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파병기간 1년 중에서 나는 10개월 동안 그야말로 강도 높은 고생을 했다. 다른 포병 소위들이 한 개 중대를
지원할 때, 나는 2개 중대, 그것도 전투 강도와 빈도가 가장 높은 수색중대와 기동타격중대를 동시에 지원한
것이다.
수색중대가 작전을 나가면 수색중대에 투입됐고, 제3중대가 작전에 나가면 3중대에 투입됐다. 이는 좀 과한
조치였다. 그게 안쓰러웠던지 포병 대대장은 나를 뽑아내어 사단 사령부 월남어 교육대로 보냈다. 월남어를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귀국을 연장시키기 위한 일종의 보상수단이었다.
월남어 교육은 참으로 재미있었다. 우리말처럼 높낮이가 없는 그런 말이 아니라 노래하듯이 말해야 의사가
통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음치는 배우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월남 말 중에는 중국말도 매우 많이 들어있다.
총통(總統)이라고 써 놓고 '똥~통~' 이라고 곡선을 넣어 발음한다.
우리말처럼 편편하게 발음하면 알아듣지 못한다. 5성으로 작곡된 음을 내야만 소통이 되었다. 내가 월남어를
배우는 요령은 좀 특이했다. 대개의 학생들은 책 내용을 무작정 외웠지만 나는 내용에 상응하는 현실 장면을
상상해가면서 외웠다.
책 내용을 외우며 장면들을 연상하기 때문에 다이얼로그(대화) 한 줄 한 줄마다 영화의 한 장면이 생기는 셈
이었다. 책이 없어도 장면들을 연상해가면서 다이얼로그를 복습할 수 있기 때문에 걸으면서 대본 없이 외울
수 있었고, 눈을 감고 누워서도 외울 수 있었다.
동료들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할 때마다 거절하지 않고 따라갔다. 영화라고 해봐야 옛날 활동사진 시대처럼
운동장 한가운데 영사기와 야전용 스크린을 차려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보는 것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다이얼로그(dialogue)를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니까, 실제생활과 비슷한 상황에 접할 때마다 저절로 외국어가
튀어 나왔다.
이는 영어를 배울 때도 적용했다. 영어 책 내용만 달달 외운 사람들은 미국에 가서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적절한 말이 잘 나오지 않아 고생한다. 책 내용과 가상 장면과 연결시키는 방법은 특히 수학공부를 할 때도
적용됐다. 나는 모든 수학공식 및 이론을 배울 때마다 현실 세계를 가상했다.
수학을 현실과 매치시키는 것이다. 현실 세계를 연상하지 않고 시험에 급급해 하면서의 공식과 이론은 아무런
응용력이나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수학을 공부한 사람은 많다. 많은 이들은 수학을 딱딱한 공식으로 생각
한다. 하지만 나는 수학 세계를 현실 세계로 통역하는 능력을 길렀다.
이런 연상법 때문에 나는 사관학교 때, 영어와 수학은 늘 1~2등을 차지했다. 훗날 응용수학 계열의 박사과정
에서 세상에 없는 새로운 수학정리(theorem)를 6개나 만들어 냈고, 복잡한 군수문제를 푸는 알고리즘도 만들어
냈다. 알고리즘이란 논리적 명령대로만 따라서 하면, 고등학교 출신도 실무에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명령서 묶음을 의미한다.
내가 만든 알고리즘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
"제한된 예산 범위 내에서 장비의 가동도(availability)를 극대화시키려면 1번 부품 몇 개, 2번 부품 몇 개,
3번 부품 몇 개, ....17번 부품 몇 개를 구매해야 하는가?"
이처럼 복잡한 문제를 푸는 요령이었고, 그 무렵 미 해군이 그 때까지 풀지 못해 골치를 앓고 있었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미 해군 소령 한 사람이 후에 석사 논문을 썼는데, 논문 주제가 내가
만든 알고리즘을 이용해서 도출해낸 수리부속 구매 세트와, 기존에 미 해군에서 편법으로 사용해온 모델(당시
400만 달러 프로젝트)을 이용하여 구매한 수리부속 세트를 비교하여, 기존 모델이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나를 가르친 교수들도 내가 이 공식을 만들어 낸 과정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오직 결과에만 승복했다. 이
분야의 수학인들은 내가 만든 수학 작품에 나의 이니셜인 kang을 붙여 인용하고 있다.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한 인스턴트식 학습은 손끝 기술에 불과할 뿐, 생각하는 방법을 길러주지 못한다.
내가 연상법을 터득하게 된 것은 어릴 때의 고학 덕분이었다. 하나의 진리를 터득하려면 엄청난 궁리를 해야
했다. 이해하지 못할수록 더 궁리가 많았다. 나만의 독특한 그림을 그려가며 궁리의 폭을 넓힌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다닌 미국 학교에서 나는 응용력의 천재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것도 37~39세의 만학에! 내 이름은 지금도
그 학교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희자되고 있다고 한다.
다시 월남으로 돌아가서... 3개월 과정을 마친 후 나는 1등을 했다.동료 장교들은 내가 영화를 보러 다니고
맥주도 마시러 다니고, 공부벌래처럼 굴지도 않았는데 1등을 했다며 머리가 아주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길을 가면서, 식사를 하면서 속으로 영화장면을 생각하면서 대사를 외웠다.
이는 연상법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머리는 오히려 다른 장교들이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월남어 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나는 중위로 진급했다. 대대장이 정찰기에 대위를 태워 보내 내게 중위 계급장을 달아주도록
했다. 단지 중위 계급장을 달아주기 위해 정찰기를 보낸 것이다.
이것을 보고 다른 부대 장교들이 부러워했다. 졸업 후에 나는 월남어를 전혀 쓰지 않았는데 대대의 사격지휘
장교로 보직받아 상황실에 투입됐다. 다른 부대에서는 대위 두 사람이 교대하며 근무하는 자리를 나는 혼자서
지켰다. 대대장은 핵심만을 간추린 나의 요약보고를 매우 좋아했다.
상황실에는 매일 수많은 첩보가 입수됐다. 첩보의 신뢰성에 따라 A급부터 D급까지 분류되었고, 접수된 순서로
두꺼운 첩보일지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한 달이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200쪽이 넘는 책이 되었고, 하루에도
7~8쪽이나 되는 첩보내용을 부대 지휘관들이 일일이 다 읽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상황실 선임하사가 중요하다고 표시해주는 첩보만 대강 훑어봤다. 그러면서
"음, 그렇구먼. 이 지역이 늘 말썽이군."
일단 날짜가 지나면 모든 내용들이 두꺼운 첩보철 속에 묻히고 만다. 하루 이전의 첩보 내용, 열흘 이전의
첩보 내용을 다시 들춰 읽는 사람은 없다. 자료는 많지만 모두가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보석의 원석이 땅 속에 방치돼 있듯이! 그런데도 사람들은
"저 첩보일지 속에는 모든 첩보가 다 들어 있다."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첩보를 즉시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가공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는 중사에게 똑 같은 지도판을 3개 만들라고 했다. 그 중사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급한 상황에서도 항상
여유가 있어 보였다.
"중위님, 상황판을 3개씩이나 만들어 무얼 하시게요?"
"나도 몰라, 일단 한 번 만들어 봐."
"합, 옛~써~ 즉각 대령하겠습니다."
중사는 다섯 손가락을 꼬부려 장난스레 거수경례를 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김 중사, 하나는 초저녁용, 또 하나는 밤중용, 또 하나는 새벽용이야. 상부로부터 첩보를 받아 적을 때마다
상황판을 골라서 표시를 하는 거야. A급은 적색, B급은 청색, C급과 D급은 노랑색으로....알았지?"
"아! 존경하는 중위님, 이제야 감이 옵니다. 돌아가 즉시 만들겠습니다."
첩보를 받아 적는 노력이 10이라면 지도판 위에 점 하나 표시하는 노력은 1도 안 됐다. 하나하나의 점은 의미
없다. 그러나 여러 날에 걸쳐 표시된 수많은 점들은 일연의 분포와 추세를 나타냈다. 시간대별로 베트공들이
어떻게 이동해 다니는지에 대하여 훤히 읽을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통계의 묘미인 것이다. 매일 밤 나는 이 상황도에 따라 사격을 가했다. 구태어 내가 사격을 가할
좌표를 찍어줄 필요가 없었다. 누구라도 상황판만 보면 언제 어디에 사격을 해야 할지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잠이 들더라도 병사들은 정해진 시스템에 의해 포를 날렸다. 그리고 얼마 후 체포된 베트공의 진술에서
"한국군 포에는 눈이 달렸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내가 할 일을 병사들이 메워 줬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위 두 명이 해야 할 업무를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매일 아침, 나는 밤새 있었던 상황들을 손바닥만한 쪽지에 요약하여 대대장 숙소로
직접 가지고 가 보고했다. 대대장은 구두로 보고하지 않아도 그 쪽지만 보고도 만족해 했다.
무섭기로 소문난 대대장이었지만 내가 가면 언제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응, 응, 알았어. 그래그래 수고했어. 바쁠텐데 어서 가봐, 아니 우유 한잔 줄까?"
어느 날 미군 중령이 나의 직속상관인 작전참모를 찾아왔다. 나의 직속상관은 소령이었다. 내가 통역을 했다.
미군 중령은 포병 대대장이고, 예하 포대들이 월맹접경지역에서 아직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포들을
헬기로 공수해야 하는 상황에 있었다.
그런데 포를 헬기로 실어 날라본 일이 없어 시험용으로 1개포만 잠시 빌려 줄 수 없겠느냐고 정중히 부탁했다.
그 시범에는 미군 장성들이 많이 참석할 것이라며 시범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내 직속상관인 작전참모는 이를
쾌히 승락했고 대대장도 허락했다.
다음 날 나는 1개분대를 포차에 태우고, 차 뒤에는 포를 단단히 매단 채 미군부대로 갔다. 하지만 그 중령이
아니고 뚱뚱한 미군 소령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고압적인 태도로 트럭에 타고 있는 우리 병사들을
거만하게 훑어보더니 모두 차에서 내려 일렬로 서라고 했다.
예상 외의 행동에 나는 기분이 몹씨 상했다. 하지만 정중한 표현을 사용하여 물었다.
"혹시 무엇 때문인지 말해 줄 수 있습니까?"
"검열을 해야겠다."
"나는 미군 중령 아무개의 부탁을 받고 도와주러 온 사람이다. 당신한테 검열받으러 온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군지 아는가? 나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고문관을 지냈다. 한국군 장군들도 내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
"그럼 검열을 하려면 한국에 가서 그런 장군들에게나 해라."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 소령이 내게 달려들려고 했다. 나는 선 자리에서 미군 소령을 뚫어지게 쏘아보면서
아주 낮은 작은 소리로 병사들에게 말했다.
"야, 오늘 이 건방진 놈, 손 한 번 봐줘야겠다. 이놈 발밑에다 일제히 조준사격을 가하라. 얼른 쏴 빨리."
"따다다다닥 딱!"
수많은 총알들이 그의 발밑 모래 땅에 꽃혔다. 그러자 그는 체신이고 뭐고 내동댕이친 채 혼비백산 도망쳤다.
병사들이 그의 발밑을 따라가며 조준 사격을 계속했다. 그는 아마 십 년 이상 감수했을 것이다. 병사들이 웃어
대며 그를 야유했다. 그에게는 일생일대 가장 큰 모욕이었을 것이다.
의외로 빨리 돌아온 것이 이상했는지 작전참모가 사유를 물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경솔하게 일을 아주
크게 저질렀다며 나를 꾸짓었다. 나는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했지만 그는 감히 미군을 건들었다며 무척 겁을
먹었다. 그래서 내가
"과장님, 미군에게는 배알도 없이 무조건 굽실굽실 해야 합니까?"
:허~허! 이 친구,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만."
작전참모는 나에게 그가 한국에서 겪은 미 고문관들의 위력에 대한 사례들을 설명해 주며 내가 아주 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식시키려고 했다. 대대장이 이뻐하고 또 내가 대대장을 위한 통역을 도맡아 하고 있어선지
작전과장은 무척 화가 나는 모양이었지만 더 이상 야단치지는 않았다.
그 이틑날이었다. 별 일은 없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이 웬일인가! 미군 중령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중위에 불과한 나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 소령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곧 다른 곳으로 갈 것입니다. 그는 어제 내가 계획한 일을 완전히
망쳐놓았습니다. 하사관 한 명을 파견할 터이니 우리가 요청할 때 포를 지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때부터 나는 미군 하사관과 함께 근무하면서 회화능력을 더 기를 수 있었다. 그후 8개월을 지하 벙커에서
보냈다. 햇빛을 보지 못하는 벙커생활이 힘들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그런데 햇빛이 유난히 밝던
어느 날, 갑자기 코피가 쏟아졌다. 그리고 졸도했다. 들것에 실려서 병원으로 갔고 생전 처음 알부민이라는
주사를 맞았다.
"안 되겠다. 내가 좀 편하자고 저놈을 계속 부려 먹다가는 사람 잡겠다. 당장 미군부대로 보내라."
대대장 명령으로 갑자기 나는 미군부대 연락장교가 됐다. 그때 몸무게는 47kg, 26세 청년 사관에겐 어울리지
않는 너무 마른 몸이었다. 미군부대는 동지나해의 아름다운 모래 위에 있었고 부대 위치 자체가 휴양지였다.
투명한 바닷물, 희고 고운 모래밭, 한가로이 흔들리는 야자수 잎새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물색깔, 파도만이
주인인 적막함, 이 모두가 쉽게 접할 수 없는 감추어진 아름다움이었다. 낮에는 자연 속에서 보냈고, 밤에는
맥주, 밴드, 파티와 춤으로 이어지는 미군 병영문화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휴양생활을 보냈다.
대대장이 귀국하고 신임 대대장이 부임했다. 신임 대대장이 맨 먼저 해야 하는 일 중에 하나는 자매 마을에
가서 인사 즉, 신고하는 일이었다. 대대장 당번에게서 전화가 왔다. 신임 대대장이 자매 마을에 가서 잔치를
배풀고 연설을 할 때 통역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월남어 교육대에서 1등을 했으니 잘 하지 않겠느냐는 게 참모들의 중론이라고 했다. 그러나 월남어를 배우긴
했지만 8개월이나 사용하지 않아 영 자신이 없었다. 설사 졸업 직후였다 해도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연설을
즉시 즉시 통역한다는 건 어림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도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캔 맥주 한 개를 들고 바닷가로 갔다. 한동안 먼 바다를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대대장이 되어 직접 연설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대대장이 무슨 연설을 하든 상관없이 내가 연설문을 대충 짐작하여 작성하고 통역하는 것이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내가 대대장이면 그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생각하며 연설문을 작성했다. 그리고
사전을 찾아가며 월남어로 번역했다. 드믄드믄 웃기는 이야기도 집어 넣었다. 마을 사람들이 가끔씩 웃어야
통역이 잘됐다는 말을 들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다음날, 신임 대대장이 많은 주민들을 불러 잔치를 하면서 마이크로 연설했다. 그리고 그가 연설하는 동안에
나는 그의 말을 열심히 적는 척 했다. 대대장이 한참 이야기를 한 후에는 나를 쳐다 보았다. 물론 통역하라는
뜻이다. 그러면 나는 내가 만들어 가지고 간 월남어 연설문을 적당한 길이 만큼 읽었다.
당연히 마을 주민들이 싫어 할 이유가 없는 내용이라 통역이 끝나면 노인들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웃기는
말을 할 때는 와~ 하고 웃었다. 박수도 쳤다. 대대장이 싱글벙글했다. 주민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있으니
자신의 연설이 좋았다는 뜻이고 통역도 잘한 것이 되는 것이다.
주민들이 가져온 떡을 먹고 맥주와 콜라를 마시는 동안에 대대장과 노인들 사이에 많은 대화가 오갔지만 그런
정도 대화 통역은 문제 없이 할 수 있었다. 만일 그 일에 내가 고지식하게 대처했더라면 대대장도 나도 모두
난처했을 것이다. 대대장의 실제 연설 내용은 내가 예상한 것과 거의 비슷했고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그 잔치는 대대장이 부임 인사를 하면서 신고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어쨌던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것이다.
대대장은 잔치가 끝난 후 여러 참모들에게 나를 극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 월남어 실력을 믿었던지 며칠 후
뚜이호아에 있는 월남군 연대 연락장교로 보냈다.
그 당시 월남군 연대장은 중령이었고 성장(省長:한국의 도지사)을 겸하고 있었다. 주월한국군은 미군과 유대
보다 월남 성장과의 유대를 더 중시했기 때문에 내가 미군부대를 떠나 월남 성장에게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월남의 군수 자리는 통상 대위와 소령이 겸직했다.
일반적으로 월남군 장교들은 미군에게는 당당하고 추상 같은 태도를 취했지만 한국군에게는 친절하고 자상한
형제처럼 대했다. 한국군이 그들의 처지와 사정을 잘 이애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은 월남 사람들의 생리구조였다.
목숨까지 버리면서 지켜주고 있는 미군에 대해 왜 그렇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에서 부자에 미남인 클라크 케이블은 '아름답지만 버릇 없는' 비비안 리를 인내
하며 잘 대해 주었지만, 그녀는 잘해주면 해줄수록 콧대를 더 높이 세웠다.
그러다가 어느 날 결국 싸늘하게 버림을 받는다. 떠나는 클라크 케이블을 제발 떠나지 말라고 매달리며 애원
했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굳게 접은 뒤였다.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월남 민족, 잘해 주면 해 줄수록 더 콧대만
높이 세우는 이상한 민족, 스스로를 지키지 않는 월남 민족에게서 결국 미국은 마음을 접고 떠났다.
미국이 떠나자 그 버릇 없던 월남인들은 1975년 4월30일 패망을 맞았다. 그리고 천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도망가다가 죽고, 바다에 빠져 죽고, 재교육 켐프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운을 당했다. 그리고 극소수 운 좋은
사람들만 외국으로 특히 대부분 미국으로 건너가 풍요한 삶을 살고 있다.
미국을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이!!!
정동영과 강정구 등은 미국을 증오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동영은 자식을 미국에 유학 보낸 후에 자신도
미국에 가서 장기간 체류했으며, 강정구 아들들도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미국의 덕을 크게 보고
있는 사람들이 어째서 미국을 증오하는지 그 이중적 정신구조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온갖 자유와 부를 누리며 살고 있는 종북 좌익들, 그들도 적화통일되면 미국으로 도망갈
것이다. 월남이 망할 때 프랑스로 망명하여 명상의 마을 플럼빌리지를 설립, 운영하고 있는 탁닛한이란 중도
월남이 망할 때까지 평화를 외치며 극렬하게 반미 시위를 주도했던 사람이다.
그로 인해 월남이 망했고 수많은 월남 국민들이 죽었다. 나라와 국민을 그렇게 해 놓고 그는 프랑스로 도망가
무슨 고승이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잘 살고 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
환경재단과 조선일보, 불교 조계종 등이 그를 초청했다.
탁닛한은 2003년 3월16일 수행자 24명을 대동하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을 후원하는 주체들은
탁닛한의 국회 연설을 포함한 19박 20일간의 바쁜 일정을 기획하고 후원했으며, 조선일보는 매일같이 그의
활동과 연설 내용을 생중계했다.
"전 국민 평화염원 걷기 명상" 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망한 월남에서 외쳤던 평화를 이제 한국에 찾아와 전염
시키고 있는 것이다. 당시는 노무현 시대였고, 평화를 가장한 좌경화 작업이 요원의 불길처럼 한참 타오르고
있을 때였다.
나는 탁닛한처럼 오늘 날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있는 사람들도 월남 같은 상황이 되면 맨 먼저 도망갈 거라고
생각한다. 탁닛한이 월남이 망하기 직전 제일 먼저 비행기로 편하게 프랑스로 도망갔듯이....
