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내리는 비 [25]

2012. 2. 16. 오후 9:34:30

글자

25.

1969년 11월 29일, 장군을 따라 보잉707을 타고 사이공으로 갔다. 결혼 3개월만이었다. 주월한국군사령부는
시내에 있었다. 사령부라고 하지만 콘크리트 담장 안에 소박한 건물 몇 개 뿐이었다. 본청사만 3층 건물이고
나머지는 창고같이 생긴 1층 건물이었다. 아마도 이 건물들은 지금쯤 가난한 월맹의 점령 하에서 황폐해 있지
않을까.
 

담장을 따라 철조망이 쳐있었고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초소들에는 어깨 위로 총을 치겨든 병사들 모습이 
드믄드믄 보였다. 사령부에는 3명의 장군이 있었다. 사령관은 3성, 부사령관은 2성, 참모장은 1성이고 내가
모시고 간 장군이었다.
 

장군들의 숙소는 옛날 왕가들이 살던 대규모 저택이었고, 계급 순으로 1,2,3공관으로 불렀다. 대령들은 한때 
훌륭했던 렉스호탤을 숙소로 사용했다. 대령 이상의 지휘관들 일과는 대개 파티로 종결됐다. 미군, 월남군,
한국군, 각국 대사관 간부들, 한국에서 오는 VIP, 월남 정부 관리들이 만들어 내는 파티가 일주일 내내 계속
됐다.
 

고위급들에게 월남의 밤은 파티의 밤이고 때로는 향락의 밤이었다. 그런 국제파티는 보기에 화려해도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고역이었다. 월남 장교들은 오랜 프랑스 문화권에서 지낸 탓인지 대부분 유창하게
영어를 사용했고 서양식 매너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 장교들은 그렇지 못했다. 훗날 국방연구원을 떠나 미국에 갔을 때도, 내가 파티에서 본 한국군
장교들의 매너와 사교적 센스는, 일반적으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동,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온 장교들
보다 도 뛰떨어져 보였다.
 

국방연구원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한동안 먹고 잘 곳이 없을 때, 내게 호의를 배풀어 준 미국 할머니가 있었다.
그분이 외국 장교들을 저택으로 초청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다른 나라 장군들은 알아서 텃밭에 나가 상치와
당근 같은 걸 뜯어오고, 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샐러드 등을 만들면서, "또 무엇을 할까요?" 묻기도 하면서 
설거지와 청소까지 알아서 했다.
 

하지만 한국 장교들은 소파에 앉아 자기들끼리 고국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외국에 나왔으면 외국을
배우고 외국인들과 어울릴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배움과 외교의 길이다. 그런데 특히 한국 외교관들은 몸만
외국에 나와 있었다. 내가 미국에서 본 외교관들은 교민들과 어울려 골프와 술자리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시 월남으로 가 보자. 매일 흥청거리는 파티 문화권에서도 긴장과 불안감은 늘 가슴속 깊이 깔려 있었다.
1969년 구정을 기해 베트공과 월맹 정규군이 합세하여 총공격을 했다. 이른바 '구정공세'였다. 물론 사이공도
맹공격을 당했다.
 

얼마나 크게 혼이 났던지 일부 한국군 장교들은 그때부터 신경안정제를 복용해야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했다.
화려한 사이공 거리였지만 곳곳에서 테러가 자행됐다. 음식점 밖에 주차한 짚차 밑에 부착된 시한폭탄이 터져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주월한국군사령부에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정문에서 한참 멈춰 차 밑에 시한폭탄이 없는지 검사를 받았다.
헌병이 긴 막대기에 거울을 달아 차량 밑을 여기저기 비춰보는 원시적인 검사였다.
 

한국에서는 전속부관도 일과가 끝나면 퇴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월남에서는 24시간 장군과 함께 행동했다.
장군 침실은 2층에 있고, 전속부관은 아래층 홀 귀퉁이에 마련된 조그만 대기실이 침실이었다. 거기서 전화를
받고 장군이 부르면 "예" 하고 2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통상 12시가 넘어야 잠 잘 수 있었고, 후덥지근해서 늘 에어컨을 켜고 잤다. 문도 없이 앞과 뒤가 훤히 뚫린
대기실에서! 장군들 중에 제일 바쁜 사람은 내가 모시고 있는 참모장이었다. 그분은 매우 건강했지만 업무량이
과중한데다 웬만해선 눕지 않는 성격이라 피로를 무리하게 참다가 안면신경이 마비된 일도 있었다.
 

고국에서 사령부에 오는 귀빈들이 많아 40분 거리에 있는 탄소누트 공항을 매일 3번씩이나 왕복해야만 했고
손님을 서운치 않게 하기 위해 공식파티는 물론 은밀한 접대 파티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그리고 선물을 마련
하는 일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국에서 갑자기 귀한 손님이 급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 방문한다는 연락이 왔다. 사령관이
새벽 2시에 참모장에게 갑자기 지시를 내렸고, 참모장은 한참 곤하게 자고 있는 대령 참모들을 급히 깨워서
소집해야 했다. 그런데 대령들의 차가 수송부에 있어 차와 운전병을 불러 참모들을 태워오게 하려면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참모장은
 

"강 대위, 운전병을 대령 숙소로 보내 참모 5명을 모두 데려와. 빨리."
 

하지만 이 급한 상황에서 참모장 운전병이 어디를 갔는지 없었다. 아마도 사령부 밖으로 시내 구경 나간 게
틀림없었다. 실로 난감했다.
 

"죄송합니다. 운전병이 없습니다."
 

이렇게 사실대로 보고했다가는 불벼락이 떨어질 상황인 것이다. 나는 당번병에게 5명의 참모 명단을 주면서
빨리 전화하여 차가 도착하면 즉시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 달라 하라고 지시해 놓고 차고로 달려갔다.
미제 시보레이 세단 8기통, 기어를 넣어 전진과 후진 요령을 숙지한 다음 인적이 끊어진 사이공 거리에 있는
대령 숙소인 호탤로 갔다.
 

영감 같이 나이 많은 대령 참모들이 눈을 비비며 차에 탔다. 그리고 그들은 사령관 공관에 도착해서야 정신이
들고 잠이 깨었는지
 

"어? 자네 강 대위 아닌가? 강 대위, 자네 운전까지 하나? 허허허."
 

소위 시절에는 야외훈련이 참으로 많았다. 무료한 낮 시간에 나는 포차 운전병을 꼬셔 운전을 배웠다. 양평
시내를 거쳐 꼬불꼬불한 도로를 운전하여 용문산까지 달리기도 했다. 좁은 다리를 건널 때가 제일 무서웠고
아슬아슬하여 진 땀이 나기도 했다.
 

내가 운전하는 동안에는 선임탑승자가 앉는 옆자리에 병사가 내 모자를 쓰고 앉았다. 모자를 바꿔 쓴 것이다.
그리고 헌병차를 만나 헌병이 경례를 하면 운전병이 받았다.
 

"야, 경례를 의젓하게 받아야 해. 이상하게 받으면 걸리는 수 있어."
 

운전병은 헌병에게 경례를 받으며 기분 좋아 했다. 그 후 월남에서 중위 시절 미군부대와 월남군 연락장교로
있으면서 찦차를 직접 몰고 다녔다. 그리고 출발과 정지, 기어를 변속할 때 컵에 담긴 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부드럽게 운전하는 연습도 많이 했다.
 

이렇게 배운 운전 실력 덕분에 그날 밤 상사들 몰래 시내에 나가 밤을 새운 운전병과 그를 단속하지 못했다는  
참모장의 불호령을 면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군에서는 장교들에게 운전을 금지하고 있었다.
 

가끔씩 장군들이 만나 2층 장군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장군들이 2층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전속부관들도
아래층 나의 작은 대기실에서 자연스레 전속부관 모임이 되었다. 자기가 모시는 장군 흉을 보기도 했고, 좋은
점을 크게 칭찬하기도 했다. 또 새로운 뉴스를 떠들며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전속부관들이 차고 타니던 권총은 서부극에 나오는 큼직한 6연발 리벌버였다. 그러나 장군들 권총은 각양각색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작은 모양의 사치품이었다. 보석으로 아름답게 치장된 것도 있었다. 장군들이 2층으로
올라가면서 전속부관에게 맡긴 권총들은 한동안 부관들의 장난감이 됐다.
 

서로 바꿔 구경을 했는데 권총의 6개 약실에는 오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한 개의 약실을 항상 비워두었다.
실수로 방아쇠를 당겨도 약실에 총알이 없으면 안전하기 때문이다. 약실은 시계방향으로 돌아간다. 내가 그날
처음 만져본 권총은 매우 작았다. 방아쇠를 격발해도 총알이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나는 대기실 천장을
향해 격발을 해봤다.
 

"탕!"
 

앗! 이게 웬일인가? 뜻밖에 총알이 발사된 것이다. 그 순간 식은 땀이 흘렀다. 물론 전속부관이 총알 장전을
잘못한 것이다. 콘크리트 건물이라 소리는 2파 3파의 에코 현상까지 더해져 엄청나게 증폭됐다. 나는 천정을  
향해 격발한 것을 신에게 감사했다.
 

2층에 있던 장군들이 모두 뛰어나와 반질반질한 고급나무로 돼있는 가이던스를 잡고 마치 제비들처럼 나란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참모장이
 

"야! 뭐야?"
 

눈 앞이 캄캄했다. 오발이었다고 하면 총알을 잘못 장전한 그 전속부관이 야단 맞을 게 뻔했다. 
 

"예,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일단 2층을 향해 이렇게 소리부터 질러놓고 장군이 보이는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머리를
굴렸다.
 

"벽에 세워 둔 탁구대가 홀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놀라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래? 놀랬다. 야."
 

이 실수를 통해 나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었고, 이는 몇 달 후부터 시작된 포대장 근무 때 아주 요긴하게
적용됐다. 포대장 시절, 병사들에게 하루에도 열 번씩 귀가 따갑도록 반복했고 몸에 배게 습관화시켰다.
 

"격발을 할 때는 총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하늘을 향해 경건하게 하라."
 


장군은 강아지를 아주 좋아 했다. 누군가가 '치와와' 한 쌍을 선사했다. 난 그렇게 작은 강아지는 처음이었다.
장군은 암컷을 '미미' 수컷은 '끼끼'라고 이름 지었다. 아무리 늦게 퇴근해도, 당변병은 미미와 끼끼를 안고
장군 방에 들어갔다. 강아지와 노는 것이 낙인 듯 했다.
 

이렇게 아끼는 강아지에게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사령부 사무실에 있는데 공관에서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왔다. 얼마 전 공관에는 중사 계급의 참모장 처남이 와 있었다. 그 중사가 찦을 후진하다가
하필이면 재롱이 철철 넘치는 미미를 치어 죽게 했다.
 

아무리 처남이지만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평소에 친척 티를 제법 내는 녀석이었는데 원체 큰 일을 저지른
때문인지 푹 풀이 죽어 있었다.
 

"부관님, 죄송합니다. 저 좀 살려 주십시오."
 

나는 공관 인력을 총동원해서 온 장안을 뒤져서라도 미미와 똑 같은 놈을 구해놓으라고 했다. 누군가 한 놈을
구하긴 했지만 미미보다 뚱뚱하고 애교도 없었다. 병사들이 온종일 "미미야, 미미야, 이리 와." 하면서 훈련을
시켰지만 낯선 개는 계속 딴전만 부렸다.
 

다음 날 다시 시장에 나가 미미처럼 날씬한 놈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당변병이 장군 방에
끼끼만 대리고 갔다. 그리고 내가 그만큼 일러 두었는데도, 장군이 "야, 미미는 왜 없냐?" 물으니까 순진한
당번병은 얼굴이 빨개지며 머뭇거렸다. 당번병이 못미더워 내가 따라 들어간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녀석이 갑자기 설사를 해서 강아지 병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장군은 5일간 매일 미미의 안부를 물었지만, 중사는 더 이상 날씬한 암컷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그 새로운 강아지가 미미라는 이름에 꼬리를 흔들고 사람에게 덤비기 시작했다. 그 제서야 당변병이
두 마리를 데리고 장군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얼른 보아도 미미 대치품은 뚱뚱하고 재롱이 시원치 않았다.
장군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 개, 잘못 찾아온 거 아냐?"
 

당번병의 얼굴이 또 빨개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미미'라고 부르면 꼬리를 치면서 덤빈다는 사실이었다.
 

"그 녀석이 병원에 좀 있었더니 살이 찌고 좀 둔해진 것 같습니다."
 

어쨌던 위기는 간신히 모면했지만 참으로 기막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우리의 어머니 상이 떠 올랐다. 무섭고
엄격한 남편과 사는 어머니들이 왜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안에 큰 소리 나지 않게 하려고 
이리 묻고 저리 묻는 어머니 상이 바로 지금의 내 모습 아닌가 하면서 거짓말로 인한 죄책감을 스스로 자위
했다. 물론 전에 월남어 통역을 거짓으로 한 것도,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번 일과 같은 맥락이었다. 
 

대통령들에게 '가신(家臣)'이 문제된 시절이 있었다. 그 때마다 그 '친척 중사'가 생각났었다. 처음엔 30여 명
정도 병사들이 모두 '타인' 들로 구성됐었다. 그때는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장군들을 모셨다. 그런데 그 친척
중사가 공관에 오면서부터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깨졌다.
 

중사는 친척 티를 냈고, 그로 인해 공관 병사들은 두 파로 갈라졌다. 중사에게 잘 보이려는 파와, '눈꼴시다'는
파로 나누어진 것이다. 나는 장군을 수행해 다니느라 전화로 원격통제를 했는데 밤 늦게 공관에 들어가면 왠지
분위기가 냉냉함을 알 수 있었다.
 

그때까지 장군을 '나의 장군'이라고 생각했던 병사들이 '그래, 네 놈의 장군이다' 하는 식으로 마음이 떠난
것이다. 장군에 대한 충성도 떠났고, 공관 살림도 "내 살림이냐. 네 살림이냐' 하는 식으로 주인 없는 살림이
돼 버렸다.
 

이렇게 되자 재미있던 월남생활이 귀국 날짜만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겉으로는 좋은 말을 하고 
웃어 주지만 속으로는 무슨 일이든 잘 안 돼서 일이 터지기를 은근히 바랬다. 이런 사례는 국가에도 적용된다.
대통령 가신들과 친척들이 설치면 설칠수록 장관들과 고위 공직자들은 대통령에게서 마음이 떠난다.
 

그리고 국가는 '장군의 공관' 처럼 빈집이 돼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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