데, 진지 보초근무 교대를 위해 투입되는 병사들이 차를 세우며 태워 달라고 했다.
태웠다가 내려 주기를 두어 번, 그녀는 내게 눈을 하얗게 흘겼다.
"데이트 하러 가는 거야, 자선사업 하러가는 거야."
그리고 며칠 후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무 바빠 시간을 더 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곧 공항으로 나가는
길이라고 했다.
"내가 공항에 나갈까?
"아냐, 공항에 아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미국에 오면 꼭 연락하는 거 알지?"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오후 3시, 연구소 창가에 섰다. 샛노란 낙엽이 가을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갑자기 허공에 떠 있는 그림자처럼 보였다. 갑자기 가슴 속이 텅비어지고
있었다. 노란 단풍이 우거진 8군 영내 은행나무 아래서, 그녀가 나지막하게 부르던 노래들이 환청으로 다가왔다.
내 뺨에 살포시 대주던 그녀의 뺨에서 뿜어내던 서늘함이 가슴을 더욱 시리게 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연구생활,
변화에 저항하는 보수세력에 대한 도전과 다툼 속에서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또 창가에
섰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미국에서 온 크리스마스 카드가 놓여 있었다.
반가워야 할 그 크리스마스 카드가 쓸쓸해 보였다.
가을이 되면 찾아드는 낭만의 병, 우수(Melancholy)! 열아홉, 스무살 때에는 스치는 바람결과 흔들리는 풀잎에서
우수를 느꼈다. 그리고 그 우수는 마흔 두 번째 가을에 한 번 더 찾아 왔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