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부대의 정문인 위병소, 여기가 불친절하면 부대 이미지가 상한다. 외부인이 전화를 걸 때, 교환병이 상냥하지
않거나 전화 연결을 끝까지 살펴주지 않아도 나쁜 이미지를 준다. 야전화장실, 취사장, 식당이 불결해도 역시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 3가지를 위해 많은 훈련을 시켰다. 부대 밖에 나갔을 때, 나는 신분을 감추고 가끔씩 포대에
전화를 걸어 교환병의 친절도를 점검했다. 아무리 규모가 작은 야전부대라 해도 근본적인 위생 시스템과 폐수
처리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파리와 악취가 퍼진다.
맑은 물 속을 들여다 보는 것을 꽃을 보는 것보다 더 좋아 했던 나는 더러운 것이 참으로 싫었다. 내가 월남
전쟁터에까지 위생과 폐수에 신경을 쓴 것은, 월남의 마을 주변을 오염시키기 싫어서가 아니라 단지 부대의
청결과 병사들 위생을 위한 것이었다.
부대 한 구석에서 냄새나는 물이 흘러나가고, 거기에 파리와 모기 떼가 서식하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취사장과 샤워장 바닥의 구석에 오물이 끼어 있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나는 물 한 통만 버리면 자동적으로
씻겨 청소가 될 수 있도록 바닥을 경사지게 했고, 오물이 끼지 않게 반들반들 닦게 했다.
여기에서 배출되는 하수는 파이프를 통해 지하에 묻은 콘크리트 탱크로 들어갔다. 그 탱크 바닥에는 침전물이
가라 앉고 고여 있는 물은 다른 파이프로 철조망 밖으로 흘러나갔다. 그리고 가끔 탱크 뚜껑을 열고 침전물을
파 내어 폐유로 태워 없앴다.
그리고 철조망 밖으로 흘러보내는 곳과 그 주변을 소독했는데, 부대 주변은 우리가 노력한 대로 늘 깨끗했고
파리와 모기는 물론 냄새도 일체 나지 않았다. 야전생활에서 냄새 없는 깨끗한 화장실을 갖는다는 것은 얼른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된다. 화장실 건물 전체를 '깨끗하게 다듬어진 나무' 판으로
지었다. 포탄을 포장했던 판자였다. 용변시의 발디딤 바닥은 지면에서 1m 높이에 설치했고, 올라가는 계단도
나무로 만들었다. 발판 밑 1m 높이의 공간에는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만든 변기통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변기통 내부에는 남아도는 비닐을 덮어 씌워 변기통을 깨끗하게 유지했다. 변을 본 병사들은 하얀
분말의 DDT를 변기통에 뿌리도록 했다. DDT가 뿌려진 변기통에 파리 떼가 앉을 리 없다. 하사관들은 DDT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다른 부대들에게서 얻어와 언제나 넉넉하게 쌓아둔 채 사용하고 있었다.
저녁 때면 갈고리로 변기통을 끌어내 폐유를 부어 소각했다. 그러면 희한하게도 남는 재가 극히 미량이었다.
옥외 화장실 바로 옆에는 별도로 소변기를 만들었다. 구덩이를 깊게 판 후 바다모래를 가져다 부었고 그 위에
소변기를 설치하여 배수가 잘 되도록 했다.
사관학교 시절의 '최후의 한방울론' 은 당연히 적용되었다. 그리고 대변 전에 반드시 먼저 소변을 보도록 했다.
변기통에 쌓인 변은 사방으로 통하는 바람에 자연 건조되어 냄새가 거의 없었다. 이처럼 한번 깨끗하게 유지한
야전화장실은 언제나 깨끗하게 유지됐다.
한번은 포병사령관이 내려와 위생시설과 내무반 환경을 둘러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나더러 이 다음에 서울
시장을 하라는 농담까지 했다. 그후부터 사령관은 각 포대로 부임해 가는 대위들에게 나의 포대를 견학하고
오라며 3일간 견학기간을 주었다. 사관학교 3년 선배 한 분은 한국에 돌아와 그때의 일을 이렇게 고백했다.
"야, 강 대위, 사실 나는 그때 후배가 지휘하는 부대로 견학하러 간다는 게 좀 뭐해서 다른 동기생 부대에 가
싫컷 놀고선, 사령관한테는 많이 배우고 왔다 하고 소문대로 아주 멋지더라고 너를 무지 칭찬했지. 허허."
전쟁터에서 포병과 보병과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6.25 때는 보병이 포병 지원을 얻으려고 관측장교에게
닭고기를 바쳤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었다. 그때는 포탄이 부족했고 그래서 끗발 있는 관측장교 아니면 포탄을
지원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월남전에서는 달랐다. 통상 보병장교들은 포병장교들을 포를 쏘는 일종의 기능인, 자신들 명령에 따라
포탄을 날리는 하수인쯤으로 생각했다. 그 때문에 포병장교들 비위를 거스르는 보병 지휘관들이 왕왕 있었다.
하지만 포병은 보병들이 생각할 수 없는 대포병전을 수행한다.
거기에는 보병이 알 수 없는 지혜와 전술이 필요하다. 흔히 고객을 왕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대부분의 고객들은
눈이 먼 왕이다.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고객들이 필요로 하는 상품을 먼저 만들어 내 놓으면 그 때서야 비로서
살까 말까를 결정하고, 또 좋다 나쁘다를 평가한다. 보병도 그처럼 눈 먼 왕에 불과했다. 포병전술로 갖가지
지원 상품을 개발해 주어야 눈먼 왕은 비로소 뭐가 좋은 지 알고 선택했다.
"그거 참 좋소. 제발 그것 좀 해 주시오."
유능한 포병지휘관이라면 다른 병과들의 도움을 받아 내는데 영리해야 한다. 보병, 전차, 헬기, 통신, 공병 등
다른 병과 장교들의 도움은 물론, 공군과 해군의 능력까지도 잘 얻어내는 지휘관이 유능한 지휘관이다. 전쟁은
제한된 시간 내에 다얀한 장비들을 결정적인 공간에 집중시키는 전장의 경영이다.
경영이란 수많은 타인들의 능력을 활용하여 목적을 달성하는 기술을 말한다. 따라서 전장의 경영자인 지휘관은
전문 특과들의 기능을 존중해 주고 수많은 타인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마음으로부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도움들을 시간 계획에 따라 스케쥴링 하는 것이 바로 디지털 시대의 작전계획인 것이다.
보병의 주 무기는 소총이다. 군에서 보병이 왕이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나폴레옹시대에나 유행했던 옛 노래에
불과하다. 보병들은 이 순간에도 이런 시대착오적인 쇼비니즘에 깊이 빠저 있다. 포병과 항공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다. 그들은 그들대로의 능력이 있다. 하지만 보병 장교들은 우쭐한 기분에 취해 있었다.
"어이, 포병, 이리 좀 와봐. 여기, 여기, 여기를 때려, 알았어?"
지휘봉이나 지시봉 같은 걸로 지도를 가리키며 이렇게 주문했다. 보병 장교들의 거친 메너에 포병 장교들은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저항했다.
"이 보시오. 포병에도 전략과 전술이 있고, 포탄의 전략적 배분이란 게 있어요. 우리가 보병들 종인 줄 압니까?"
"포병은 쏘라면 쏘면 되지 무슨 잔 말이 많아?"
보병과 포병간의 알력은 대개 이런 것이었다. 내가 29세 나이에 포대장으로 부임하니까 바로 이웃에 있는 보병
대대 상황실과 포대 상황실 사이에는 이런 기 싸움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나는 처음 며칠 밤을 보병 상황실에
올라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을 지도에서 직접 파악하고 포병 지원방법을 스스로 창안하여
"이렇게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제안을 한 것이다. 보병 작전장교는 나보다 사관학교 2년 선배였는데 이런 나의 지원방법을 매우 반겼다.
"아, 그렇게도 해 줄 수 있어요? 고맙습니다. 부탁합니다."
며칠을 이렇게 하다 보니 보병대대 상황에 대하여 일정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일일이 보병
상황실에 가지 않아도 그들로부터 상황만 전달받으면 지원 방법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나의 적극적인 지원
방법에 대해 중령인 보병 대대장이 극찬했다.
"여보, 브라보 포병 강 대위 있지 않소? 아 그 친구 대단해. 싹싹하고! 밤마다 우리 상황실에 오잖아. 어쩌면
그리 가려운 곳을 잘 긁어 주는지."
포병 대대장에게는 '자식 하나 잘 두었다'는 식의 칭찬이었다. 어슴푸레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각 중대장들이
중대원들을 이끌고 매복작전을 나갔다. 검정 칠을 하고 나가는 그들의 얼굴은 언제나 무거워 보였다. 상부에선
A지점으로 나가라 하지만, 그곳이 기분 나쁜 곳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융통성 있는 중대장들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여기서 죽어야 하느냐며 B지점으로 나갔다. 또한 이들은
상부의 작전장교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예하 지휘관과 의논 한번 해 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작전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B지점으로 매복을 나가는데, 만일 포대장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상부에서 공식적으로 내려오는
작전상황만 전달 받으면 포병은 B지점에 부대가 없는 줄 알고, 포를 날려 아군을 살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보병 중대장들은 작전 출동을 하면서 길목에 있는 내게 들려 눈을 찡긋 했다.
"나 B지점으로 나갑니다."
어느 날 나의 포 진지에서 날아간 포탄이 밀림 속에서 작전을 하고 있던 아군 보병을 강타했는데 하필이면
제12중대의 4개 소대장이 모두 부상을 당했고, 4명의 분대장이 중상을 입었다. 무전기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관학교 2년 후배인 중위가 뛰어와 다급하게 외쳤다.
"포대장님, 우리 포가 보병을 때린 모양입니다. 부상을 많이 당했다고 합니다. 포 사격을 중지시켰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사격지휘 망루에 올라가 소리쳤다.
"전원 동작 그만! 현재 서있는 위치에서 한 발작도 움직이지 말라. 선임하사와 포반장들은 내 앞에 집합하라.
155m 포반장들도 집합하라."
모든 병사들을 현 위치에서 동결시킨 것은, 실수를 저지른 포반 요원들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 은근슬쩍 증거를
인멸할 것에 대비한 조치였다. 간부진 5명을 뽑아 1번포로부터 방향포경이라는 조준경의 눈금을 일제히 점검
하도록 했다. 그 결과 내 책임 하에 있는 6문의 105m 포들은 전혀 이상이 없었다.
사고를 일으킨 포는 나의 진지에 파견되어 독자적으로 포를 운영하고 있는 155m 포반에 있었다. 정비를 한 후에
조준경의 영점을 제대로 맞춰놓지 않고 편각을 장입한 것이 화근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45도 동쪽으로 지향
해야 할 포구가 65도 동남쪽으로 지향한 것이다.
마치 체중계 바늘을 0에 맞추지 않고 30kg에 맞추어 놓은 후에 몸무계를 재면, 70kg의 사람이 100kg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전광석화 같은 조사로 내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 그후 내가 스스로 생각해 봐도
그런 순발력이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155m 파견반을 맡고 있던 중위와 하사관들이 자기들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졸지에 귀한 부하들을 헬기에
태워 병원으로 후송 보낸 중대장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며칠 후 작전이 끝나자 그는 내게 와 울화를 터뜨렸다.
"다른 포대장이었다면 총으로 쏴버렸을 겁니다. 당신의 순수해 보이는 얼굴이 당신을 살린 겁니다."
그 중대장은 그 후 2성 장군으로 예편했고, 사건 후 33년 만에 우연히 만나 술잔을 나누기도 했다. 60이 넘은
나이에 다시 만나 소주잔을 주고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희상했다.
"포대장을 총으로 쏴버릴려고 했었지만, 막상 포대장 얼굴을 보니 선하고 착하게 보여 오히려 정이 가더군요."
월남전에서 나는 산포(山砲)에 대한 개념을 터득하는 기회를 가지게 됐다. 대형 헬기로 포를 산봉우리에 날라
놓고 산에서 직접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포를 날리는 전술이다. 나는 도봉산, 삼각산 등에 올라 서울 북방에
전개된 평야를 볼 때마다 산포를 생각하곤 했다.
포를 산정과 능선에 배치하면 얼마나 좋을까에 대해서다. 평야를 가득 메우며 전진하는 대규모 적군을 장기간
고착시키는 데는 산포가 최고라고 생각되었다. 곡사포는 적을 직접 볼 수 없는 먼 곳, 산 뒤에 있는 것이다.
105m 포만 해도 사정거리가 15km나 되기 때문에 전선에서 통상 10km내외 거리에 위치한다.
포진지와 적군 사이에는 산들이 있다. 그래서 포병진지에서는 적의 움직임을 직접 볼 수 없다. 곡사포를 쏘려면
적과 마주하고 있는 포병 관측장교의 눈을 빌려야 한다. 보병 중대장과 함께 행동하는 관측장교가 적의 위치를
지도에 표정해서 후방에 있는 포진지에 알려주면, 포진지의 계산조가 포를 좌우상하 각도와 화약의 양을 계산
하여 포반 병사들에게 사격제원을 알려준다.
그런 다음에 포반 병사들은 포구를 돌리고 포탄을 꺼내고, 신관을 연결하고, 화약을 집어넣고 방아쇠를 당긴다.
그래서 반응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산 위에서 쌍안경을 가지고 평야를 내려다보며 포를 쏘면
마치 소총으로 직접 목표물을 쏘는 것처럼 빠르게 된다.
적이 들어 차 있는 평야에 바둑판식으로 금을 그어 정사각형 정점에 포를 한 발씩 날린다면 온 천지에 콩을
볶는 듯한 공포감을 주게 된다. 이는 내가 포대장을 하며 적의 박격포 공격을 퇴치했던 '포에 의한 심리전' 의
성공 사례이기도 하다.
이렇게 바둑판 네귀퉁이마다 포를 날리면 평야에 널려진 적군은 전후좌우 어느 곳으로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포병 사격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다. 이때 전투기와 무장헬기 등의 공습이 이어지면
대량살상을 꾀할 수 있다.
월남에서는 보병의 작전지역이 포병기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포 자체를 작전지역으로 수송해야 할
때가 많았으며, 모든 포를 나를 수는 없기 때문에 통상 보병대대 규모 작전에는 2문의 포를 산봉우리로 공수할
때가 많았다. 헬기에 의한 포병의 공중기동작전인 것이다.
이는 월남전 특징 중의 하나였다. 내가 주로 직접 지원하는 보병은 제2대대였지만, 나의 상관인 포병 대대장은
제1대대와 제3대대가 작전을 나갈 때도 나에게 부탁했다. 다른 포대에 맡기려 해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되도록 많은 경험을 쌓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쾌히 복종했다.
"예, 대대장님. 알겠습니다. 걱정마십시오."
나는 보병 제2대대장과는 늘 친숙하지만 다른 대대장들은 안면조차 없었다. 그런 보병 대대장을 작전지역에서
처음으로 만나면 분위기가 서먹서먹했다. 파월된지 얼마 안 되는 보병 제1대대장은 덩치 큰 포가 대대본부와
같이 배치된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 했다.
소리를 내는 포 때문에 대대본부가 베트공의 표적이 된다는 것이었다. 작전을 숨어서 하려는 소극적인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상부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보병 대대본부와 2문의 포가 산봉우리에 함께 진을 쳤다.
나는 그 2문의 포를 지휘하려고 산정으로 간 것이다.
낮에는 기세등등하던 대대장이 밤이 되자 매우 초조해 했다. 낮에는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던 계곡이 밤이 되자
시커먼 지옥처럼 보였다. 그 밑에서 마치 베트공 대부대가 검은 옷을 입고 떼지어 올라올 것만 같은 환영이
계속 떠오르는 것이다.
"대대장님, 기분이 좀 어떠십니까?"
"뭐 좀 그렇습니다만...."
"포 소리를 좀 내 드릴까요? 그러면 좀 안정이 되실 겁니다."
"한번 해 봅시다."
기분 나쁘게 부각되어 오는 시커먼 계곡에 대고 2문의 포가 포문을 열었다. 신관에 0.3초를 장입하고 이른바
'영거리 사격' 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쾅" 소리를 내며 포탄이 포구를 떠나자마자 200m쯤 날아가 정글 위에서
째지는 소리를 내며 작렬했다.
연속적으로 작렬하는 위력적인 소리에 잔뜩 움츠렸던 가슴들이 활짝 펴졌다. 겁에 질려있던 보병들이 활개를
치고 나와 손뼉을 쳤다. 이게 바로 포의 위력이었다. 전쟁터에서 적막은 간을 오그라들게 한다. 어떤 소대장은
매복을 나가 히스테리를 일으키면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아군의 비밀이 보장돼야 할 작전지역 장소에서 소대장이 소리를 지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중사는 다수의 안전을 위해 그 소대장을 처치할 생각까지 했었다고 했다.
나의 병사들은 그 어느 포대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내가 하려는 일을 편하게 해 주었다.
처음엔 그토록 거칠었던 병사들이 불과 2~3개월 지나면서 양처럼 순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직속 상관인 포병
대대장은 내 병사들을 공작용 재료 같다고 표현했다.
내가 땅에 원을 그리든 네모를 그리든, 일단 그림만 그려놓으면 병사들이 나머지 빈 속을 채워 준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끌던 120명의 부하들, 그들만 가지면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었다. 나이 든 노 상사는 처음에 나를 애송이
취급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내가 나타나면 멀리 있다가도 무거운 철모를 쓰고 땀 흘리며 뛰어와 경례했다.
조그만 부대이긴 했지만 나는 어느덧 카리스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귀국에 앞서 이임식에서 나는 이임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내가 단상에 올라서자마자 병사들이 울먹였기 때문이었다. 나무판으로 만든 1m 높이의
단(壇) 앞면에는
"하면 된다."
검은 글씨로 크게 새겨저 있었다.
"이제 귀국해 돌아가면 나도 남들처럼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겠지!"
오직 이 하나의 소망을 간직한 채, 매일매일 달력에 X표를 긋기를 42개월.....
한국 나이 27세부터 30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꽃다운 청춘을 나는 이렇게 월남 전쟁터에서 보냈다.
※ 옮긴이 해설
박정희 대통령이 왜 무엇 때문에, 또는 무엇을 위해 파병을 결정했는지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었다.
미국이 6.25 때 우리를 지켜 주기 위해, 6만에 가까운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20여 만명이 부상당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동맹국에 대한 의리와 의무를 말하는 이들이 많았으며
군사쿠테타로 집권하여 미국에게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주장도 있었고
시급한 경제개발 정책에 미국의 원조가 필수인 상황에서 그 해결을 위해 먼저 파병을 제의했다는 주장
미국이 한국군 현대화 조건으로 먼저 파병을 요구했고 그에 응한 것이라는 그와 반대되는 설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로서 자유민주국가 수호를 위해 공산국들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
그리고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실전경험이고 그래서 파병했다는 설도 있었다.
나는 바로 그 주장이 다른 무엇보다 제일 설득력 있다는 입장이다.
물론 다른 주장들도 모두 일 리 있고, 아마 그 당시 박 대통령에게는 매우 유익하고 꼭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인민군에 비교하여 현저하게 열세였던 국군의 화력이 제일 시급한 문제 아니었을까.
그때(63년 처음 파병 검토시)는 6.25 전쟁이 중단된지 겨우 10년인 싯점이기 때문이다.
파병한 후부터 국내외의 매스컴들이 세계 최고의 용맹무쌍한 한국군이라며 연일 승전보를 도배하는 과정에서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김일성이 참전을 통해 연마하고 있는 한국군을 크게 걱정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병사들이 매일 실전처럼 훈련을 하더라도, 실제로 전쟁에 참전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훈련은 없기 때문이다.
월남전에서 3년 반이나 포병생활을 한 강 대위의 실전 경험이 말 하듯이, 아무리 혹독한 훈련과 훌륭한 교육도
정작 실제의 전쟁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지휘관의 실전 경험이 수많은
병사들의 생명과 승전과 패전을 좌우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이글 저자는, 오늘의 우리 군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군사 전문가 입장에서 걱정을 매우 많이
하고 있다. 고위 군지휘관들 대부분이 평소 실력 연마는 게을리 하면서 골프나 술자리만 좋아하고 계급장만
자랑하고 싶어 한다며 가혹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 말미 에필로그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내가 이 글을 이곳에 옮기는 목적은 다름 아니다.
주인공 강 대위의 월남전 생활은 이제 끝났다. 그는 국내 주요기관들에서 주요 업무를 하다가 결국 대령으로
강제 예편하게 되고, 미국방성 지인의 도움으로 미해군대학원 교수로 3년간 근무하게 된다.
내용 중에 사관학교 선배 또는 후배를 말하면서 그가 2성, 3성으로, 더러는 4성으로 예편했다고 미리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군 고위 지휘관들의 실력을 말하는 것임을 유의하라는 뜻인 듯 하다. 즉 그다지 탁월한
지휘능력도 없는 자들이 높은 고위직까지 승승장구하는 우리 군의 현실을 은근히 개탄하는 것이다.
강 대위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이제 독자들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출중한 창의력과 부단한 탐구
정신, 그리고 그것을 현장에 접목하여 살아 있는 실체로 만들어 가는 도전 정신은, 옛날은 물론 오늘의 우리
군에게도 꼭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이다' 생각하면 과감하게 실천하는 두둑한 뱃장 역시 꼭 취할 점이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기에 대략 이 정도로 하고. 앞으로는 그의 군생활 후반기 이야기가 전개된다.
물론 그는 이제까지 그랬듯이 초지일관 자신의 소신을 한 시도 버리지 않으며 그 때문에 시련 또한 계속된다.
내가 이 글을 옮기면서 제목을 '오늘도 내리는 비' 라고 한 것이 그 때문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