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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닌 학교는 미해군성이 재단을 운영하여, 석사와 박사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1907년에 설립한 대학원으로
Naval Postgraduate School 이라고 불린다. 미국은 해군의 나라이다. 해군으로 출발했고, 지금도 해군이 가장
많은 예산을 사용하고 있으며, 해군으로 인해 전 세계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다.
미국만이 가지고 있는 Power Projection Force, 즉 군사력의 투사능력을 가진 것은 바로 이 해군력 때문이다.
해군은 해저, 해상, 공중을 모두 이용하기 때문에 세계의 군사과학을 선도하고 있다. 특히 원자력 공학, 기상
공학, 전자공학, 시스템공학 등에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신출귀몰하던 독일 잠수함 Uㅡ보트를 잡은 것은, 역전의 용사도 아니고 명장도 아닌 젊은
수학자들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수학으로 전쟁을 하고, 수학으로 무기를 만들며, 수학으로 군수(軍需)를 한다.
이 모두를 위한 응용수학(Operations Research)이 이 학교의 명물로 인정받아 왔다.
당시 한국의 육군 장교들 중에는 이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해군 장교들 중에는 더러 있었다.
내가 대위로 합참에 근무하던 1974년이었다. 미해군대학원 경영학 석사과정에 한 사람을 선발하는데, 응시할
장교를 파악하여 보고하라는 공문이 왔다.
나는 생전 처음 듣는 그 학교에 대해 알아보기 위하여 그 학교를 나온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수소문 끝에
해군사관학교 출신인 소령을 만났다. 나보다 2년 먼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
겁부터 주었다.
"나는 진해 해군사관학교에서 교수로 있다가 갔는데도 혼이 났는데, 당신은 책을 놓은 지 9년만에 가지 않느냐?
욕심만 가지고 갔다가는 실패하기 쉽다. 그 학교는 매우 엄격해서 중도에 탈락하는 사람들이 많다."
겁이 나긴 했지만 가고 안 가고에 대한 결심은 나중에 하더라도, 우선은 기회를 놓지지 말고 시험부터 쳐놓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시험이라야 영어시험 한가지 뿐이었다. 한국에서의 경쟁은 토플과 비슷한 ECL(English
Comprehension Level) 테스트 성적에 의해 판가름이 났고, 최종적인 입학허가서는 미 해군대학원이 육군사관
학교 성적과 영어를 고려하여 발부한다고 했다.
영어 공부만큼은 월남 전쟁터에서나 전방에서나 틈틈이 해두었기 때문에 나는 100점 만점에 97점을 맞았다.
당시까지는 군 최고의 기록이었다. 아마도 내가 TV나 보면서 어영부영 저녁시간을 보냈더라면 갑자기 나타난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차점을 받은 장교는 해군사관학교 출신의 해병 중령이었는데 82점이었다. 국방부 인사과에는 그의 친구인 해군
중령이 인사장교로 있었다. 그 인사장교가 나를 부르더니 해병중령에게 기회를 양보하라고 했다. 내 경쟁자인
해병중령은 그동안 미국에 여러 번 단기 코스를 다녀왔기 때문에 졸업에 성공할 수 있지만, 나는 9년 동안이나
공부와 담을 쌓아 성공할 수 없다고 겁도 주었다.
오기가 발동한 나는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비위가 상한 인사장교는 자기가 인사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해병중령을 반드시 보낼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중령이라고 대위를 얕본 것이다.
마침 그때 국방부에는 주월한국군사령부에서 나를 이뻐해주던 대령참모가 장군이 되어 총무과장을 하고 있었고
월남에서 내 직속상관이었던 포병사령관도 장군이 되어 국방장관 보좌관으로 있었다. 두 분 모두 국방부에서
끗발도 있고 발언권도 있음은 물론이다.
이 분들은 매우 바쁜 분들이라 나는 문제의 요지를 편지지에 적어 그 분들 보좌관을 통해 전했다. 그러자 바로
그 다음 날, 인사과장인 육군대령이 양쪽 장군 방에 따로따로 불려가 야단을 맞았고, 인사장교인 해군중령은
즉각 해군으로 원대복귀됐다.
그후 여러 해 뒤에 내가 그 미해군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오자, 그 해군 인사장교는 간접적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해 주면서, 당시 자기가 매우 미안한 일을 했다고 솔직하게 사과했다.
그 학교를 먼저 나왔다는 해군소령은 회계학이 제일 어려웠다고 했다. 그래서 고생을 덜 하려면 회계학만큼은
꼭 미리 공부를 많이 해 가라고 조언했다. 나는 당시 한국에서 제일 권위 있다는 서울대학교 이용준 교수가 쓴
공업부기와 상업부기 책을 사서 독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용어가 상식과 조율되지 않았고, 기본 개념이 잘 설명돼 있지 않아 이리저리 궁리를 해야 했다. 참으로
헷갈리고 머리 아프게 쓴 책들이었다. 결국은 이해가 되지도 않는 그 책들을 가지고 미국으로 갔다. 입학을
하자마자 하버드대학교의 안토니 교수가 쓴 회계학원론(Fundamental Financial Accounting)이 교과서로 채택
되었다.
영어로 돼 있지만 그 원서는 매우 쉽고 논리적으로 쓰여 있어서 혼자서 공부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서울대 이용준 교수가 쓴 부기 책에 소개된 간접비 배분방식은, 케케묵은 일본 책을 번역해 놓은 것이어서
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학문적 이론은 없고 절차만 소개돼 있어서 개념을 파악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안토니 교수 원서에는 간접비
배분방식에 기초수학이 응용돼 있어 이해하기가 아주 쉬웠다. 한국에서 제일 권위 있다는 책을 결국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나의 마음은 쓸쓸하고 우울했다.
"제대로 된 교과서 하나 없는 한국 학생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우리의 수많은 학생들이 공부에 취미를 잃는 것은 결국 교과서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 책을 가지고는
독학과 예습 능력을 기를 수 없게 돼 있다. 그 때문에 초등학교 교과서일수록 최고의 석학이 실명제로 정성껏
집필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지금의 초.중등학교 교과서들을 읽어보면, 균형감이 없고 요령부득으로 써 있어서 나도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학생들이 과외를 하는 게 아닌가? 교과서와 참고서들이 내용이 다양하고 훌륭하다면
학생들은 그것을 가지고 충분히 독학도 할 수 있고 예습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내용을 여러 저자들의 시각으로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은, 사고방식을 다양화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다.
또한 학생들은 각자 인지구조에 따라 저자들에 대한 선호도를 형성할 수 있다.
첫째, 공부는 창조력을 기르는 과정이어야지 기존의 지식을 암기하는 과정이어선 안 된다.
둘째, 독학은 사고력과 상상력을 길러 주는 데 가장 좋은 학습과정이다. 그렇게 때문에 독학을 가능하게 하는
교과서와 참고서의 질은 그 사회의 창의력을 좌우한다.
예습은 복습보다 훨씬 효과적인 학습방법이다. 예습을 하면 상상력이 길러지지만 복슴을 하면 암기하게 된다.
예습을 하면 교수의 말이 100% 들리지만, 예습을 하지 않고 강의를 듣게 되면 한 시간 내내 불안하다. 그래서
교과서는 예습이 가능하도록 아주 정교하게 써야 한다.
나는 사관학교 때, 경제학에 취미를 잃었다. 유학 당시 한국에는 사무엘슨 경제학원론이 두껍게 번역돼 있었다.
그 책을 미국에 가져가 읽어보니 도무지 요령부득이었다. 번역이 엉망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 책으로
예습을 하니까 경제학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한 시간에 몇 번씩 던져지는 교수의 질문에 부지런히 대답할 수 있었다. 특히 미시 경제학은 수학이
전부였다. 그런 미시 경제학을 회계학과 연결시켜 가면서 소화하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는 안경에도 있었다. 미국에 가기 전에 갑자기 눈이 아프기 시작하여 알아보니 난시 때문
이었다. 서울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안과에 가서 안경을 맞춰 썼더니 쓰는 순간부터 어지러웠다. 다음 날 다시
가서 어지럽다고 했더니 의사가 화부터 냈다.
"일주일 정도 참고 써 보라니까요? 그럼 어지럼 증이 사라질 테니까."
나는 다른 두 곳의 안과를 찾아갔다. 그런데 찾아 가는 곳마다 처방이 달랐다. 다시 맞춘 안경도 어지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이렇게 만든 안경 3개를 가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먼저 미 육군병원의 안과를 찾아 갔다.
의사가 3개의 안경을 검사해 보더니 화를 내며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당신의 안경이 아닙니다." (None of these is yours)
그 의사가 맞춰준 안경을 쓰자마자 세상이 달라져 보일 만큼 시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30년 이상 쓰고 있다.
1979년 내가 박사과정으로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세 분의 한국군 장군들이 단기 과정을 위해 나의 모교를
찾았다. 그분들 역시 한국에서 맞춘 안경들에 불만을 늘어놓았다. 내가 주선하여 그 분들을 그 병원 안과로
안내했다.
"야, 이거, 이렇게 시원하게 잘 보일 수가 있어? 세상이 달라 보이네?"
그러면서 그분들은 한동안 내게 무척 고마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