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사령부에서 내준 헬기를 타고 월남의 옛 고향인 뚜이호아로 날아갔다. 소위와 중위 시절에 22개월을 보냈던
뚜이호아! 1년 만에 다시 와보니 비록 전쟁터지만 친숙하고 반갑게 느껴졌다. 내가 맡은 제2포대는 뚜이호아
번화가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져 있는 작은 산 능선에 자리하고 있었다.
50m 정도의 능선고지였다. 능선 높은 곳에는 보병 제2대대본부가 1개 중대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낮은
곳에는 내가 지휘할 제2포대가 배치돼 있었다. '기지'(base)라고 하지만 포와 차량과 목재 더미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붉은 흙바닥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포대는 베트공이 우글거리는 '봉로만' 위에 있는 바위산 속에 요새를 구축하여 생활
하고 있었다. 집요하기 그지 없는 베트공이 자기들 소굴로 겁 없이 들어온 한국군 기지를 그냥 둘 리 없었다.
틈틈이 박격포를 쏘아댔고, 어느 날 박격포탄이 한국군 탄약고에 명중했다.
그리고 탄약고 속의 화약에 불이 붙어 쌓아두었던 포탄들이 몇 시간에 걸쳐 연쇄적으로 폭발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언제라도 베트공이 또 공격해 올 것이라는 공포 분위기가 확산돼 있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황급히 이곳으로 피난을 오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 붉은 흙바닥에 새로운 벙커 기지를 건설해야 했다. 불도저가 뾰죽한 봉우리를 평평하게 밀어 놓았다.
기둥으로 사용하기 위한 사각 목재들이 무더기 단위로 여기 저기 쌀여 있었다. 새로 이동해 온 상태라 곳곳에
텐트들이 쳐저 있었다.
포대의 동쪽에는 맑고 깨끗해 보이는 시원한 바다가, 남북으로 길게 흐르는 해안선을 따라서 전개돼 있었다.
인도지나해였다. 해안선을 따라 기나긴 백사장이 펼쳐저 있었고, 그 백사장을 따라 야자수와 관목이 어우러진
숲이 또 다른 띠를 이루어 남북으로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숲을 따라 1번 도로가 남과 북으로 뻗어 나갔다. 포대의 동쪽을 제외한 3면 모두가 검푸른 산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특히 서쪽에 펼쳐 있는 정글산은 수 백리 밀림지대로 이어지는 광대한 산맥의 한 시작이었다.
포대와 그 산 기슭까지 거리는 불과 1km, 논과 밭이 그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베트공은 산 위에서 우리 포대를 훤히 내려다보며 박격포를 쏘고 있지만, 우리는 망망대해와 같은
밀림 속의 산 어디에서 쏘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한마디로 베트공이 우리를 봐줘야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병사들은 하루 하루를 공포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낮이면 진지 공사에 땀을 흘렸고 밤이면 무거운 눈꺼풀을 치겨 올리면서 보초를 서야 했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불안하고 짜증나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기지 건설을 완료하려면 6개월 이상 걸린다고 했다. 그에 또 기후까지
병사들을 압박했다. 5개월 후면 우기가 되는 것이다.
우기에는 매일 장대비가 쏟아져 기지 건설작업이 불가능해진다. 그 때문에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닌 상황이었다.
하늘에선 6월의 뜨거운 태양이 열을 펑펑 쏟았고, 땅에선 숨이 콱콱 막히는 지열을 맹렬하게 뿜어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찜통이었고 용광로였다. 많은 병사들이 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러나 가벼운 경상자들은 부대 텐트 속에 쪼그리고 앉아 발등과 배에서 나는 진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들은
포대장이 다가가도 경례도 하지 않고 짜증스런 얼굴을 했다. 이상이 내가 제2포대장으로 부임하여 이틀 후에
둘러 본 포대 기지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 개의 건물 지붕도 마련하기도 전에 베트공의 박격포탄이 날아와 흙바닥 여기 저기에 깊은 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병사들이 잽싸게 흩어졌다가, 포격이 멈추자 목재 더미와 차량들, 그리고 포 옆에서 흙을 툭툭
털면서 일어섰다. 다행히 건설 현장 주변에만 떨어졌다. 박격포탄이 봐준 것이다.
병사들이 작업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불안한 과정이 감지됐다. 단지 그 느낌을 말한 것뿐인데 갑자기 하사가
표범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포대장님, 그렇지 않아도 짜증나 죽겠는데 이거 왜 이러십니까?"
양손을 허리에 턱 바치고 눈을 아래 위로 부라리며 마치 한 번 해보자는 투였다. 기가 막혔다. 아무리 파월된
병사들이 거칠다 하지만 이럴 수는 없었다. 나는 말없이 작업장을 떠나 포대장 천막으로 왔다. 몹씨 괘씸하여
분노가 치밀었지만 처음부터 감정을 내 세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는 거야."
입장을 바꿔보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하사는 나에게 대든 게 아니라 포대장에게 대든 것이다. 포대장이
그들의 적인 것이다. 전임 포대장이 병사들을 고압적으로 다루면서, 병사들 애로에는 냉담했다고 했다. 이런
포대장에게 병사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이상한 일 아니다.
그리고 결국 그를 참지 못한 한 병사가 술을 마시고 총기를 난사하여 3명이 죽은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 엄청난 사고로 전임 포대장이 처벌받아 조기 귀국 당했고, 바로 그 자리에 내가 부임한 것이었다.
설사 포대장이 잘 해준다고 해도 처해 있는 환경이 병사들에게는 엄청난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지 환경에서는 언제 박격포탄에 맞아 죽을지 몰랐다. 끈끈하게 무더운데다 모기까지 극성을 부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하지만 날만 새면 진지 공사라는 중노동을 해야 했다. 공사를 하다가도 사격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100m 경주를 하듯 포 있는 곳으로 달려가 포를 쏘아야 했다.
또 밤이면 모기떼와 싸우고 졸음과 싸우며 보초를 서야 했는데, 훈련이 아니라 자기 목숨은 물론 부대원 전체
목숨이 걸린 전쟁터의 적 앞에서 서는 보초이기 때문에 두렵고 무서워 심적 부담이 이만 저만 큰 게 아니었다.
게다가 똑 같이 파병돼 왔는데도 고향 친구는 군수부대에 배치돼 군수품을 팔아 한 밑천 잡았다는 소문이라도
들리면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겠는가? 짜증이 안 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대대에는 포대장 한번 해보고 싶어 하는 많은 고참 대위들이 줄 서 있었다. 그런데 임관 겨우 4년차 애송이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데 대해 몹씨 불쾌해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구경거리가 하나 생겼다면서
"애송이 풋내기가, 거친 병사들을 어떻게 이끌겠는가? 아마 한 달도 못가 쫒겨날 것이다."
오늘 내가 하사에게 받은 수모가 그들에게는 그런 좋은 구경거리였고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분수령이었다.
벌과 기합은 누구나 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전임자들과 뭔가 크게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위인전에서 읽은 나폴레옹과 한니발 그리고 예수를 생각했다.
"그들이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들은 가장 먼저 병사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나폴레옹! 그가 엘바섬에서 탈출해 나오자 왕실 병사들이 그를 잡으러 왔다. 그는 유창한 웅변으로 그 병사들의
마음을 되돌렸고 그 병사들을 데리고 나가 워털루 전투를 치렀다. 한니발은 혈혈단신 이국땅 스페인에 건너와
마을을 지날 때마다 청년들 마음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마을을 지날 때마다 병사들의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는 이방인 병사들을 이끌고 역사상
처음으로 알프스를 넘어 이태리에서 승리를 거뒀다. 예수도 생각했다.
"그분처럼 훌륭한 위인도 아무 잘못 없이 온갖 수모를 당했는데 나 같은 사람이 뭐가 잘났다고 이만한 수모에
자존심을 상해야 하는가? 예수는 무릎을 꿇고 제자들 발까지 씻겨 주지 않았는가?"
"내가 병사들에게 화를 내면 내 앞에서는 잘 하는 척 할 것이다. 하지만 돌아서면 나를 욕하고 해코지를 할
것이다. 그래서 병사들의 몸은 잡아야 소용없다. 마음을 잡아야 한다. 마음을!"
마음을 얻으려면 먼저 진실과 능력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달콤하고 번드르르한 웅변은 몇
사람 마음을 얼마간 유혹할 수는 있어도 부하들을 오래 감동시킬 수는 없다. 계급 하나로 모든 부하들이 잘
따라 준다면 이 세상에는 유능한 리더도, 훌륭한 리더도 없었을 것이다.
월남을 지원하여 파병된 많은 병사들은 어려운 집안 살림을 걱정했다. 이런 생각은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진급과 보직이 돈으로 거래되고 훈장도 돈으로 거래된 사례들이 있었다. 푼돈 때문에 병사들끼리 총질을 한
일도 있었다. 돈에 대한 충동이 있는 한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병사들에게 돈을 버리고 이역만리에서 겪는 병영생활을 추억 만들기 생활로 바꿔
보자고 설득하기로 했다. 돈보다 더 귀중한 것이 젊은 시절 추억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나는 작업
중인 병사들을 집합시켰다.
"나는 여러분들 마음을 잘 압니다. 여러분의 동료들이 군수부대 등에서 돈도 벌고 휴양지도 다니면서 시간을
재미있게 보내고 있는데, 나는 뭐냐? 매일 같이 박격포 공포에 시달리며 끝없는 진지 공사에 중노동자들처럼
일하면서 고단한 생활만 하다가 손에 쥔 것 없이 허무하게 귀국하는 거 아니냐?
아마 여러분 생각은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돌려보십시오. 어렸을 때 우리는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는 말을 배웠습니다. 안에서 얻으려면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능력을 기를 때이지
돈을 벌 때가 아닙니다. 지금 이 나이에 돈을 쉽게 얻으면 정신이 파괴됩니다.
정신이 파괴되면 장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생 내내 돈을 쉽게 버는 생각만 하다가 험하게 늙을 것입니다.
군수부대 친구들이 버는 돈은 그들을 파멸시키는 독약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원정군 자격으로 파병됐습니다.
이런 기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보물입니다.
우리의 형들에게도 동생들에게도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것입니다. 파병 기회 자체로 우리는 엄청난 것을 얻은
것입니다. 늙어서 자식들에게 인생을 회고해 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총을 들고 정정당당하게 싸웠다고
말해주고 싶습니까? 아니면 남들이 싸우고 있을 때 뒤에서 치사하게 돈을 벌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끼?
부산항을 떠날 때 가족들이 나와서 무엇을 당부하던가요? 돈을 벌어 오라고 했습니까? 손끝 하나 다치지 말고
몸 성히 다녀오라 하던가요?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습니까? 얼마 벌지도 못하고 인격만
치사해 집니다. 우리 그런 것 잊기로 합시다.
우측에 보이는 저 산에서 여러분 또래 꽃다운 우리 병사들이 목숨을 많이 잃었습니다. 몸속에서 마지막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그게 돈이었겠습니까? 지금은 추억을 쌓을 때지
돈을 벌려고 할 때가 아닙니다.
저 아름다운 바다가 눈 아래 보입니다. 끝없는 백사장이 보입니다. 야자수 잎들이 보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곳이 한국에 어디 있습니까? 여기서 찍는 사진 한 장이 백만금보다 더 귀합니다. 이 다음에 늙었을 때, 그런
사진을 어떻게 찍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사진을 찍읍시다. 그리고 재미있게 생활해 봅시다."
병사들의 눈알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복잡했던 마음이 단순하게 정리되는 듯 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몇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전투복 바지, 잘라서 입으십시오. 무릎까지도
좋고 궁둥이까지도 좋습니다. 이렇게 무더운 곳에서 치렁치렁한 바지를 왜 입습니까?"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서로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아무리 편리함을 위해서라지만 군복을 멋대로
잘라 입는 행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귀를 의심하는 얼굴들이었다.
"식사 때면 여러분은 식기를 들고 줄을 섭니다. 우리가 거지 될 일 있습니까? 식당에 노트를 비치하겠습니다. 각
분대마다 사람을 보내 노트에 시간을 예약하십시오. 다른 분대와 중복되지 않도록 기록한 후에 분대별로 가서
오붓하고 여유있게 식사를 하십시오. 한 시간에 걸쳐 잡담하며 식사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일체의 집합이 없습니다. 일조점호, 오전과 오후의 일과 개시 집합, 일석점호 모두를 생략
합니다. 집합해 있다가 박격포가 떨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기상 시간은 6시, 취침시간은 10시입니다. 나머지
시간은 분대장 인솔하에 사용하십시오.
세수를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습니다. 팬티를 입던 안 입던 자유입니다. 아침 식사를 10시에 하든 12시에 하든
분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내 얼굴로 집중됐다. 순종과 경이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분대장을 포함한 모든 간부들은 매일 밤 나와 같이 회의를 해야 합니다. 매일 무엇을 해야 하며, 일을
할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무엇이며, 사고가 날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이며, 그것을 예방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토의를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군대에서 나가야 합니다. 사회에 나가면 억울한 일들을 많이 당합니다. 어떻게 당했는지
요령있게 호소할 수 있는 능력 정도는 갖춰야 할 거 아닙니까? 매일 토의를 하면 아이디어가 좋아집니다. 하고
싶은 말을 요령있게 전달할 수 있게 되고,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능력이 향상됩니다. 내 제안은 이상입니다.
여러분, 이제까지 내가 제시한 제안들, 어떻습니까?"
"......"
"한번 해볼 만합니까?"
"예~~"
그리고 포대장에게 함부로 대들었던 그 하사는 본보기로 응분의 혹독한 벌을 받았다. 이른바 빠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